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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옛날의 해정그룹이 아니다

  • 이튿날 잠에서 깬 정아는 해정그룹으로 갈 채비를 했다. 옅은 화장을 하고 얇은 외투에 굽이 낮은 구두를 걸쳐 신고 문을 나서자 정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 “현우가 진짜 그 사람 손에 있는 거야? 정아 너 혼자 괜찮겠어?”
  • 바람이 불어와 정아의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정아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대답했다.
  • “오빠, 나 괜찮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할게. 출장 조심해서 다녀와.”
  • 정혁은 한참을 당부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정아는 고개를 들어 도로를 한참 바라보다가 뭔가 결심을 단단히 한 것 같은 눈빛을 하고 또각또각 걸어가 택시를 타고 해정그룹으로 향했다.
  • 목적지에 도착하여 정아는 돈을 내고 차에서 내렸다. 한창 출근 시간이라 회사 문앞에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정아가 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 늘씬한 몸매에 가볍게 걸친 코트 옷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아침 바람에 하늘거리고 햇빛이 그녀의 몸매에 금칠을 한 것만 같아 보였다.
  • 큰 문을 들어서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정제된 강철처럼 차가운 눈매가 돋보인다. 얇은 입술을 오므리는 그녀는 긴장감과 함께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안내데스크로 다가갔다.
  • 안내원은 그녀의 분위기에 눌려 한참을 멍 때리다 물었다.
  • “혹시...차, 찾으시는 분 계십니까?”
  • “박준일이요.”
  • 해정그룹의 박 회장님 성함을 이렇게 입 밖에 내다니.
  • 안내원은 또 잠시 멍을 때렸다.
  • “하지만...여사님, 저희 회장님을 뵈려면 예약을 하고 오셔야...”
  • 그 대화를 듣던 도중 누군가 뒤에서 속닥거렸다.
  • “박 회장님을 찾으러 왔다잖아!”
  • “쉿, 조용히 해. 걸어오는 모습 못 봤어? 분명 빽이 있는 거야!”
  • “내 말이! 회장님의 내연녀일지도 몰라.”
  • “회장님의 내연녀라고? 차 여사님을 사랑하는 거 아니였어?”
  • 차 여사라... 정아는 칼날에 베인 듯 가슴이 아파와 사색이 되더니 금세 찬란하게 웃으며 말했다.
  • “제 이름을 말하면 박준일이 금방 허락할 거예요.”
  •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기에 이러는 걸까?
  • 안내원이 이름을 물으려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라?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 정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목소리의 주인은 그날 봤었던 마세라티 차주였다. 눈웃음을 지으며 걸어오는 이 남자는 눈매가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안내데스크에 마주 서 있는 정아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 “아, 준일이를 찾으러 오셨군요?”
  • '바로 옆도시에서 온 강 회장님도 이 여사님을 알아보다니. 얼른 올려보내야겠다. 대체 뭐 하는 분이기에 강 회장님과도 아는 거지?'
  •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정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강병준에게 인사를 했다.
  • “고마워요.”
  • “고마워하실 필요까지는 없고요.”
  • 병준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 “저도 준일이한테 볼일이 있어서 오긴 했지만 먼저 들어가 보세요. 게다가 이 회사에 본래 장 씨 집안의 지분도 있으니 본인의 회사에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죠.”
  • “제 과거를 낱낱이 조사하셨네요.”
  • 정아는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병준을 비꼬는 것인지 스스로를 비꼬는 것인지 모를 말투로 말이다.
  • “아쉽게도 제가 차지하지는 못했네요.”
  • 병준은 정아를 흘긋 보며 물었다.
  • “5년 전 교도소 말인데요...진짜 준일이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 정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었다.
  • 심연 속에서 희망 한점 보이지 않을 것 같이 아픔만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 병준은 더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20층에 도착하여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으로부터 함께 걸어 나오며 복도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 마침 사무실에 앉아 병준을 기다리던 준일은 문이 열리는 순간 그 뒤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걸 발견하곤 장난조로 말했다.
  • “야 임마, 사업 얘기 하는 데까지 여자를 데려와?”
  • 그러나 병준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 금방 낯빛이 바뀌었다.
  • “여긴 어떻게 왔어?”
  • “장 씨 집안의 피 같은 돈이 여기 해정그룹에 있는데 내가 오면 안 되는 거야?”
  • 떨리는 어깨를 꾹꾹 참으며 정아는 붉어진 눈으로 준일을 보았다.
  • 사무실 중앙에 앉아있는 이 남자는 준수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자랑한다. 연예계에 나가도 톱스타급으로 잘생긴 얼굴이니 대중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 이 큰 도시에서 수많은 여자가 그에게 기어오르려 하니 정아는 본인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한때 그 사람의 아내였던 정아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가 실은 제일 슬펐던 시절이었다는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자신의 소유가 아닌 남자를 옆에 잡아두는 일이 그렇게 아픈 것임을 그때는 몰랐었다.
  • 둘의 분위기가 이상하자 병준은 웃으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 “하하...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나 본 데...그럼 난 먼저 가볼...”
  • 그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무실을 탈출하듯 떠나며 사무실 밖에 앉아있는 비서에게 눈을 윙크하며 말했다.
  • “우리 모닝커피나 한잔하러 갈까요? 우리 박 회장이 한동안은 비서님을 안 찾을 것 같은데~”
  • 비서는 병준에게 안겨 졸졸졸 따라갔다. 회장 사무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 한편 사무실 내, 튼튼한 목재로 만들어진 문은 이 공간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켰다. 귀족풍으로 꾸며진 사무실에는 순식간에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 그곳에 한참을 서 있던 정아는 고개를 들어 준일을 보며 물었다.
  • “내가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나 봐?”
  • 준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 “난 당신이 오지 않을 줄 알았어.”
  • “그래, 나도 내가 안 올 줄 알았어.”
  • 그 말을 하며 웃는 정아의 미소가 너무 예쁘게 피었다.
  • “난 평생 멀리 도망가서 두 번 다시 당신을 만나지 않으려 했어. 하지만 결국은 직접 이곳까지 찾아왔네. 역시 난 당신만큼 독하지 못해서 말이야.”
  • 그 말을 들은 준일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와 비웃음 조로 말했다.
  • “그건 장정아 당신이 지랄 맞아 그런 거야.”
  • 당신이 지랄 맞아 그런 거야.
  • 정아는 가슴이 저려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래, 내가 지랄 맞은 거지.
  •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준일에게 말했다.
  • “내 아들을 돌려받으러 왔어.”
  • “내 아들이기도 해.”
  • “아니. 내가 혼자 낳은 아들이야!”
  • 정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 “나 혼자 5년을 키웠어! 교도소에서부터 지금까지 말이야!”
  • 5년이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 철창 속에서 5년간 죽지 않고 버티게 해준 건 마지막 남은 귀여운 아들이었다.
  • 현우는 그녀의 목숨이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 준일이 빼앗아가려 한다면 그녀도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 정아의 그런 모습을 보자 준일은 더 즐겁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한가지 있지. 현우의 몸에는 내 피가 흐른다는 사실 말이야!”
  • “그래...?”
  • 정아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 “인제 와서 당신 아들이라고? 이보세요, 박 회장님! 미치신 거 아니에요? 당신이 날 죽도록 미워했던 건 잊었나 봐?! 오직 차정안의 아이만 원했잖아 당신! 왜? 살인범이 낳은 아들이라도 뺏어가게?!”
  • 살인범이 낳은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