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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육시연이 임신을

  • “시연 씨의 태도 변화가 생각보다 빨라 의외네.”
  •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는 가방을 챙겨 부 씨 본가로 향할 채비를 했다.
  • 부진호가 가지 않는다고 나도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 막 문 앞을 지나려는데 육시연이 막아섰다. 부진호가 없자 가녀린 토끼 같은 위장은 집어치운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 “언제 이혼 합의서에 도장 찍을 거예요?”
  • 순간 멈칫한 나는 도리어 웃음이 나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 “시연 씨는 지금 제3자의 신분으로 나한테 이혼하라고 종용하는 거야?”
  • “그쪽이야말로 제3자죠.”
  • 다른 사람이 그녀를 제3자라 부르는 것이 맘에 안 드는 듯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 “심주희, 당신이 아니었으면 이 저택의 안주인은 당신이 아니라 나였어요. 어르신은 진작에 돌아가셨으니 이제 당신이 여기 남아있을 수 있게 보호해 줄 사람은 없어요. 내가 당신이었다면 얌전히 도장 찍고 진호 오빠가 준 돈을 챙겨서 멀리 사라졌을 텐데.”
  • “안타깝게도 난 당신이 아니야, 시연 씨.”
  • 차갑게 그녀에게 대꾸하고는 그녀의 행패를 무시한 채 그녀를 스쳐지나 계단 아래로 향해 떠나려고 했다. 세상에 부진호를 제외한 그 누구의 말도 나에게 상처 한 줄 내지 못했다.
  • 남에게 떠받들리는 것에 익숙한 육시연은 나의 무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있는 힘껏 나를 잡아챘다.
  • “심주희 씨, 도대체 얼마나 더 뻔뻔해지려고 그래요? 진호 오빠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그 옆에 달라붙어있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요?”
  •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니 뭔가 웃겨 차분하게 대꾸했다.
  • “이미 그 사람 마음에 내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뭘 또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 “당신…”
  • 조그마한 계집애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다 붉어져서는 순간 말을 잃었다.
  •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에 조소를 내걸고는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 “내가 그 사람 곁에 머문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
  • 여기까지 말하고는 평온한 말투로 돌아온 나는 여유로운 어조로 가볍게 말했다.
  • “그 사람 기술이 그렇게 좋은데, 네가 보기엔 쓸데가 좀 있겠어?”
  • “심주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 육시연은 화가 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다른 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손을 들어 나를 밀치려고 했다. 내 등 뒤엔 계단이라 본능적으로 몸을 옮겨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 그러나 나는 제대로 중심을 못 잡은 육시연이 그대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질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아…”
  • 거실에서 그녀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와 나는 순간 멍해져 미처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냉랭한 기운에 몸이 밀쳐지더니 뒤이어 부진호의 인영이 더없이 빠른 속도로 계단을 뛰어내려가 그 아래에 누워있는 육시연을 안아들었다.
  • 계단 아래의 육시연은 몸을 만 채 고통으로 창백해진 얼굴로 배를 안은 채 가녀린 목소리로 연신 외쳤다.
  • “아이, 내 아이.”
  • 그녀의 몸 아래로 핏자국이 서서히 퍼지더니 바닥의 카펫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 보이자 몸이 굳었다.
  • 육시연이… 임신을? 부진호의 아이?
  • “진호 오빠. 아이 아이…”
  • 육시연이 부진호의 옷자락을 잡은 채 한번 또 한 번 아이를 되뇌었다.
  • 부진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더니 시린 얼굴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 “걱정 마, 아이는 괜찮을 거야.”
  • 그는 육시연을 달래며 그녀를 옆으로 안아들고 크게 보폭을 옮겨 문밖으로 향했다.
  • 몇 걸음 옮기던 부진호는 돌연 멈춰 섰다. 그의 굳은 얼굴에서 검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를 향한 목소리에는 겨우 참은 분노가 언뜻 보였다.
  • “심주희, 잘하는 짓이다.”
  • 가벼운 한 마디에는 냉담과 증오, 분노마저 담겨있었다.
  • 넋이 나간 채 자리에 박혀 있던 나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따라가서 설명 안 해도 돼요?”
  • 등 뒤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와 흠칫 놀라 고개를 드니 성준수였다. 대체 언제 그도 따라 올라왔었지?
  • 마음속에 요동치는 것들을 내리누른 채 담담하게 말했다.
  • “뭘 설명해요?”
  • 그의 눈썹이 들썩였다.
  • “시연이를 밀었다고 오해할까 봐 걱정 안 돼요?”
  • 나는 시선을 내리깐 채 씁쓸하게 말했다.
  • “제가 밀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그의 시연이 다쳤다는 거죠. 결국엔 누군가가 이 일을 책임져야 해요.”
  • “참 좋은 생각이네요.”
  • 계단 아래로 향한 성준수가 구급상자를 챙겨들고 별장을 나섰다.
  • 아마도 병원으로 따라가 육시연을 봐주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