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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놀아난 여자

  • 한율이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신랑이 탄 차가 마침 문을 가로막았다.
  • 정장 차림에 부케를 든 청년이 차에서 내렸는데 그가 바로 신주원이었다!
  • 한율을 본 신주원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 “오늘 출소했지? 내가 깜빡했어. 마침 잘됐네. 나와 서연의 결혼식에 참석해야지?”
  • 신주원은 비난 섞인 말투로 한율에게 쏘아붙였다.
  • 다만 한율은 차가운 눈길로 그를 한번 흘겨볼 뿐 이내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는 신주원 같은 인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 “왜 가려고 그래?”
  • 이때 신주원이 뜻밖에도 한율을 잡으며 말했다.
  • “왜? 축의금을 낼 돈이 없어서 그런 거야? 괜찮아. 너는 안 줘도 돼. 나중에 먹다 남은 음식이 있다면 네가 가서 실컷 먹어. 우리는 킹스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거든. 네가 이 기회에 안 가면 언제 그런 고급 호텔에 가보겠어?”
  • 신주원은 실실 비꼬면서 한율의 얼굴까지 툭툭 쳤다. 참다못한 한율은 그의 손을 힘껏 내리쳤다!
  • “야 이 멍청한 녀석아, 실컷 놀아난 여자와 결혼하는 게 뭐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이야? 저 년은 이미 내가 놀다 버린 여자야.”
  • 한율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 사실 그는 단 한 번도 강서연과 스킨쉽을 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신주원의 기분을 더럽히고 내친김에 강서연까지 골탕 먹이기 위해서였다.
  • 그의 말에 신주원은 화들짝 놀라더니 황급히 강서연을 바라보았다.
  • ‘서연이는 분명 한율과 손도 잡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 강서연은 신주원의 표정을 보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는 대뜸 한율에게 고함을 질렀다.
  • “한율,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누가 너한테 놀아났어? 너 따위가 감히! 우린 손도 잡지 않았잖아!”
  • 하윤정도 당황해하며 한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 “한율아, 너 지금 우리 서연이를 얻지 못했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야? 네 꼴을 좀 봐. 너 따위가 어떻게 우리 딸을 만져나 보겠어!”
  • “오빠, 쟤 말을 믿으면 안 돼요. 지금 작정하고 오빠 기분을 더럽히는 거라고요.”
  • 하윤정도 덩달아 신주원에게 해명했다. 어떻게 얻은 사위인데, 한율의 말 한마디로 이 결혼을 망칠 수는 없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절대 안 믿어요.”
  • 신주원도 바보가 아닌지라 한율의 말을 쉽사리 믿어줄 리 없었다.
  • “믿거나 말거나 네 맘대로 해!”
  • 한율은 더는 신주원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아예 그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 “잠깐!”
  • 이때 신주원이 그를 불러세웠다.
  • “너 입조심해. 내 아내의 험담을 아무 데나 늘어놓기만 해 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 신주원은 괜히 한율의 험담으로 신씨 일가의 명성이 흐려질까 봐 걱정됐다!
  • “웃겨 정말... 내가 말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 한율은 차가운 눈빛으로 신주원을 바라보았다.
  • “너나 조심해. 언젠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할 수 있으니까!”
  • 한율의 서늘한 눈빛에 신주원은 순간 심장이 움찔거렸다.
  • 다만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신주원은 이내 자신이 굴욕을 당한 것 같아 두 눈을 부릅뜬 채 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 “너 이 자식,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어디 한 번 덤벼보시던가. 그때 가서 괜히 무릎 꿇고 내게 사죄하지 마!”
  • 신주원은 울화가 치밀었다. 오늘이 만약 그의 결혼식 날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한율을 쥐어팼을 것이다.
  • “아직 누가 무릎을 꿇을지 모르잖아. 어디 한 번 두고 봐!”
  • 한율은 그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 “주원아, 시간 없어 인제. 저런 거지 같은 녀석은 거들떠보지 마. 비겁한 것!”
  • 하윤정은 경멸의 눈길로 한율을 째려봤다.
  • 신주원은 부케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한율은 신주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손을 한 번 튕겼고 한 줄기 은빛이 신주원의 몸 안에 들어갔다.
  • 신주원은 확연히 몸을 움찔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안으로 걸어갔다.
  • “너는 분명 무릎을 꿇고 나한테 빌게 될 거야!”
  • 한율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짓더니 바로 킹스 호텔로 향했다.
  • ...
  • 킹스 호텔 입구.
  • 서준표는 친히 문 앞에서 한율을 기다렸는데 그 모습에 입구를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이 수군덕거렸다.
  • “아니 서 회장님이 왜 호텔 입구에 서 계시지? 누굴 기다리시나 봐. 대체 상대가 누구길래 서 회장님이 직접 기다리시는 거야?”
  • “소문에 의하면 신씨 일가의 큰아들이 오늘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던데, 혹시 그들을 기다리는 거 아니야?”
  • “그럴 수 있어. 신씨 일가도 재벌가이니 체면을 세워드려야겠지.”
  • 다들 구시렁거리며 킹스 호텔로 들어갔고 서준표는 여전히 문 앞을 서성이며 이따금 개의치 않은 얼굴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 “아빠, 그 녀석은 분명 헛소리를 지껄였을 거예요. 아빠가 왼쪽 폐를 다치고 은근히 발작하며 생명의 위험까지 준다는데 제가 볼 땐 다 헛소리에요. 아빠는 단지 감기에 걸려 폐에 염증이 생겼을 뿐이니 더이상 기다리지 마시고 저와 함께 병원에 가요, 네?”
  • 서유진은 서준표에게 권유했다.
  • 서준표는 이곳에서 반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한율은 줄곧 나타나지 않았다. 서유진은 왠지 한율이 헛소리를 지껄인 것 같았다. 게다가 서준표도 평소 그들에게 자신이 왼쪽 폐를 다쳤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고 전에 이런 증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유진아, 아직 네가 모르는 일이 많아. 나의 병은 병원에 가도 치료할 수 없단다. 이건 가끔 발작하는 병이라 이젠 20년도 더 됐어. 내가 여태껏 너희들에게 얘기하지 않은 이유는 괜히 알면 걱정할까 봐...”
  • 서준표는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 그의 말에 서유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해서 아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 “아빠, 이게 대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빠 저 놀리지 마세요. 저 정말 무섭단 말이에요... 제가 이미 닥터 훈에게 전화했으니 곧 도착할 거에요.”
  • 서유진은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어머니를 본 적이 없고 줄곧 서준표가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만약 서준표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남은 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 “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시간이 되면 아빠가 천천히 얘기해줄게...”
  • 말을 마친 서준표는 또다시 시계를 보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멀리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