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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떠나간 자리에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

눈치100단

Last update: 2022-06-24

제1화 임신했어

  • 임신 주기: 6주 차
  • 초음파 검사 결과를 받고 난 후 보게 된 한 줄의 결과는 나의 발걸음을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고작 한 번뿐이었는데, 어떻게 임신이 가능했지? 이제 어떡하지?
  • 부진호에게 알려줘야 하나? 그럼 이혼은 없던 일로 할까? 아니야, 그 사람이라면 파렴치하게 아이를 가지고 자신을 협박하려 든다고 비겁하다고 하겠지.
  • 결국 나는 마음속의 응어리를 내리누른 채 초음파 검사 결과를 가방에 넣고는 곧장 병원을 나섰다.
  • 병원 건물 앞에 세워진 검게 빛나는 마이바흐 안, 3분의 1쯤 열린 차 창문 너머로 운전석에 앉아있는 남자의 수려하게 뻗은 눈매가 언뜻 보였다.
  • 좋은 차와 미남의 조합은 자연스레 지나가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 리치 앤 핸섬, 그것은 부진호의 수식어였다. 요 몇 년 동안 자주 있었던 일이라 이젠 놀랍지도 않아 난 그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조수석에 올라탔다.
  • 눈을 감은 채 사색에 잠겨있던 남자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일은 다 끝났어?”
  • “응.”
  •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병원과 계약이 체결된 계약서를 건네며 말했다.
  • “육 원장님께서 당신에게 안부도 전해달라고 했어.”
  • 원래 오늘 계약은 나 홀로 와서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 오는 길에 우연히 부진호를 만났고 무엇 때문인지 가는 길이라고 나를 이리로 데려다준 것이었다.
  • “이 건은 앞으로 네가 전적으로 맡아서 하는 걸로 해.”
  • 원체 말이 별로 없는 부진호는 계약서를 받지도 않은 채 그저 말 한마디만 건네곤 곧장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 모습에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잇지 않았다.
  • 오랜 시간 이어진 이런 침묵에 나는 그저 순종하며 시키는 일을 하는 것, 그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진 것 같았다.
  • 차는 시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밤이 늦은 시각인데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디로 가려는 거지? 그러나 나는 늘 그의 일에 대해 먼저 묻지 않았었던 터라 비록 마음 한구석에서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저 조용히 침묵을 선택했다.
  • 그러다 그 초음파 결과를 생각하니 나는 순간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흘깃 쳐다본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냉랭한 기색이 가득했다.
  • “부진호.”
  •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가방을 잡고 있던 손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는 것이 제법 긴장을 한듯했다,
  • “말해.”
  • 차가운 두 글자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 그래, 늘 이런 태도로 날 대했었지. 시간이 지나니 왠지 나의 마음이 개운해졌다. 마음속의 불안을 누르고 숨을 한번 들이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 “나…”
  • 임신했어.
  • 네 글자에 불과한 그 한마디는 별안간 울린 그의 휴대폰 벨 소리에 그대로 다시 삼켜졌다.
  • “시연아, 무슨 일이야?”
  • 어떤 사람의 온기는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하기도 한다. 더 없는 애정이나 즐거움은 결국 한 사람에게만 전해지기도 한다.
  • 부진호의 온기는 오직 육시연만을 위한 것임을 그와 육시연의 대화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 전화 저 편에서 육시연이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부진호는 급 브레이크를 밟고는 휴대폰에 대고 어르고 달래고 있었다.
  • “알겠어. 내가 금방 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가만히 있어.”
  • 전화를 끊자 다시 그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로 돌아와 나를 향해 말했다.
  • “내려.”
  • 일말의 여지도 없는 명령이 내려졌다.
  • 이런 적이 처음인 것도 아니라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 채 목 끝까지 차오른 말들을 전부 뱃속으로 삼키며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 나와 부진호의 결혼은 우연이었던 한편 운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부 사랑과는 별개이기도 했다. 부진호의 마음속에는 육시연이 있었고 나의 존재란 그저 장식이나 장애물에 불과했다.
  • 2년 전, 부 씨 가문 어르신이 심근경색으로 병실에 드러누워 부진호에게 나와의 혼인을 종용했었다. 비록 부진호는 싫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르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와의 혼인을 받아들였다.
  • 2년 동안, 어르신이 계셔 부진호는 그저 나의 존재를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어르신께서 돌아가신 지금, 그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변호사를 찾아 이혼 합의서를 작성하고는 내가 사인하기만을 기다렸다.
  • 별장으로 돌아갔을 때엔 이미 밤하늘이 어두워진 뒤라 커다란 집이 텅텅 빈 귀신의 집 같았다. 임신을 한 탓인지 식욕이 없어 나는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가 씻고 잠에 들었다.
  • 아직 잠이 덜 들었는데 마당에서 차 시동이 꺼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듯했다.
  • 부진호가 돌아온 건가?
  • 그는 육시연의 곁으로 가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