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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사랑이 악마가 되어버렸다

  • 조용한 병실,
  • 그녀가 눈을 뜨자 눈부신 빛에 의해 앞이 잘 안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시야가 점점 회복되었다.
  • 정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문어구에 서있던 박준일은 정아의 얼굴을 본 순간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스쳤지만 결국 모두 그의 블랙홀 같은 동공에 빨려 들어갔다.
  • 정아는 소리없이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그녀는 옛사랑을 다시 만나는 장면을 수없이 상상했었다.
  • 이 세상은 결코 크지 않기에 가슴 아프게 사랑했던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된다.
  • 하지만 정아는 그 옛사랑이 자신한테 이렇게까지 독하게 대할 줄 몰랐다.
  • 또 다른 잔인한 방식으로 그녀를 다시 절망에 빠트린 것이다.
  • 준일은 말 없는 정아를 보자 자신과 말을 섞기 싫어한다는 걸 알아채고 문어구에 선 채 입을 열었다.
  • “깼어?”
  • 정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준일이 다가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고 아픔과 미움만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려왔다.
  • “왜? 화나서 말을 안 하는 거야?”
  • 이어서 그는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장정아. 난 5년 전에 네 목을 졸랐어야 했어. 네 목숨을 살려둔 걸 고맙게 여겨.”
  • 그 말을 듣자 정아는 웃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준일을 향해 웃었다.
  • “그래. 개처럼 살도록 살려줘서 고마워.”
  • “억울해?”
  • 준일도 웃으면서 정아를 향해 비웃음 조로 물었다.
  • “억울할게 뭐가 있겠어?”
  • 아파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녀의 눈은 독기를 품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 그 눈빛에 준일은 숨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 정아는 준일을 향해 찬란하게 웃으며 말했다.
  • “박준일. 당신한테 많이 고마워! 5년 전에 내 인생을 망쳤으면서 5년 뒤에 내 목숨을 앗아가려 하다니! 내가 전생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이번 생에 당신한테 이렇게까지 당하는 걸까?!”
  • 준일은 그녀의 말을 듣고 더 힘껏 그녀의 턱을 눌렀다.
  • “또 뭐라고 지껄이게? 차정안의 죽음은...”
  • “차정안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없다면?”
  • 정아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이 세상에 더는 잃을 것도 없고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웃으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 “박준일, 하나만 물을게. 만약 차정안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없다면 당신이 나한테 빚진 걸 갚을 수나 있겠어?!”
  • 만약 차정안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없다면 당신이 나한테 빚진 걸 갚을 수나 있겠어?!
  • 준일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서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 “뭐라고?”
  • 정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방금전의 반격으로 모든 힘을 다 쓴 것만 같았다.
  • “박준일. 나 이제 당신 원망 안 해. 당신이 너무 불쌍해서 미워할 가치도 없는 것 같아.”
  •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는 사랑으로 가득 찼던 옛날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텅텅 비어있었다. 아마도 5년 전의 미움으로 전부 다 사라진 것 같다.
  • 준일은 화가 나 오히려 웃어댔다. 그가 화낼 때의 얼굴은 더없이 멋지기만 하다. 이 남자는 이 도시의 모든 여자가 열광할만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5년 전, 정아도 모든 걸 마다하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결국, 자신만 해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심지어 동정마저도 주지 않았다.
  • 정아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비꼬아 말했다.
  • “난 후회하지 않아. 당신이 밎지도 않아. 5년 감옥살이일 뿐이잖아. 이제 나왔으니 다시 살아가면 돼. 당신이 없어도 난 살 수 있어.”
  • “마음껏 조사해도 돼. 지난 일들을 다시 꺼내도 돼. 박준일, 똑똑히 들어.”
  • 그녀가 고개를 드는 순간 눈빛은 예리하고 냉정했다. 준일은 갑자기 예전의 도도한 장 씨 집안 따님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았다. 가문이 망했어도 여전히 고결함과 자부심을 지켜왔던 그녀의 눈빛 말이다.
  • 정아는 준일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 “잘 들어. 5년 전 내가 모든 사람 앞에서 차정안의 유골함을 망쳐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 그 여자가 우리 가문을 망쳐버렸거든. 그 여자 때문에 내가 죄를 뒤집어썼고 그 죽은 여자 때문에 온갖 구박과 굴욕을 당하며 죽기보다 힘든 감옥살이를 5년이나 했어! 그 여자가 죽어서 다행이야. 내가 그 여자의 유골함을 깨버린 건 절대 너무한게 아니야. 그 여자가 살아있다면 분명 내 손으로 죽였을 거야!”
  • “감히!”
  • 준일은 버럭 화를 내면서 정아의 따귀를 갈기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장정아! 감히!!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해!!”
  • 그녀는 아픈 따귀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그래! 난 두렵지 않아! 죽은 사람이 나에게 이토록 불공평한 인생을 짊어지게 하였어. 박준일, 당신이 내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다면 내가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거야! 똑똑히 말하는데 내가 한 짓에 대해서 절대 후회하지 않아. 다만 나중에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차정안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자신을 원망하지 말길 바래!”
  • 준일은 정아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 그때 현장에서 분명 장정아가 차정안을 밀어버렸었는데.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는데. 장정아가 한 짓이 맞는데!
  • “억울한 척 그만해. 말하려면 5년 전에 이미 했어야지!”
  • “나한테 말할 기회도 안 줬잖아.”
  • 정아는 드디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그래, 당신은 항상 내 말을 안 믿었잖아. 내가 그래도 당신과 5년을 부부로 지내왔는데.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어. 당신은 나에게 눈길 한 번도 준 적 없어! 단 한 번도! 박준일. 날 사랑하지 않았으면서 왜 나랑 결혼한 거야? 나한테 미안하지 않아? 차정안한테 미안하지 않아?”
  • “난 오직 차정안만을 사랑해. 당신과 결혼한 건 당신이 내 침대에 기어 올라왔기 때문이야!”
  • 준일도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 “당신이 내 침대에 기어 올라왔다고!”
  • “그래? 내가 당신한테 고작 그것밖에 안 돼? 진짜 다 잊었나 보네!”
  • 정아는 온몸을 떨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웃었다.
  • “아무리 사랑하고 진심을 다 바쳐도 돌아오는 건 차가운 공기뿐이더라!”
  • 박준일. 내가 당신한테 바쳤던 모든 것이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할게. 이번 생을 다시 살 기회가 온다면 절대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야!
  • 정아는 철저히 후회하고 있었다.
  • 박준일. 언젠가는 오늘을 후회하게 될 거야!
  •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거 무섭지 않아. 당신이 오늘을 후회하게 될까 봐, 그게 더 무서워.”
  • 정아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병실 문을 가리키며 준일에게 소리쳤다.
  • “꺼져!”
  • 그녀의 눈에 원망이 가득한데. 원망하지 않는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하는 건 다 거짓이었다. 사실은 너무 미워서 용서하든 안 하든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미 그에 대한 원망이 뼛속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5년 전 교도소로 보내지던 그 날부터 그녀는 그를 향한 사랑과 기대를 모두 지워버렸다.
  • 당신은 막다른 골목에서 나를 파멸로 몰아넣었고 끝없는 고통 속에 밀어 넣었어.
  • 박준일, 난 구원 같은 거 필요 없어. 당신이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없도록 저주할 수만 있었으면 좋겠어!
  • 정아는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간호사가 그 소리를 듣고 들어와 보더니 그녀를 힘껏 제압했다. 정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간호사를 넘어뜨렸다.
  • 간호사가 꺄악 소리를 질렀고 복도에서 사람들이 뛰어들어오고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 “진정제, 진정제!”
  • “V02 병실 환자 이상 발생!”
  • “얼른! 의료진과 경호원 모두 출동시켜!”
  • “다치지 마! 꺼져! 전부 꺼져!”
  • 누군가 다가오면 정아는 물건을 뿌려댔다. 컵이며 꽃병이나 의자며 모든 물건을 뿌리며 자신을 보호하는 행위를 보여줬다.
  • 눈물을 흘리며 웃어대는 그녀였다.
  • “꺼져! 전부 꺼지라고!”
  • 준일이 크게 소리쳤다.
  • “장정아! 너 미쳤어?!”
  • 그 말이 날카로운 칼처럼 정아의 몸에 꽂혀 그녀의 오장육부를 들쑤시는 것 같았다. 가슴에서부터 극심한 통증이 머리카락을 포함한 그녀의 몸 곳곳에 퍼지며 그녀의 호흡을 거두어갔다.
  • 이 여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갑자기 준일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해댔다.
  • “준일 씨, 제발 나 좀 놔줘. 제발... 부탁이야!”
  • “나 감방에서 5년이나 꿇었어. 이미 미칠 대로 미쳤다고. 날 봐봐, 두 눈으로 내 모습을 봐봐!”
  • 준일은 갑자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픔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느껴지고 온몸이 떨려와 멍하니 눈앞의 여자를 보았다.
  • 5년 전 도도하고 잘났던 장 씨 집안 아가씨가 5년 뒤 미치광이 전과자로 변해버렸다.
  • 그는 온몸을 떨면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눈썹을 찌푸렸다.
  • “장정아... 너 왜 그래?”
  • 그는 갑자기 그녀의 오른손에 있었던 흉터가 떠올랐다.
  • 혼자 얼마나 괴로웠으면 소중한 자신의 오른손에 자해했을까?
  • 정아는 디자이너라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손을 아꼈었다. 그건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제일 중요한 자신의 오른손을 해하다니 대체 얼마나 큰 파도를 겪었기에 현실의 무게를 버텨내지 못하고 멸망을 원했던 걸까?
  •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 정아가 왜 이렇게 변한 거지? 왜 이토록 나약하고 예민한 미치광이로 변한걸까... 대체 교도소에서 뭘 경험했던 거지? 5년 동안 누가 그녀를 이렇게 망쳐버린 걸까?
  • 준일은 갑자기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그녀를 괴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이 자신일까 봐 두려웠다.
  • 아니야. 정아가... 정아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렇게 했을 리가...
  • 의료진들이 뛰쳐 들어와 정아를 제압했고 경호원들이 교통정리에 나섰고 누군가는 방금 엎어진 간호사를 일으켜 세웠다. 병실은 난리 통에 정신이 없었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머리를 비집고 들여다보려 했다.
  • 준일은 사람들에게 밀려 한쪽에 서서 충격에 쌓인 채 의료진에게 제압당해 누워있는 정아를 바라보았다. 진정제가 들어있는 주삿바늘이 그녀의 팔뚝에 거칠게 들어갔고 그녀는 동공이 혼미해지더니 곧 다시 강제로 잠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