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2화 변화무쌍한 세월과 달라진 사람들

  • 현우의 말을 듣자 준일은 바로 웃었다!
  • “무슨 뜻이지?”
  • 준일은 현우를 쏘아보며 말했다.
  • “넌 원래 내 아들이야. 내가 DNA 검사까지 해줘? 내가 내 아들을 키우겠다는데 뭔 수속을 밟아?”
  • 현우는 준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완전히 카피해놓은 것만 같았다. 다만 준일의 이목구비가 더 또렷하고 현우는 정아를 닮아 분위기가 더 부드러웠다.
  • 그는 조용히 말했다.
  • “박 회장님은 저희 엄마랑 5년 전에 이혼한 것으로 아는데요. 그리고 저는 두 분이 이혼한 뒤에 태어났으니 제 양육권은 엄마 손에 있는게 맞죠. 저를 키우고 싶으시다면 엄마와 양육권에 관해 의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준일은 못 믿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 “뭐라고?”
  • '다섯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
  • 현우는 준일의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에 아무렇지 않은 듯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 “박 회장님, 제가 회장님 아들이 아니었다면... 저희 엄마가 다른 사람과 낳은 아이라면 저한테 지금처럼 행동할 건가요?”
  • 그 말을 들은 준일은 갑자기 이유없이 짜증이 났다.
  • 이 아이가 그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을까? 그러나...장정아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 걸 상상하려니 참을 수 없는 화가 올라왔다...
  • 그가 아는 정아는 항상 그의 주변만 맴도는 여자였고 평생 그의 아이만 낳을 수 있는 여자였다. 정아에게 가까이하는 다른 남자는 전부 사라져야만 했다.
  • 현우는 준일의 표정을 보더니 갑자기 웃어댔다. 챙챙한 목소리로 웃던 아이는 콕콕 찌르듯 비꼬며 말했다.
  • “회장님은 저희가 5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영원히 모를 거예요. 그렇기에 저도 회장님과 가까워질 수 없어요.”
  • 현우가 준일을 올려다보는 순간 준일은 칼을 맞은 것처럼 아파졌다.
  •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아프게 만들 수도 있었다.
  • “회장님, 저는 엄마가 이 세상을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에요. 제가 없으면 엄마는 죽을 수 있어요.”
  • 그렇다. 현우가 없는 정아는 살아갈 희망이 없다.
  • ******
  • 정아는 저녁 여덟 시쯤 차림새를 마무리하고 준일이 준 주소를 찾아 메이고 문앞에 도착했다.
  • 종업원이 환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서오세요...”
  • 정아는 헤어도 꾸미고 화장도 하고 향수도 뿌렸다. 정장 스커트에 낮은 힐을 신은 그녀는 우아한 분위기를 뿜어댔다. 반쪽 머리카락을 뒤로 젖혀 가녀린 목선과 사뭇 잘 어울리는 목걸이가 눈에 띈다. 이건 장정혁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목걸이다.
  • 정아가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재벌 집 따님과도 같은 도도한 분위기에 다들 다가가지 못했다. 시선을 살짝 아래로 향한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과 빨간 입술이며 수려한 콧날을 자랑하는 그녀의 또렷한 이목구비는 모두의 눈에 낯설지만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이 도시에 수많은 명문 귀족 자녀 중 한 명이겠거니 하면서 낯익은 얼굴을 보며 어디서 보았던 얼굴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얼굴은 한번 보면 다시 잊기 어려울 정도였다.
  • 그녀가 장 씨 집안의 따님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5년의 감옥살이에 반 잘린 새끼손가락과 함께 망가진 그녀의 인생, 고결함과 자존감 뒤에 다시 태어나려는 그녀의 욕망을 몰랐다.
  • 준일은 메이고 주차장에 주차하고 올라오면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 술에 취한 사람이 머리를 까딱거리며 걸어가면서 말했다.
  • “젠장, 문앞에 서 있는 그 여자 봤어? 아주 제대로던데? 얼굴이며 분위기며 아주 그냥!”
  • 곁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 “꿈 깨, 그런 여자 곁에 다가갈 주제도 안되면서. 운전기사로 들어갈 수 있으면 장땡이지.”
  • “크큭. 운전기사 좋지! 난 공짜로 해줄 수 있어!”
  • 준일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 정아가 서 있었다. 차가운 분위기에 수려한 외모가 그에게 냉정함과 거리감을 주었다. 그를 보는 시선에 긴장함도 스쳐 지나갔다.
  • 멈춰 서있는 준일은 창의적 디자인의 흰 셔츠와 깔끔한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곧은 다리에 발렌시아가 구두를 신고 한 손에는 차 키, 한 손에는 외투를 들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에 왼쪽 귀에 걸려있는 블랙다이아 피어싱은 그의 눈동자와 같이 빛났다. 문어구에 서 있는 그의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뒤돌아보았다.
  • 모든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그의 분위기는 타고난 것이다. 요염하니 잘생긴 외모에 듬직한 분위기는 모든 여자가 미친 듯이 달려가 안기고 싶을 정도다.
  • 준일은 이곳 여성들이 하나같이 꿈꾸는 남자다. 5년 전 준일이 정아와 결혼했던 날 이곳 여성들은 하나같이 실연을 당했다.
  •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5년 뒤 정아가 준일에게 떠밀려 교도소에 들어가자 많은 사람이 뒤에서 휘파람을 불며 좋아했다.
  • 준일은 집안과 재력, 권위 등 모든 방면에서 완벽했다. 하지만 유독 사랑 만큼은 정아에게 단 한 번도 나눠주지 않았다.
  • 정아는 자신이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이 남자가 자신이 끝까지 곁을 지키면 언젠가는 감동할 거라 생각했다. 5년간 바보같이 살아왔고 5년간 죗값을 치르며 살아왔다. 총 10년이라는 세월을 통해 그녀는 드디어 준일과 함께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걸 깨달은 대가는 무려 지위와 명예를 잃고 집안이 망하는 것이었다.
  • 준일과 정아는 문어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그 낯선 얼굴들 사이로 지난 세월에 돌아간 것만 같았다.
  • 그는 그녀의 사랑이었고 그녀는 그의 어린 소녀였다.
  • 시간이 흘러 세월은 변했고 두사람 사이도 변해버렸다. 대체...누가 이렇게 만든 걸까?
  • 정아는 쓸데없는 생각을 전부 집어치우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준일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몸에서 뿜어대는 오로라는 주위 사람들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 완벽한 얼굴이 자신과 가까워졌을 때 정아는 더는 설렘이 느껴지지 않아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 '박준일. 내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사랑한 15년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해?'
  • 그녀는 준일을 스윽 보고는 눈빛을 바꾸었고 준일은 덤덤히 물었다.
  • “얼마나 기다렸어?”
  • “십분 정도.”
  • 빙긋 미소 짓는 정아의 우아한 모습이 준일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 예전의 그녀는 항상 부드럽고 대범한 모습이었다. 항상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는데 이젠 블랙홀같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자존감이 날개가 꺾여 블랙홀에 삼켜진 것만 같았다.
  • 준일은 마음이 아파졌지만 참으며 말했다.
  • “따라와.”
  • 말이 끝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감히 탑승하지를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