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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육시연을 돌보다

  • 서혜영은 코웃음을 치며 조롱했다.
  • “그 놈은 그냥 양심도 없는 검은 머리 짐승인 거예요, 여태 마음 쓰신 아버님만 불쌍하게 됐죠.”
  • “당신은 적당히 해.”
  • 부창준은 그녀를 향해 눈을 부릅뜨더니 유감이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 “시간도 늦었고, 네 할아버지도 편히 가셨으니까 얼른 들어가 보렴.”
  • “네, 삼촌. 들어가세요.”
  • 부창과 서혜영은 이미 반백을 넘긴 나이였지만 슬하에 자식 하나 없이 부 씨 그룹의 지분으로 제법 여유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 서혜영은 비록 입으로는 험했지만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 저 두 부부는 제법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다 할아버지 묘비 앞에 서니 정신이 조금 멍해졌다. 할아버지가 이리 가시니 나와 부진호의 연도 아마 이대로 끝이겠지.
  • 바람이 멈추고 비가 마르며 언젠가 해는 지듯이 난 결국 그를 잃고 말겠지.
  • “할아버지, 잘 지내셔야 해요. 나중에 시간 좀 지나면 다시 뵈러 올게요.”
  • 묘비 앞에 서서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벗어나려 몸을 돌리고는 놀라 얼어붙었다.
  • 부진호는 언제 여기로 온 거지?
  • 온통 검게 차려입고 차갑게 가라앉은 안색을 한 그의 기다린 몸이 내 등 뒤의 머지않은 곳에 서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워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두 눈동자가 어르신의 비석을 향해있었다. 지나치게 어두운 안색에서는 어떠한 기색도 엿볼 수가 없었다.
  • 내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자 그는 시선을 거두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가자.”
  • 그가… 날 데리러 온 건가?
  • 그가 몸을 돌려 떠나려고 하자 나는 황급히 다가가 그를 막아섰다.
  • “부진호, 할아버지께서 이미 가셨어. 당신도 좀 내려놔. 당신도 알잖아, 요 몇 년 동안 할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내어줬는지…”
  • 나를 향한 그의 시선이 점점 차가워지자 나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 당연히 그가 크게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그를 따라 묘지를 나서니 이미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원래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한 운전기사는 부진호가 오게 되어 먼저 돌아가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부진호와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
  • 차에 올라타 그가 시동을 걸고 출발해 가는 내내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 그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한 번씩 그에게 육시연의 상황에 대해 물으려 입을 달싹거렸다가도 매번 그의 한껏 가라앉은 안색을 보면서 다시 말을 내리 삼켰다.
  • 그러나 한참이 지나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 “시연 씨는 어떻게 됐어?”
  • 비록 내가 민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코앞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았던가.
  • “끼익…”
  • 잘만 가던 차가 돌연 멈춰 섰다.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던 탓에 관성에 따라 나의 몸이 격하게 앞으로 기울었고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허리가 단단히 눌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어 부진호의 몸도 반쯤 눌렸다.
  • 그의 검은 두 눈이 뚫어져라 나를 향했다. 그 두 눈동자에 담긴 날카롭고 시린 기운에 위험함을 감지한 몸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부진호…”
  • “어떻게 되길 바란 건데?”
  • 그는 입을 열어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비아냥댔다.
  • “심주희. 너 정말로 할아버지가 그 상자 줬다고 내가 이 결혼을 끝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 그 말에 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말 무소불위의 남자였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그는 모든 것을 알아냈다.
  • “내가 민 거 아니야.”
  • 씁쓸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내리누르며 그의 시선을 마주하자 어쩐지 웃음이 났다.
  • “부진호, 할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난 몰라. 그걸 이용해 우리 결혼 생활을 유지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이혼을 하고 싶으면, 그래. 그렇게 할게. 내일 바로 법원 가서 협의 이혼하고 도장 찍자.”
  •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차 창밖은 바람소리와 함께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차 창문을 연신 두드려 안 그래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더 조용하게 음습하게 내리눌렀다.
  • 내가 갑자기 이혼에 동의하자 부진호는 의외라고 생각한 듯했으나 그것도 잠시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를 날렸다.
  • “시연이는 아직 병원에 누워있는데, 지금 이혼에 동의한다는 건 그냥 이대로 도망가겠다는 거야?”
  • “당신은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 그럼 그렇지, 그의 사람이 나 때문에 병원에 누워있는데 날 그리 쉽게 놓아줄 리가 없지.
  • “내일부터, 당신이 가서 시연이 보살펴.”
  • 몸을 똑바로 세운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핸들을 잡았다. 그 눈빛이 깊게 가라앉은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