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서준표는 한율이 자신을 바람 맞힐까 봐 너무 두려웠다. 한율도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준표는 살짝 뻘쭘한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젊은이, 어서 들어가지...”
서준표는 자세를 한껏 낮추었고 그 모습에 호텔의 사람들은 저마다 한율의 신분을 추측했다.
서유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한율과 고개를 푹 숙인 자신의 아버지를 번갈아 보더니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렸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우리 아빠가 문 앞에서 너를 반 시간이나 기다렸어. 게다가 지금 우리 아빠 얼굴을 좀 봐.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잖아. 너 정말 병을 치료할 줄 알기나 해?”
서유진은 애초부터 한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엔 아빠의 병을 억제해주어 그녀도 무척 놀라면서 속으로 한율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고 바로 이 때문에 서유진은 한율이 사기꾼일 거라 생각됐다. 괜히 아빠의 돈을 사기 치려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유진아, 그만해. 얼른 사과하지 않고...”
서준표는 차가운 표정으로 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제가 왜 사과해요? 이 사람 꼴을 좀 봐요. 어딜 봐서 의사예요? 틀림없이 사기꾼일 거라고요...”
서유진은 차가운 시선으로 한율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왠지 아빠가 병원에 가지 않는 이유가 한율 때문인 것 같았다.
서유진이 도통 말을 듣지 않자 서준표는 화가 나서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더니 호흡까지 가빠졌다.
“쿨럭쿨럭...”
서준표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못 한 채 심한 기침을 해댔다!
“아빠...”
서유진은 재빨리 다가가 서준표를 부축했다.
이때 서준표가 시커먼 피를 한 모금 내뱉었고 그 모습에 서유진은 화들짝 놀라서 표정이 굳었다.
검은 피를 토하는 서준표의 모습에 한율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서준표의 병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한율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서준표는 이토록 심하게 다쳤으면서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버틴 것일까?
“얼른 아버님을 부축하고 방에 들어가...”
한율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서유진에게 말했다.
하지만 서유진은 멍하니 서 있을 뿐 꼼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한율을 믿지 않았다.
움직일 기미가 없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율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네 아빠가 죽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
서유진은 그의 으름장에 그제야 서준표를 부축하고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서자 한율은 서둘러 서준표의 맥을 짚어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이제 막 서준표를 치료해주려 할 때, 방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안경을 쓰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닥터 훈, 얼른 오세요. 와서 아빠를 좀 보세요. 방금 피를 토하셨어요!”
서유진은 닥터 훈을 보더니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말했다.
“네? 제가 바로 볼게요...”
닥터 훈은 화들짝 놀라더니 황급히 약상자를 열었다.
“저리 비켜...”
서유진은 한율을 한쪽으로 밀쳐낸 뒤 아빠를 부축하며 닥터 훈에게 말했다.
“아빠는 그럼 닥터 훈에게 믿고 맡길게요. 제발 구해주세요!”
그 시각 서준표는 거의 정신을 잃었고 호흡도 아주 미약했다.
“유진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최선을 다할게요!”
말을 마친 닥터 훈은 서준표의 맥을 짚어보기 시작했다.
“유진씨, 서 회장님은 폐부를 다치셨고 간헐적 발작이 주된 원인입니다. 이건 오랜 시간 축적된 만성병이니 반드시 천천히 치료해야 합니다. 다만 누군가 강제로 서 회장님의 면역력을 건드려 비록 일시적 효과를 보는 것 같았지만 사실상 병세만 가중됐습니다. 회장님은 지금 위급한 상태입니다. 실례지만 제가 오기 전에 혹시 누가 회장님의 병을 치료하셨나요?”
닥터 훈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을 들은 서유진은 버럭 화를 내며 옆에 있는 한율을 째려보았다. 조금 전 한율이 그녀 아버지의 병을 치료해주었고 확실히 닥터 훈의 말처럼 아버지의 상태가 눈에 띄게 나아졌다. 다만 이 때문에 아버지를 해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야 이 사기꾼아, 우리 아빠가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 절대 너를 가만 안 둬!”
서유진은 한율에게 소리치며 분노를 터트렸다. 그녀는 서준표를 부축하느라 한율을 때리지도 못했다.
“대체 뭣 때문에 나를 사기꾼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뭘 속였는데? 내가 아니었더라면 네 아버지는 진작에 시체가 됐을 거야. 진짜 어이가 없어!”
한율은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서유진에 대한 증오만 늘어났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말끝마다 사기꾼을 운운하며 전혀 친절하지 않잖아!’
“너...”
서유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지금은 한율과 싸울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일단 아빠를 구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닥터 훈, 제발 부탁드려요. 무슨 방법이라도 좀 생각해봐요. 네?”
서유진은 조급한 마음에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닥터 훈은 약상자를 열고 안에서 검은색 알약을 꺼내더니 서준표의 입에 넣어드렸고, 이어서 침을 꺼내 그의 혈 자리에 여러 군데 놓아주었다.
“이렇게 하는 건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아예 해치는 거야...”
한율은 침을 놓는 닥터 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닥터 훈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무슨 뜻이죠? 지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 설마 당신도 침을 놓을 줄 알아요?”
침술은 엄연한 한의학이라 서양의학처럼 몇 년 동안 배워서 통달하는 게 아니었다. 한의학의 침술은 십여 년간 공력을 들이지 않으면 입문조차 하기 어렵고 통달하려면 적어도 몇십 년은 더 걸린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배워도 감히 통달한다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런데 한율은 지금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침술을 논하고 있으니, 닥터 훈은 그가 마냥 우스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