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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듯

  • 복도가 그리 넓지 않아 좁은 통로에서 서로 마주 보게 되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말을 건넸다.
  • “심주희 씨, 저 시연이 진찰해 주러 왔어요.”
  • 성준수와 부진호는 서로 죽고 못 사는 친구 사이였다. 누군가가 그랬었다, 그 남자의 마음에 내가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그저 그 사람의 친구의 태도를 보면 보인다고.
  • 태도까지 볼 필요도 없이 호칭 하나만 들어도 알았다. 그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영원히 단 하나, 심주희 씨 밖에 없을 것이다.
  • 얼마나 예의 있고 거리감 있는 호칭인가.
  • 너무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다 보면 마음에 응어리가 지기 십상이라 얼굴에 심드렁한 미소를 내 걸고는 몸을 비켜 길을 내주었다.
  • “그래요, 들어가 봐요.”
  • 가끔은 육시연이 정말 너무 부러웠다. 그저 눈물 몇 방울이면 내가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얻지 못한 온기를 가질 수 있었으니.
  • 나는 안방으로 돌아와 부진호가 입지 않았던 옷들을 꺼내 들고 안방을 나와서 거실로 향했다.
  • 육시연을 진찰하는 것은 빠르게 끝났다. 체온을 재고 해열제를 처방한 성준수는 이내 떠날 준비를 했다.
  • 그러다 내가 거실에 서있는 것을 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 “심주희 씨, 밤도 늦었는데 아직 안 주무셨네요?”
  • “네, 이따가 자려고요.”
  • 나는 손안의 옷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 “옷 젖었잖아요. 밖에 아직 비가 오고 있으니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요, 감기 걸릴라.”
  • 내가 그에게 옷을 건네는 것이 의외였던 건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 수려한 얼굴에 슬쩍 웃음을 내걸었다.
  • “괜찮아요. 저 건장해서 별로 상관없어요.”
  • 나는 옷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 “이 옷, 진호가 아직 입지도 않은 거예요. 택도 아직 달려있고요. 두 사람 몸매가 비슷하니까 그런대로 입어요.”
  • 말을 마치고 나는 곧장 계단을 올라 안방으로 향했다.
  • 그리 착한 마음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외할머니가 입원했을 당시, 그 수술의 집도의가 성준수였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명의인 그는 부 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나의 외할머니 수술 집도를 동의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저 옷으로 은혜를 갚은 셈이었다.
  • 이튿날.
  • 밤새 내린 폭우가 그친 이른 아침, 비춰지는 햇살에 부드러운 흙냄새가 묻어있었다.
  •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었던 나는 세수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자 부진호와 육시연도 주방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부진호는 검은색 앞치마를 맨 채 렌지 앞에서 기다란 몸으로 계란 프라이를 만들고 있었다. 평소 풍기던 차가운 기색이 옅어지고 요리하는 사람의 온기가 제법 풍겼다.
  • 육시연의 빛나는 검은 두 눈동자가 그런 그의 몸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고열이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오밀조밀하게 생긴 작은 얼굴이 곱게 붉어져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 “진호 오빠, 나 좀 바싹 익은 계란 프라이 먹고 싶어요.”
  • 말을 하며 육시연은 부진호의 입에 딸기를 하나 넣어주었다.
  • “근데 너무 태우면 안 돼요, 그럼 쓴맛 나잖아요.”
  • 딸기를 먹던 부진호의 검은 두 눈동자가 그녀를 흘깃 바라봤다. 비록 일언반구도 없었지만 그 흘깃 한 번에도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 능력 있는 남자 옆에 아름다운 여자가 함께 하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어 정말 잘 어울렸다.
  • 포근하고 아름다운 분위기의 이런 장면은 제법 달달해 보였다.
  • “저 둘, 되게 잘 어울리죠. 안 그래요?”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돌리니 성준수가 보였다. 어젯밤 비가 거세게 내린 데다 육시연이 고열을 앓고 있었으니 당연히 부진호가 그를 보내지 않았을 것임을 새삼 까먹고 있었다.
  • “좋은 아침이에요.”
  • 웃으며 말을 건넨 나의 시선은 그가 입은 옷에 닿았다. 어젯밤 내가 건네준 옷이었다.
  • 나의 시선을 알아챈 그가 눈썹을 들썩이고는 웃었다.
  • “옷이 딱 맞더라고요, 고마워요.”
  •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 “별말씀을요.”
  • 이 옷은 내가 부진호에게 사준 옷이었지만 그는 한번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 인기척이 느껴졌던 걸까, 육시연이 우리를 향해 소리를 높였다.
  • “주희 언니, 준수 오빠. 일어나셨어요? 진호 오빠가 계란 프라이 해줬어요. 얼른 와서 같이 먹어요.”
  • 들려오는 말투가 마치 집안 안주인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 그 모습에 나는 옅게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 “괜찮아, 어제 냉장고에 빵이랑 우유를 사놨거든. 시연 씨 나은지 얼마 안 됐으니까 많이 먹어.”
  • 어찌 됐든 이곳은 내가 2년간 살아왔던 곳이고 집 문서에도 나와 부진호,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내가 아무리 나약하더라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