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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술 접대? 후회하지 마시길!

  • 장정아의 말에 자극받아 박준일은 움찔하며 되물었다.
  • “방금 한 말 다시 해봐!”
  • 정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애정이 듬뿍 담겼었던 그 눈에 원망만을 가득 채워 준일을 바라보았다.
  • “박준일. 당신은 날 무려 5년이나 교도소에서 살도록 만들었어. 나 이젠 알아. 내가 억울한지 안 억울한지는 절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당신이 단 한 번도 나에게 믿음을 주지 않았다는 거야.”
  • 차가운 말투로 똑바로 내뱉는 그녀의 말은 마치 준일이 더는 그 누구도 아닌 낯선 사람으로 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 정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비웃음 조로 물었다.
  • “설마 인제 와서 옛정이니 뭐니 그따위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
  • 준일은 분노가 가득 찬 눈으로 일어서서 갑자기 정아의 목을 졸라맸다.
  • 그녀의 차가운 눈에 비친 준일의 얼굴도 얼음장같이 굳어있었다. 그는 잔인하게 웃으며 물었다.
  •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줬어? 엉?”
  • “교도소에 다녀오더니 두려울게 없다 이거냐?”
  • 주위의 분위기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정아는 그의 손에 꽉 잡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 “박준일. 이거 당신이 직접 가르쳐준 거야!”
  • 순간 움찔하던 준일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 정아는 그에게 잡혀 연약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 “걱정 마. 내 아들만 돌려주면 평생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죽는 날이 와도 내 죽음이 당신 귀에 전해지지 않도록 할게!”
  • 준일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향해 울부짖었다.
  • “지금 뭐라고 했냐?”
  • 정아는 갑자기 격렬하게 반항하며 준일의 손을 뿌리쳤다. 똑바로 서지 않은 탓에 무릎이 바닥과 부딪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스르륵 꿇어앉았다. 그러나 정아는 아무 내색도 없이 휘청거리며 일어서서 말했다.
  • “준일 씨,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을 전부 짓밟았으면서 나한테서 뭘 더 바라? 난 이제 당신한테 줄 수 있는게 없어. 우리 장 씨 집안의 모든 걸 다 당신에게 바쳤잖아. 준일 씨,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나 좀 불쌍하게 여겨주면 안 돼?”
  • 나 좀 불쌍하게 여겨주면 안 돼?
  • 그녀의 말들이 칼날같이 날아와 그의 가슴에 꽂혔다. 5년 전 직접 그녀가 경찰차에 잡혀가는 광경을 지켜볼 때 느꼈던 그런 아픔이 또다시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준일은 움츠러들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데?”
  •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들에 휩싸였다. 5년을 도망쳤지만 결국 준일의 그림자조차 벗어나지 못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
  •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5년간 철창 속에서 그 대가를 지불했잖아. 이제 나 좀 놔주면 안 돼? 준일 씨.
  • 정아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목구멍이 씁쓸할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 옷깃을 젖히며 그녀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낮은 소리로 말했다.
  • “아들을 돌려받고 싶다고? 좋아. 저녁에 메이고에 가서 고객 만나고 와.”
  •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며 정아는 믿기 어려운 듯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 “박준일. 지금 나더러 술 접대하러 가라는 거야?”
  • 준일은 차가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 “왜? 애를 돌려받고 싶다며? 이 정도도 못해?”
  • 정아는 뒤로 물러서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 “역시 당신은 너무 지독해...”
  •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준일을 향해 웃어 보이는 그녀의 입가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 “좋아. 대단하신 박 회장님께서 요구한다면 들어줄 수밖에. 술 접대만 하면 내 아들을 돌려받을 수 있다니. 당연히 해야지!”
  • “다만...”
  • 정아는 준일에게 다가가 가늘어진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대고 웃었다.
  • “후회하지 마시길!”
  • 준일의 마음에 스윽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 그 감정의 끝을 잡고 싶었으나 놓쳐버렸다. 눈앞의 정아를 보고 있으니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 '우리의 재회는 왜...이토록 날이 서 있는 걸까?'
  • 5년 세월이...모든 애정을 지워버렸다. 남은 건 갈 곳 없는 원망뿐이다. 그 원망에 불붙으면 얼마나 놀라워질까?
  • 그녀가 차정안과 차정안의 아이를 해쳤으니 원망해야 할 사람은 분명 준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그녀가 왜 준일이 보여야 할 그런 눈빛으로 준일을 보는 걸까?
  • '장정아, 살인자 주제에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건데!'
  • 준일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 정아의 옷깃을 확 잡아당기며 말했다.
  • “당신 같은 여자는 내 손으로 직접 다른 남자의 침대에 보내버려도 난 눈조차 깜빡하지 않을 거야.”
  • “그러게 말이야.”
  • 정아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 “5년 전에 이미 당신한테 그런 원망을 들어서 그런가? 이제 아무렇지 않네.”
  • 말을 끝내고 그녀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쳐 아무 느낌도 없는 듯한 눈빛으로 준일을 바라보았다.
  • 망가져 버린 이 몸으로 애증을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까?
  • '박준일. 내 인생은 이미 망가졌어. 당신이 여기서 뭘 더 하든 상관없어 이제.'
  • 준일의 깊은 눈에는 그녀가 해독하기 어려운 정서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물론 그녀는 그의 눈빛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냥 늑대에게 먹잇감으로 보이는 거라 생각했고 이미 그의 눈에서 몇 번이고 죽었을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 그녀는 등을 곧게 펴고 파르르 떨면서도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옷차림에 붉은 눈시울을 한 이 여자를 보고 있다. 여자는 회장실에서 나와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기다란 그림자가 멀리 떠나가자 모두 의논하기 시작했다.
  • “뒷모습이 너무 익숙한데...”
  • “그러게, 어디선가 봤던 것 같아.”
  • “저런 꼴로 나오다니...혹시 회장님께서 새로 찾은 애인인가?”
  • “쯧쯧, 표정을 보면 회장님과 막 싸우고 나오는 것 같던데?”
  • “그럼 아마 맨날 달라붙는  삼류 연예인이겠지. 되지도 않는 봉황을 꿈꾸면서 말이야.”
  • “잡담들 그만해. 회장님께서 제일 사랑하는 건 차 여사님뿐이야.”
  • 정아는 사람들의 의논 속에서 도망치듯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는 순간 엘리베이터로 들어오는 강병준과 그의 품에 안긴 준일의 비서와 마주쳤다.
  • “......”
  • 정아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 “강 회장님, 안녕하세요.”
  • “벌써 가시게요?”
  • 병준은 비서에게서 손을 떼고 정아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 “얘기는 잘했어요?”
  • “제가 준일 씨에게 이야기나 해주러 온 것 같아요?”
  • 정아의 가벼운 말은 바람에 의해 흩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나서자 병준이 뒤에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 “뭐예요?”
  • 정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병준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비서를 혼자 남겨두고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병준은 환한 미소를 보이며 비서에게 말했다.
  • “예쁜 비서님, 다음에 다시 만나요. 바이~”
  • 인사를 끝내고 병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정아에게 말했다.
  • “나 마음이 바뀌었어요. 준일한테 볼일이 있었는데 정아 씨를 먼저 만나는게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