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의 정아는 준일과 단둘이 있을 때 떨림도 있었고 조심스러움도 있었지만 5년이 지난 지금 모든 것이 변했다. 무감각 그 자체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고 준일은 정아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이 남자가 정아를 보고 있으니 정아는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5년 전이었다면 준일은 이런 표정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정아가 멀리 떠나가길 바랐고 평생 그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늑대가 사냥감을 지켜보는 것처럼 정아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정아가 먼저 나갔다. 준일은 뒤에서 그녀의 늘씬한 뒷모습을 보면서 한참을 침묵에 잠기더니 이내 뒤를 따랐다. V2 룸 어구에 도착하자 정아가 발길을 멈췄다.
준일은 웃으며 물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정아는 이를 악물더니 룸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는 순간 주위에 휘파람 소리도 들려오고 술 냄새와 함께 담배 연기가 진동했다. 정아는 싫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눈썹만 살짝 찌푸렸다.
곧이어 소파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완전 예쁜데! 누가 데려왔어?!”
준일이 뒤에서 웃으며 물었다.
“왜요? 백은선 씨, 갖고 싶어요?”
고개를 들어 보는 정아의 시선을 따라가면 강병준도 보인다. 모두 소파에 앉아있었고 주위에 술 따르는 아가씨들이 하나같이 짧은 치마에 어깨를 내놓고 앉아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아였다.
백은선은 술을 한잔 따르고 정아를 향해 말했다.
“준일 씨가 데려왔어요? 예쁜 언니, 나랑 한잔할래요?”
“이봐요, 백은선 씨. 적당히 해요.”
병준이 뒤에서 귀띔해주는 것 같았지만 이 분은 이미 취하신 상태라 정아를 안고 한쪽 편에 앉았다. 그리고 준일을 향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준일 씨 나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에요? 내가 또 이런 언니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준일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은선은 계속하여 술을 마시고 수박 하나를 정아의 입가에 갖다 댔다. 정아는 눈썹을 찌푸리고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결국 받아먹었고 주위는 난리가 났다.
“하하하! 백은선 씨! 수박까지 먹이다니요!”
“그래도 받아먹었잖아요! 백은선 씨 오늘 한 건 하시겠어요!”
백은선은 정아를 안고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물었다.
“예쁜 언니, 나랑 게임할래요?”
곁에서 보고 있는 준일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술잔을 꽈악 잡았다. 병준이 슬쩍 말을 걸어왔다.
“준일아. 내가 은선 씨한테 말할게...”
“됐어.”
준일의 목소리는 떨림조차 없이 차가웠다.
'고작 여자일 뿐인데 왜...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정아는 은선을 향해 웃었다.
“박준일 씨와 비즈니스 하시는 분 맞죠?”
“에이, 언니. 놀 때는 비즈니스 얘기 하지 맙시다.”
백은선은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준일을 향해 말했다.
“박 회장, 뭐라고 얘기했기에 이렇게 오자마자 비즈니스 얘기부터 꺼내는 겁니까? 분위기 망치면 안 되죠.”
이 사람이 맞나 보다.
정아는 술잔을 들었다. 준일이 그녀를 데려온 목적이 고객의 비위를 맞춰주려는 것이니 그녀는 백은선의 기분을 맞춰줘야 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늦게 왔으니 벌주 한잔할게요. 게임할 때 저만 공격하시면 안 되는 거 알죠?”
백은선은 웃으면서 그녀를 안았다.
“아이, 귀여워라.”
정아는 그의 품에 안겨 미소를 지었다. 빨간 입술이 알코올에 의해 유독 빛났다.
“그래요? 백 도련님도 귀여우시네요.”
백은선이라는 이름이 그녀에게는 낯설지가 않았다. 5년 전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도 상류사회에서 이름을 날린 재벌 집 따님이었으니 그 바닥에서 이름난 도련님들의 이름을 자주 들었다. 백은선이 그중 한 명이다.
옆도시에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곳에서 그와 친구를 맺으려는 사람이 많다.
준일은 다른 사람을 향해 예쁜 미소를 짓는 정아의 모습을 보면서 이유 모를 화가 치밀어올랐다.
술자리에 데려왔던 건 모욕을 주기 위함이었는데 의외로 준일이 먼저 화가 났던 것이다.
병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준일아... 괜찮아?”
아무리 전처라고 해도 자신의 전처를 다른 남자와 술잔을 부딪치게 놔둘 남자는 없다. 아무런 감정도 없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준일은 이를 악물고 차가운 눈빛으로 정아를 쏘아보면서도 겉으로는 다르게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마음대로 하라 그래.”
'그래. 백은선만 꼬실 수 있다면야 술잔 부딪히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 둘이 잠자리를 한다고 해도...'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 갈 때 즈음 주위에서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번쩍 들어 보았을 때 은선과 정아의 입술이 떼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준일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옆에서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언니 너무 멋있잖아! 대박이야!”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사람이 제일 멋있죠!”
“한 판 더 할까요?”
당장에라도 살인을 저지를 것만 같은 준일의 표정에 병준은 얼른 그쪽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게임이에요?!”
“진실게임이요. 말할 수 없거나 못하겠으면 지정된 사람과 뽀뽀하기.”
누군가 웃으며 답했다.
“함께 할래요?”
'뽀뽀를 해?'
준일은 정아를 쏘아보았다. 섹시한 입술을 살짝 벌리고 은선의 목을 감싸 안은 여우 같은 그녀의 모습과 수시로 그녀의 몸에 꽂히는 모든 남자의 시선...
그는 억제할 수 없는 화가 자꾸만 치밀어 올라왔다. 대체 자신이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머릿속 가득 이상한 생각들만 가득 차 있었다. 정아를 집에 데려가 가둬두고 평생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하고 싶었다. 그의 소유물이니까! 건드리는 자는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다!
분노에 섞인 눈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 마침 자신을 향해 웃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물론 5년 전에도 알았지만, 정아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정아가 싫었고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토록 요염한 여자를 집에 데려오면 한낱 꽃병에 불과할 것이고 가식만 떨 것으로 생각했다. 차정안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차정안과 비교할 가치도 없는 여자인데... 왜... 대체 왜...'
더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던 준일은 정아와 은선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순간 당장 정아의 목을 졸라매고 싶었다.
'이 여자가 감히 다른 남자에게 입술을 줘?!'
은선은 그런 준일의 표정을 못 본 건지 여전히 정아를 안고 있었다.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정아의 가녀린 목선과 그녀의 목걸이가 어우러져 지나치게 요염하고 가여웠다.
몸매가 너무 가늘어 안으면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은선은 그녀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혀버렸다. 깜짝 놀란 정아는 수치스러움을 가까스레 참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피어올랐다.
은선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이따가 나랑 나갈래요?”
정아는 침착하게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순진한 표정으로 은선에게 물었다.
“도련님,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거예요?”
은선은 그녀의 머릿결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럴 리가요. 이름이 뭐예요?”
이름...?
정아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려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왜 그래요?”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더니 은선이 농담조로 말했다.
“설마 어디서 무서운 일이라도 하는 거 아니죠? 표정이 살벌한데요.”
정아는 곧바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저 머리가 어지러워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다녀와서 알려드릴게요.”
은선은 휘파람을 불며 물었다.
“같이 가줄까요?”
“잠깐인데요. 뭘.”
정아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돼요.”
“아이고! 쯧쯧쯧!”
“미인이라 상대하기 쉽지 않네요! 오늘 밤 즐거우시겠어요!”
“역시 얼굴이 아름다우니 말도 예쁘게 하네요!”
정아는 화장실 싱크대 옆에 곧게 서서 손을 내밀어 얼굴을 지탱하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얼굴에 홍조가 피어있었다. 그녀는 싱크대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백은선이 이름을 묻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장정아예요.
이 도시에 장정아라는 이름은 5년 전의 장 씨 집안 따님 단 하나뿐이었다.
'룸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볼까?'
5년 뒤의 장 씨 집안 따님이 술이나 따르고 남자의 기분을 맞춰주고 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녀가 지켜왔던 고결함과 강한 의지가 모두 웃음거리로 될 게 뻔했다.
정아는 그 자리에 서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당장 도망가고 싶었지만, 현우를 위해 참았다.
정아는 준일이 접근하는 것도 몰랐다. 그가 그녀를 끌고 여자 화장실의 마지막 칸에 들어가 문을 확 닫는 순간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꼬실 재주는 되면서 이름까지 말할 용기는 없었나 봐?”
정아는 사색이 되어 웃었다.
“박 회장님, 여기 여자 화장실이거든요.”
그런 것 따위 대수롭지 않은 준일은 그 칸의 문을 걸어 잠그고 정아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손으로 그녀의 빨간 입술을 힘껏 문질렀다.
립스틱이 그녀의 입술에 번졌고 준일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은선과 키스를 해?”
정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게임이라 어쩔 수가 없었어.”
“게임인데 그 정도로 스킨십을 해?”
준일은 점점 숙여지는 그녀의 턱을 홱 들어 올렸다.
“장정아. 5년이 지난 지금 더 심해졌잖아?!”
정아는 너무 황당해서 눈물을 뿜어내며 웃어댔다.
“당신이 뭔데 날 지적해?! 박준일 당신이 날 여기로 데려왔잖아! 술접대 하라며? 그래서 하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