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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부진호 씨가 한 아침을 다 먹게 되고

  • 내 말을 들은 육시연의 작은 얼굴이 순간 멍해지더니 검은 두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부진호를 바라보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작게 말했다.
  • “진호 오빠. 어젯밤엔 내가 너무 막무가내였죠. 오빠랑 언니에게 민폐나 끼치고. 언니 보고 남아서 우리랑 같이 밥 먹자고 오빠가 얘기하면 안 돼요? 제 사과라고 생각하고요, 네?”
  • 아니…
  • 하하, 역시. 어떤 사람들은 별다른 노력도 없이 그저 애교나 부리고 약한 모습이나 보이면 남들이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을 그녀들은 손쉽게 잡아챌 수 있었다.
  • 부진호는 원래 나의 존재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육시연이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돌려 나를 흘깃 쳐다봤다.
  • “같이 먹지 그래.”
  • 차가운 말투는 명령조로 뱉어졌다.
  • 아파? 익숙해졌잖아.
  • 나는 미소를 끌어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고마워.”
  • 나는 늘 부진호에게 확실한 거절을 하지 못했었다. 한눈에 마음을 가득 채운 사람은 한평생 쉽게 놓지 못했다.
  • 전생에 정말 나라를 구했나, 처음으로 부진호가 한 아침을 맛봤다. 계란 프라이에 크림수프, 평범했지만 일반적이진 않았다. 나는 늘 부진호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긴 사람이라 그의 손은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있는 줄 알았었다.
  • “주희 언니, 진호 오빠가 만든 계란 프라이 한번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우리 같이 있을 때 자주 해주거든요.”
  • 그렇게 말하며 육시연은 내 그릇에 계란 프라이 하나를 집어줬다.
  • 그리고 이어서 부진호에게 다정하게 하나 집어주고는 웃으며 말했다.
  • “진호 오빠, 오늘 나랑 같이 연호동에 꽃 구경 가기로 약속한 거 잊으면 안 돼요.”
  • “그래.”
  • 그렇게 대꾸한 부진호는 우아한 자태로 계속해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늘 말이 별로 없던 그였지만 육시연의 말에는 늘 대꾸해 줬고 그녀의 요구에는 늘 응해줬다.
  • 성준수는 이미 이런 광경에 익숙한 건지 그저 우아하게 아침을 먹으며 마치 외부인인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시선을 내린 나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오늘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인데 만약 부진호가 육시연과 함께 가버린다면, 그럼 부 씨 본가 쪽은…
  • 그 누구라도 제대로 못 먹을 아침식사라 그저 간단히 몇 번 깨작이다 부진호가 식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려 위로 향하는 것을 보고 나도 얼른 젓가락을 내려놓고 따라갔다.
  • 안방.
  • 내가 뒤따르는 것을 알고 있던 부진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 “할 말 있어?”
  • 이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러자 그의 건장한 몸이 적나라하게 노출이 돼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그를 등진 채 말했다.
  • “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 날이야.”
  • 등 뒤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벨트 버클 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그의 무미건조한 답이 전해졌다.
  • “당신이 가면 되잖아.”
  • 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부진호, 당신 할아버지야.”
  • 그는 부 씨 가문의 장손으로서 이럴 때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 할 지 뻔했다.
  • “하관에 관해서는 이미 진도하에게 처리하라고 지시했어. 다른 자잘한 일들은 당신이 진도하랑 얘기해.”
  • 뱉어지는 말들이 무미건조해 마치 아무 상관 없는 일을 당부하는 것 같이 들렸다.
  • 그가 서재로 향하는 것을 보자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마음이 조금 괴로웠다.
  • “부진호, 당신에게 있어서 육시연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인거야? 대체 당신에게 가족이란 뭐야?”
  • 그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검은 두 눈이 슬쩍 가늘어지더니 시리도록 차가운 모습을 했다.
  • “부 씨 집안일은 네가 이렇게 시끄럽게 굴게 못 돼.”
  • 잠시 멈춘 그의 입술이 위로 향하더니 더없이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 “넌 자격 없어.”
  • 찬물처럼 뱉어진 짧은 한 마디가 나를 덮쳐와 뼛속까지 한기가 사무치게 만들었다.
  •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웃음을 흘렸다.
  • 난 자격이 없다니.
  • 하하.
  • 2년의 시간은 차가운 돌을 달구기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 “얼굴이 뻔뻔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오지랖 부리는 걸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요.”
  • 옆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모를 육시연이 팔짱을 낀 채 문 턱에 기대서있었다. 얼굴에 어려있던 귀여운 순진함은 온데간데없이 음습한 기운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