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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5년 뒤, 잊혀지지 않는 그녀

  • 12살 때 어린 장정아는 박준일에게 시집가겠다고 농담을 했고 22살이 되던 해에 소원을 이루었다. 하지만 차정안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그의 마음에 다른 여자가 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그녀는 한낱 간판에 불과했던 것이다.
  • 차정안이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라면 장정아는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혼 첫날밤, 박준일은 차정안과 함께 휴가를 보내러 외국으로 떠났다. 그날 정아는 혼자 외로이 고요한 밤을 보냈다.
  • 날이 밝아오고 그녀가 깨달은 건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 혼자만의 결혼 생활을 무려 5년이나 지속해왔고 그녀는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 깨달았다.
  • '박준일.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 시간도 자존감도 모두 바쳤는데 결국 돌아오는 건 이런 거구나. 5년의 외로운 결혼 생활 끝에 나를 맞이하는게 5년의 감옥살이라니. 처참히 망가진 내 인생을 어떻게 돌려줄 거야?'
  • 악몽으로부터 깨어난 정아는 가슴을 움켜잡고 힘겹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난날들이 악귀처럼 그녀의 꿈에 나타나 떠나지를 않는 것이다.
  • 그 기억들은 그녀가 무방비한 틈을 타 수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매번 그 지옥을 다시 맛보게 되는 것이다.
  • “엄마. 또 악몽 꿨어?”
  • 그녀가 깨어나자 장현우는 우유를 데워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 “내가 이야기해줄까?”
  • 지나치게 철든 이 아이에게 그녀는 한없이 미안하다.
  • 정아는 현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엄마가 이야기 들려줄까? 뭐 듣고 싶어?”
  • “난 됐어. 엄마가 원한다면 내가 들려줄게.”
  • 현우이 말했다.
  • “외삼촌이 엄청 많이 들려줬거든.”
  • 외삼촌, 장정아의 친 오라버니다. 정아가 감옥에서 아이를 낳았고 오빠가 온갖 힘을 다해 감옥으로부터 현우를 구해냈었다.
  • “엄마가 시간이 없어서 이야기도 못 들려주고. 역시 외삼촌밖에 없네.”
  • 정아는 다 마신 우유 잔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 “내일 주말인데 우리 외삼촌이랑 놀이공원에 놀러 갈까?”
  • 박준일을 고스란히 빼닮은 장현우의 얼굴. 다른 점이라면 차가운 준일의 눈매와 달리 현우의 눈은 지나치게 부드럽다.
  • 현우는 너무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세상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더 마음이 아프다.
  • 그녀는 놀이공원으로 놀러 가자는 엄마의 말에 폴짝이는 현우를 꼬옥 끌어안고 눈을 감으며 심호흡을 해본다.
  • 새벽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긴긴밤이다.
  • ******
  • 이튿날, 외출 준비를 하는 모자. 정아는 현우를 품위 넘치는 멋진 꼬마 신사로 변신시켰다. 그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깨가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 “이 세상에 우리 현우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애는 없을 거야!”
  • “나도 그렇게 생각해!”
  • 현우는 자신의 모습에 꽤 흡족한 듯 턱을 스윽 만지며 말했다.
  • “엄마가 너무 예뻐서 나 같은 아들을 낳은 거야.”
  • “못하는 말이 없어. 자, 외삼촌한테 가자.”
  • 정아의 오빠인 장정혁은 현재 개인 디자인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다. 요즘 큰 오더를 받아서 며칠째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정아는 현우를 안아 차에 앉히고 안전띠를 매어준 뒤 시동을 걸었다.
  • 감옥에서 나온 뒤 정혁은 정아를 자신의 곁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함께 부모님의 소식도 조사하면서 서로를 돕고 있다.
  • 한때 장정아는 모두가 우러러볼 정도로 훌륭하고 재주가 뛰어난 여자였다. 어렸을 적 직접 디자인한 원고로 해외의 최강 브랜드를 놀래켰고 기업에서 봄 시즌 디자인 선발에 요청할 정도였다. 그녀의 앞날은 반짝반짝 빛이 났었다.
  • 하지만 박준일이 그녀의 인생을 180도로 바꿔놓았다. 그토록 잘난 여자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5년의 감방생활은 그저 새로운 도약을 위한 시작점일 뿐. 아무도 그녀를 짓밟을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녀는 활동명을 바꿔 오빠와 함께 작업실을 운영하면서 꽤 넉넉한 삶을 살고 있다. 엄청 부유한 건 아니지만, 현우를 키우기에는 충분했다.
  • 정아는 본인이 학식도 없고 무능한 사람이 아닌 걸 감사히 여겼다. 그녀의 두뇌와 재주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 그녀의 5년 세월을 망쳤으니 더 이상의 간섭은 참지 않을 것이다!
  • 운전석에 앉은 정아가 라디오를 틀었다. 현우가 채널을 돌리자 마침 라디오에서 박준일에 관한 소식이 전해져왔다.
  • “소문에 의하면 박준일 회장님께서 이달 말에 연호그룹과의 합작건으로 감성에 오신다고 합니다. 두 기업 모두 5년 전에 상장되었고 현재 풍부한 자본과 재력으로...”
  • 현우가 갑자기 채널을 돌렸다.
  • 잠시 멈칫하던 정아가 물었다.
  • “...재미없어?”
  • “별로야.”
  • 곧바로 현우가 물었다.
  • “박준일이 내 아버지인 거지?”
  • 애가 지나치게 똑똑해요. 어떡하죠? 한 대 치면 둔해지려나? 도와줄 사람?
  • 정아가 웃으며 말했다.
  • “너 어떻게...”
  • “어떻게 알았느냐고?”
  • 현우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 “나 티비에서 그 사람 얼굴 봤었어. 엄마, 내 얼굴 봐봐.”
  • 다섯 살짜리 아이의 눈에도 뻔히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은 닮아있었다!
  • 정아는 현우를 보더니 얘기했다.
  • “박준일이 너를 데려가지 못하게 올해 당장 널 해외로 데려가 성형시켜줄게.”
  • 현우가 덤덤히 말했다.
  • “소용없어. 박 회장님이 날 데려가려면 분명 DNA까지 검사받으려 할 거야.”
  • 젠장! 아들놈이 너무 똑똑하잖아. 이러면 안 된다고!
  • 정아는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 “하하하하. 똑똑한 내 아들.”
  • 한참 지나서 현우가 조용히 말했다.
  • “엄마. 걱정하지 마. 나 그 사람 안 따라가.”
  • 자칫 브레이크를 밟을 정도로 놀란 정아가 현우를 돌아보았다. 핸들을 잡은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현우가 정아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 “난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 다른 사람은 전부 싫어. 그 사람이 아빠라고 해도 싫어.”
  • 정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이놈아. 그런 건 누가 가르쳐준 거야?”
  • 현우가 외삼촌을 들먹이며 말했다.
  • “외삼촌이 가르쳐준 거야. 이렇게 말하면 엄마가 기뻐할 거라고. 간식도 사줄 거라고.”
  • 당황한 정아가 클락션을 연신 내리쳤다.
  • 이런 젠장. 아까는 분명 감동이었다고!
  • 20분 뒤, 세 사람이 놀이공원 문앞에서 만났고 정혁이 현우의 손을 잡고 티켓을 사러 갔다. 정아는 크고 작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 이때, 검정 마이바흐 한 대가 등 뒤에서 지나갔다.
  • 박준일의 시선이 잠시 멈추더니 기사에게 명령했다.
  • “멈춰!”
  • 깜짝 놀란 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물었다.
  •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 준일이 머리를 돌려 다시 보았을 때는 아까 보았던 그림자가 넓은 도로에서 사라진 뒤였다.
  • '내가 잘못 본 건가…? 분명 그 여자와 같은 뒷모습이었는데.'
  • 이내 준일은 언짢은 듯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본다.
  • “가지.”
  • “예...”
  • 다시 시동을 거는 기사. 뒷좌석에 기대어 앉은 준일의 눈빛이 흐릿해져 간다.
  • '5년이나 흘렀어. 왜 아직도 그 여자의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