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눈을 뜨자 눈부신 빛에 의해 앞이 잘 안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시야가 점점 회복되었다.
정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문어구에 서있던 박준일은 정아의 얼굴을 본 순간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스쳤지만 결국 모두 그의 블랙홀 같은 동공에 빨려 들어갔다.
정아는 소리없이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옛사랑을 다시 만나는 장면을 수없이 상상했었다.
이 세상은 결코 크지 않기에 가슴 아프게 사랑했던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정아는 그 옛사랑이 자신한테 이렇게까지 독하게 대할 줄 몰랐다.
또 다른 잔인한 방식으로 그녀를 다시 절망에 빠트린 것이다.
준일은 말 없는 정아를 보자 자신과 말을 섞기 싫어한다는 걸 알아채고 문어구에 선 채 입을 열었다.
“깼어?”
정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일이 다가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고 아픔과 미움만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려왔다.
“왜? 화나서 말을 안 하는 거야?”
이어서 그는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장정아. 난 5년 전에 네 목을 졸랐어야 했어. 네 목숨을 살려둔 걸 고맙게 여겨.”
그 말을 듣자 정아는 웃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준일을 향해 웃었다.
“그래. 개처럼 살도록 살려줘서 고마워.”
“억울해?”
준일도 웃으면서 정아를 향해 비웃음 조로 물었다.
“억울할게 뭐가 있겠어?”
아파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녀의 눈은 독기를 품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 눈빛에 준일은 숨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정아는 준일을 향해 찬란하게 웃으며 말했다.
“박준일. 당신한테 많이 고마워! 5년 전에 내 인생을 망쳤으면서 5년 뒤에 내 목숨을 앗아가려 하다니! 내가 전생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이번 생에 당신한테 이렇게까지 당하는 걸까?!”
준일은 그녀의 말을 듣고 더 힘껏 그녀의 턱을 눌렀다.
“또 뭐라고 지껄이게? 차정안의 죽음은...”
“차정안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없다면?”
정아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이 세상에 더는 잃을 것도 없고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웃으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박준일, 하나만 물을게. 만약 차정안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없다면 당신이 나한테 빚진 걸 갚을 수나 있겠어?!”
만약 차정안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없다면 당신이 나한테 빚진 걸 갚을 수나 있겠어?!
준일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서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뭐라고?”
정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방금전의 반격으로 모든 힘을 다 쓴 것만 같았다.
“박준일. 나 이제 당신 원망 안 해. 당신이 너무 불쌍해서 미워할 가치도 없는 것 같아.”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는 사랑으로 가득 찼던 옛날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텅텅 비어있었다. 아마도 5년 전의 미움으로 전부 다 사라진 것 같다.
준일은 화가 나 오히려 웃어댔다. 그가 화낼 때의 얼굴은 더없이 멋지기만 하다. 이 남자는 이 도시의 모든 여자가 열광할만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5년 전, 정아도 모든 걸 마다하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결국, 자신만 해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심지어 동정마저도 주지 않았다.
정아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비꼬아 말했다.
“난 후회하지 않아. 당신이 밎지도 않아. 5년 감옥살이일 뿐이잖아. 이제 나왔으니 다시 살아가면 돼. 당신이 없어도 난 살 수 있어.”
“마음껏 조사해도 돼. 지난 일들을 다시 꺼내도 돼. 박준일, 똑똑히 들어.”
그녀가 고개를 드는 순간 눈빛은 예리하고 냉정했다. 준일은 갑자기 예전의 도도한 장 씨 집안 따님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았다. 가문이 망했어도 여전히 고결함과 자부심을 지켜왔던 그녀의 눈빛 말이다.
정아는 준일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잘 들어. 5년 전 내가 모든 사람 앞에서 차정안의 유골함을 망쳐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 그 여자가 우리 가문을 망쳐버렸거든. 그 여자 때문에 내가 죄를 뒤집어썼고 그 죽은 여자 때문에 온갖 구박과 굴욕을 당하며 죽기보다 힘든 감옥살이를 5년이나 했어! 그 여자가 죽어서 다행이야. 내가 그 여자의 유골함을 깨버린 건 절대 너무한게 아니야. 그 여자가 살아있다면 분명 내 손으로 죽였을 거야!”
“감히!”
준일은 버럭 화를 내면서 정아의 따귀를 갈기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정아! 감히!!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해!!”
그녀는 아픈 따귀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난 두렵지 않아! 죽은 사람이 나에게 이토록 불공평한 인생을 짊어지게 하였어. 박준일, 당신이 내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다면 내가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거야! 똑똑히 말하는데 내가 한 짓에 대해서 절대 후회하지 않아. 다만 나중에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차정안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자신을 원망하지 말길 바래!”
준일은 정아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현장에서 분명 장정아가 차정안을 밀어버렸었는데.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는데. 장정아가 한 짓이 맞는데!
“억울한 척 그만해. 말하려면 5년 전에 이미 했어야지!”
“나한테 말할 기회도 안 줬잖아.”
정아는 드디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당신은 항상 내 말을 안 믿었잖아. 내가 그래도 당신과 5년을 부부로 지내왔는데.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어. 당신은 나에게 눈길 한 번도 준 적 없어! 단 한 번도! 박준일. 날 사랑하지 않았으면서 왜 나랑 결혼한 거야? 나한테 미안하지 않아? 차정안한테 미안하지 않아?”
“난 오직 차정안만을 사랑해. 당신과 결혼한 건 당신이 내 침대에 기어 올라왔기 때문이야!”
준일도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당신이 내 침대에 기어 올라왔다고!”
“그래? 내가 당신한테 고작 그것밖에 안 돼? 진짜 다 잊었나 보네!”
정아는 온몸을 떨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웃었다.
“아무리 사랑하고 진심을 다 바쳐도 돌아오는 건 차가운 공기뿐이더라!”
박준일. 내가 당신한테 바쳤던 모든 것이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할게. 이번 생을 다시 살 기회가 온다면 절대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야!
정아는 철저히 후회하고 있었다.
박준일. 언젠가는 오늘을 후회하게 될 거야!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거 무섭지 않아. 당신이 오늘을 후회하게 될까 봐, 그게 더 무서워.”
정아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병실 문을 가리키며 준일에게 소리쳤다.
“꺼져!”
그녀의 눈에 원망이 가득한데. 원망하지 않는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하는 건 다 거짓이었다. 사실은 너무 미워서 용서하든 안 하든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미 그에 대한 원망이 뼛속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5년 전 교도소로 보내지던 그 날부터 그녀는 그를 향한 사랑과 기대를 모두 지워버렸다.
당신은 막다른 골목에서 나를 파멸로 몰아넣었고 끝없는 고통 속에 밀어 넣었어.
박준일, 난 구원 같은 거 필요 없어. 당신이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없도록 저주할 수만 있었으면 좋겠어!
정아는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간호사가 그 소리를 듣고 들어와 보더니 그녀를 힘껏 제압했다. 정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간호사를 넘어뜨렸다.
간호사가 꺄악 소리를 질렀고 복도에서 사람들이 뛰어들어오고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진정제, 진정제!”
“V02 병실 환자 이상 발생!”
“얼른! 의료진과 경호원 모두 출동시켜!”
“다치지 마! 꺼져! 전부 꺼져!”
누군가 다가오면 정아는 물건을 뿌려댔다. 컵이며 꽃병이나 의자며 모든 물건을 뿌리며 자신을 보호하는 행위를 보여줬다.
눈물을 흘리며 웃어대는 그녀였다.
“꺼져! 전부 꺼지라고!”
준일이 크게 소리쳤다.
“장정아! 너 미쳤어?!”
그 말이 날카로운 칼처럼 정아의 몸에 꽂혀 그녀의 오장육부를 들쑤시는 것 같았다. 가슴에서부터 극심한 통증이 머리카락을 포함한 그녀의 몸 곳곳에 퍼지며 그녀의 호흡을 거두어갔다.
이 여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갑자기 준일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해댔다.
“준일 씨, 제발 나 좀 놔줘. 제발... 부탁이야!”
“나 감방에서 5년이나 꿇었어. 이미 미칠 대로 미쳤다고. 날 봐봐, 두 눈으로 내 모습을 봐봐!”
준일은 갑자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픔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느껴지고 온몸이 떨려와 멍하니 눈앞의 여자를 보았다.
5년 전 도도하고 잘났던 장 씨 집안 아가씨가 5년 뒤 미치광이 전과자로 변해버렸다.
그는 온몸을 떨면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눈썹을 찌푸렸다.
“장정아... 너 왜 그래?”
그는 갑자기 그녀의 오른손에 있었던 흉터가 떠올랐다.
혼자 얼마나 괴로웠으면 소중한 자신의 오른손에 자해했을까?
정아는 디자이너라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손을 아꼈었다. 그건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제일 중요한 자신의 오른손을 해하다니 대체 얼마나 큰 파도를 겪었기에 현실의 무게를 버텨내지 못하고 멸망을 원했던 걸까?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정아가 왜 이렇게 변한 거지? 왜 이토록 나약하고 예민한 미치광이로 변한걸까... 대체 교도소에서 뭘 경험했던 거지? 5년 동안 누가 그녀를 이렇게 망쳐버린 걸까?
준일은 갑자기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그녀를 괴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이 자신일까 봐 두려웠다.
아니야. 정아가... 정아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렇게 했을 리가...
의료진들이 뛰쳐 들어와 정아를 제압했고 경호원들이 교통정리에 나섰고 누군가는 방금 엎어진 간호사를 일으켜 세웠다. 병실은 난리 통에 정신이 없었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머리를 비집고 들여다보려 했다.
준일은 사람들에게 밀려 한쪽에 서서 충격에 쌓인 채 의료진에게 제압당해 누워있는 정아를 바라보았다. 진정제가 들어있는 주삿바늘이 그녀의 팔뚝에 거칠게 들어갔고 그녀는 동공이 혼미해지더니 곧 다시 강제로 잠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