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잠에서 깬 정아는 해정그룹으로 갈 채비를 했다. 옅은 화장을 하고 얇은 외투에 굽이 낮은 구두를 걸쳐 신고 문을 나서자 정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현우가 진짜 그 사람 손에 있는 거야? 정아 너 혼자 괜찮겠어?”
바람이 불어와 정아의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정아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대답했다.
“오빠, 나 괜찮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할게. 출장 조심해서 다녀와.”
정혁은 한참을 당부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정아는 고개를 들어 도로를 한참 바라보다가 뭔가 결심을 단단히 한 것 같은 눈빛을 하고 또각또각 걸어가 택시를 타고 해정그룹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정아는 돈을 내고 차에서 내렸다. 한창 출근 시간이라 회사 문앞에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정아가 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늘씬한 몸매에 가볍게 걸친 코트 옷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아침 바람에 하늘거리고 햇빛이 그녀의 몸매에 금칠을 한 것만 같아 보였다.
큰 문을 들어서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정제된 강철처럼 차가운 눈매가 돋보인다. 얇은 입술을 오므리는 그녀는 긴장감과 함께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안내데스크로 다가갔다.
안내원은 그녀의 분위기에 눌려 한참을 멍 때리다 물었다.
“혹시...차, 찾으시는 분 계십니까?”
“박준일이요.”
해정그룹의 박 회장님 성함을 이렇게 입 밖에 내다니.
안내원은 또 잠시 멍을 때렸다.
“하지만...여사님, 저희 회장님을 뵈려면 예약을 하고 오셔야...”
그 대화를 듣던 도중 누군가 뒤에서 속닥거렸다.
“박 회장님을 찾으러 왔다잖아!”
“쉿, 조용히 해. 걸어오는 모습 못 봤어? 분명 빽이 있는 거야!”
“내 말이! 회장님의 내연녀일지도 몰라.”
“회장님의 내연녀라고? 차 여사님을 사랑하는 거 아니였어?”
차 여사라... 정아는 칼날에 베인 듯 가슴이 아파와 사색이 되더니 금세 찬란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을 말하면 박준일이 금방 허락할 거예요.”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기에 이러는 걸까?
안내원이 이름을 물으려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정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목소리의 주인은 그날 봤었던 마세라티 차주였다. 눈웃음을 지으며 걸어오는 이 남자는 눈매가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안내데스크에 마주 서 있는 정아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 준일이를 찾으러 오셨군요?”
'바로 옆도시에서 온 강 회장님도 이 여사님을 알아보다니. 얼른 올려보내야겠다. 대체 뭐 하는 분이기에 강 회장님과도 아는 거지?'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강병준에게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고마워하실 필요까지는 없고요.”
병준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저도 준일이한테 볼일이 있어서 오긴 했지만 먼저 들어가 보세요. 게다가 이 회사에 본래 장 씨 집안의 지분도 있으니 본인의 회사에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죠.”
“제 과거를 낱낱이 조사하셨네요.”
정아는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병준을 비꼬는 것인지 스스로를 비꼬는 것인지 모를 말투로 말이다.
“아쉽게도 제가 차지하지는 못했네요.”
병준은 정아를 흘긋 보며 물었다.
“5년 전 교도소 말인데요...진짜 준일이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정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었다.
심연 속에서 희망 한점 보이지 않을 것 같이 아픔만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병준은 더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20층에 도착하여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으로부터 함께 걸어 나오며 복도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마침 사무실에 앉아 병준을 기다리던 준일은 문이 열리는 순간 그 뒤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걸 발견하곤 장난조로 말했다.
“야 임마, 사업 얘기 하는 데까지 여자를 데려와?”
그러나 병준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 금방 낯빛이 바뀌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장 씨 집안의 피 같은 돈이 여기 해정그룹에 있는데 내가 오면 안 되는 거야?”
떨리는 어깨를 꾹꾹 참으며 정아는 붉어진 눈으로 준일을 보았다.
사무실 중앙에 앉아있는 이 남자는 준수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자랑한다. 연예계에 나가도 톱스타급으로 잘생긴 얼굴이니 대중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큰 도시에서 수많은 여자가 그에게 기어오르려 하니 정아는 본인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한때 그 사람의 아내였던 정아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가 실은 제일 슬펐던 시절이었다는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자신의 소유가 아닌 남자를 옆에 잡아두는 일이 그렇게 아픈 것임을 그때는 몰랐었다.
둘의 분위기가 이상하자 병준은 웃으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하...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나 본 데...그럼 난 먼저 가볼...”
그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무실을 탈출하듯 떠나며 사무실 밖에 앉아있는 비서에게 눈을 윙크하며 말했다.
“우리 모닝커피나 한잔하러 갈까요? 우리 박 회장이 한동안은 비서님을 안 찾을 것 같은데~”
비서는 병준에게 안겨 졸졸졸 따라갔다. 회장 사무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한편 사무실 내, 튼튼한 목재로 만들어진 문은 이 공간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켰다. 귀족풍으로 꾸며진 사무실에는 순식간에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그곳에 한참을 서 있던 정아는 고개를 들어 준일을 보며 물었다.
“내가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나 봐?”
준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난 당신이 오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 나도 내가 안 올 줄 알았어.”
그 말을 하며 웃는 정아의 미소가 너무 예쁘게 피었다.
“난 평생 멀리 도망가서 두 번 다시 당신을 만나지 않으려 했어. 하지만 결국은 직접 이곳까지 찾아왔네. 역시 난 당신만큼 독하지 못해서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준일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와 비웃음 조로 말했다.
“그건 장정아 당신이 지랄 맞아 그런 거야.”
당신이 지랄 맞아 그런 거야.
정아는 가슴이 저려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지랄 맞은 거지.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준일에게 말했다.
“내 아들을 돌려받으러 왔어.”
“내 아들이기도 해.”
“아니. 내가 혼자 낳은 아들이야!”
정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나 혼자 5년을 키웠어! 교도소에서부터 지금까지 말이야!”
5년이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 철창 속에서 5년간 죽지 않고 버티게 해준 건 마지막 남은 귀여운 아들이었다.
현우는 그녀의 목숨이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준일이 빼앗아가려 한다면 그녀도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정아의 그런 모습을 보자 준일은 더 즐겁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한가지 있지. 현우의 몸에는 내 피가 흐른다는 사실 말이야!”
“그래...?”
정아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인제 와서 당신 아들이라고? 이보세요, 박 회장님! 미치신 거 아니에요? 당신이 날 죽도록 미워했던 건 잊었나 봐?! 오직 차정안의 아이만 원했잖아 당신! 왜? 살인범이 낳은 아들이라도 뺏어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