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혁은 동생과 조카를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일하러 작업실로 돌아갈 거라며 그 길로 떠났다.
정아가 냉장고에서 도시락을 꺼내어주며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
정혁이 말했다.
“무리하긴 했어. 내 마누라는 어느 별에 살고 있는 걸까?”
문을 확 닫아버리는 정아, 그리고 소파에서 꺄르르 웃어대는 현우.
“노총각 외삼촌!”
그 말에 정아도 웃었다.
“오늘 좋았어?”
현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주 좋았어!!”
“좋으면 됐어. 나중에...”
“나중에 외삼촌한테 고맙다고 말해라는 거지?”
현우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알겠어. 엄마.”
정아는 이토록 똑똑한 아이를 낳은 것이 로또에 당첨된 것만 같았다!
이제 집 청소를 하고 잠을 자려는데 누군가 벨을 눌러댔다.
아직 바닥을 닦고 있던 정아는 현우에게 문을 열라고 시켰다. 현우는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려 총총총 달려가 문을 열었다.
“외삼촌이 뭘 두고 간 건가...”
문이 열리고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현우의 표정이 바로 바뀌었다.
이 아이가 문을 열어줄 거라고는 준일 역시 생각조차 못 했다. 5년이 지났으니 정아가 차가운 얼굴로 맞이할 수도 있고 낯선 눈빛으로 맞이할 수도 있고 아직도 미움과 분노가 가득한 얼굴일 수도 있겠다면서 만남의 순간을 수없이 상상했었는데, 생각과 달리 문을 열어준 건 그의 아들이었다.
준일의 얼굴을 본 현우는 잠시 긴장하더니 곧바로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젠장! 준일은 처음으로 방문하는 집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어린애라니!
하지만 자신과 사뭇 닮은 성격이라니, 흐뭇할 수밖에 없는 준일은 바보같이 웃으며 또 한 번 문을 두들겼다.
그리고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밖에 사람 없어. 이웃이 지나가면서 장난쳤나 봐!”
준일은 화가 났다. 어린애가 저런 새빨간 거짓말을 하다니!!
그는 홧김에 발로 문을 걷어찼다. 깜짝 놀란 현우는 문을 가로막으며 방에 있는 정아를 향해 말했다.
“엄마...문밖에 나쁜 사람이 있어...”
“왜 그래?”
'얘가 왜 이런 표정이지?'
정아는 다가가 현우를 안았다. 두 모자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범법자를 건드렸던 걸까? 뒤로 물러서는 정아와 달리 현우는 그녀의 품에 안겨 오히려 정아를 꼬옥 안아줬다.
“엄마. 무서워하지 마. 박 회장님이야.”
정아의 마음이 순간 싸늘해진다!
'박준일이 어떻게 여길? 나와 현우에 대해 어떻게 알고? 설마...애를 빼앗으러 온 건가?'
여기까지 생각하니 정아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를 꽉 악물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널 절대 나쁜 사람한테 넘기지 않아.”
이 말을 들은 현우는 바닥으로 내려와 당당히 문을 열어젖혔다. 준일이 다시금 문을 걷어차려던 순간 문이 다시 열렸고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어린애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저한테 볼일 있어요?”
'허! 바로 밝혀주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눈치인데!'
준일도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왜, 아빠 들어가면 안 돼?”
“난 아빠 없어요.”
바로 반격하는 현우였다.
“5년간 엄마랑 저랑 둘뿐이었어요. 나한텐 아빠가 없고 필요하지도 않아요.”
철이 들 대로 든 아이의 말에 정아는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준일은 문앞에 서서 현우를 마주 보고 되물었다.
“아빠가 필요 없다고?”
“박 회장님. 저와 엄마는 항상 본분을 지키며 살아왔고 잘못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용건만 간단히 하고 돌아가시길 바랄게요.”
다른 사람들처럼 박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현우의 말이 그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정아가 이렇게 버릇없는 애로 키운 건가?'
화가 난 준일은 집 안으로 들어갔고 거실에 서 있는 정아와 마주했다. 5년간의 이별이 가져다준 감정들이 순식간에 솟구쳐올랐다. 자신을 보는 정아의 눈빛에 담긴 가슴속 깊이 느껴지는 두려움과 아픔에 그는 본인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정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준일을 막을 수 없었던 현우는 아예 엄마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 말했다.
“엄마. 무서워하지 마. 우리 코 자러 가.”
두 모자가 준일을 무시하고 돌아서려던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화난듯한 목소리.
“거기 서!”
정아는 깜짝 놀라며 부르르 떨었고 현우마저 그녀의 손 떨림을 느꼈다.
화가 난 준일은 되려 웃으며 물었다.
“이 아이, 나한테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설명하다니 뭘?”
정아는 준일을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옥살이만 5년을 했어. 대체 왜 날 놓아주지 않는 거야?”
5년의 감옥살이가 이 남자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기대를 전부 박살 내버렸다!
준일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불만을 보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당신이 죄를 지어서 감옥살이를 한 거지. 뭐가 억울해?”
정아는 눈시울이 붉어져 되돌아서서 준일을 향해 말했다.
“그래? 그럼 지금은 왜 또 나를 찾아온 거지? 전과자의 집에 대체 왜 온 건데? 그럴 가치가 없지 않나?”
“물론 가치는 없어.”
준일은 현우의 손을 낚아채며 말했다.
“하지만 이 아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눈물을 애써 참는 정아와 달리 현우는 냉정한 태도로 준일을 바라보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박 회장님. 제 손 놔주시죠.”
따박따박 정중히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준일은 가슴에 가시가 꽂히듯 아파졌다.
“아빠라고 불러.”
“저는 아빠가 없어요.”
현우는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다.
“저한테는 5년간의 감옥살이를 한 엄마 한 분만 계셔요.”
그 순간, 준일은 자신이 한낱 어린아이한테 졌다는 걸 깨달았다.
정아가 입을 열기도 전, 현우의 말 한마디에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고작 5년간의 감옥살이일 뿐이잖아. 내 아이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해쳤으면서 왜 피해자 코스프레나 하며 날 책문하는 거지?!'
그 순간 5년 전 정아가 끌려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준일. 언젠가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면...
잠시 뜨끔하던 준일은 현우를 보다가 갑자기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아이는 언제 낳은 거야?”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당연히 감옥에서 낳았지.”
정아는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당신은 차정안 한 사람만 바라봤잖아. 내가 임신했는지 관심조차 없었잖아. 하긴, 현우가 당신 자식이 아닐 수도 있겠네. 당신 눈에는 내가 하찮은 걸레로 보일 거 아니야!”
준일은 버럭 화를 내며 현우의 손을 놔버리고 정아의 목을 졸랐다.
“5년이 지나도 주둥아리는 여전하네!”
정아는 왼손으로 준일을 밀쳐냈고 그런 그녀의 왼손에 박힌 굳은살을 본 준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아는 항상 오른손을 사용했는데 왜...
준일은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의 오른손을 잡았다. 정아는 갑자기 흥분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놔!”
현우도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엄마 손 놔요!”
옷소매를 잡자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이 가녀린 그녀의 손목이 드러났다. 한때는 정아의 자랑이었던 그 손으로 디자인 작업을 할 때면 세상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었는데. 이제는...
손목에 여러 갈래로 새겨진 흉터가 준일의 눈에 들어왔고 그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