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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사적인 원한

  • 한율은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가린 여성을 보고 역겨움에 인상을 찌푸렸다.
  • 짙은 화장을 한 여성은 장혜원이었고 그녀 또한 한율의 동창이었다.
  • 학창시절, 그녀는 한율을 좋아했었다.
  • 당시, 한율의 부친께서는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평생 직장에 다니고 계셨기 때문에 한율을 쫓던 애들이 적지 않았었다.
  • 그러나 한율은 장혜원이 아닌 강서연과 눈이 맞았었다.
  • 그의 눈에 비친 강서연의 외모와 성격은 허영심으로 가득찬 장혜원보다 훨씬 좋았었다.
  •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 그는 애당초 자기의 눈이 삐었다고 생각했다.
  • 장혜원 옆에 있던 젊은이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 “한율, 동창끼리 만났는데 인사 좀 나누지 그래? 혹시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된 거야? 학창시절엔 학생회 회장도 맡으며 잘 나가더니, 선생님들이랑 교장의 눈에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던 네가 학교 졸업한 후 감옥에 갔다 온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 젊은이의 이름은 박정재였고 한율의 기숙사 룸메이트였다.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지만 박정재가 강서연을 짝사랑했던 탓에 그녀와 손을 잡은 한율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둘을 갈라놓기 위해 적잖게 이간질을 했었다.
  • 그러나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 그후로 두 사람은 연락을 두절하고 졸업한 후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 지금 장혜원과 박정재가 동시에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두 사람 모두 강서연의 초청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 안 그러면 두 사람은 이곳에 얼굴을 들이밀 자격도 없었다.
  • 한율은 두 사람의 얼굴을 슥 훑어보고 바로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물만 마셨다.
  • 그는 두 사람을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 한율이 고개를 숙이자 박정재와 장혜원은 그가 두려움에 빠졌다고 착각해 한껏 어깨가 올라가 있었다.
  • “한율, 방금 감옥에서 나왔으니까 아직 일자리는 구하지 못했지? 화장실 청소하는 일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소개해줘? 더럽고 힘들지만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지금 너희 아빠도 직장을 잃었잖아, 언제까지 부모님 등골 빨아먹으면서 살 거야?”
  • 박정재는 뿌듯한 표정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 한율을 마음껏 모욕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 학창시절, 한율의 아빠가 그 직장만 다니지 않았더라면 절대 한율한테 꿀리지 않았을 것이다.
  • “정재야, 무슨 소리하는 거야? 학생회 회장을 하던 놈이 어떻게 화장실 청소를 하겠어? 적어도 깨끗한 일거리를 찾아야지. 길거리 청소하는 건 어때?”
  • 장혜원이 입을 막고 큭큭 웃었다.
  • “하하하...”
  • 박정재와 장혜원의 끝없는 조롱에 광수와 수많은 하객이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 이때, 한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여기서 꺼져.”
  • 그의 말투와 표정은 극히 평온했고 얼굴에 조금의 분노도 서려있지 않았다.
  •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박정재와 장혜원은 갑자기 소름이 쫙 돋았다!
  • 특히 장혜원은 순식간에 얼음 속에 들어간 듯 몸이 덜덜 떨렸고 한율을 직시할 수조차 없었다!
  • 한껏 조롱하려고 했지만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 잠시 후, 박정재는 문득 크나큰 모욕을 당한 듯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한율을 향해 소리질렀다.
  • “범죄자 주제에 꼴값 떨고 있네! 네 여친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는데 넌 입도 뻥끗하지 못했잖아! 우리가 만만해?”
  • “그래, 신씨 일가가 재력이 넘치고 권력도 큰 탓에 아무 말도 못하니까 괜히 우리한테 분풀이하는 거 아니야?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 장혜원도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한율한테 손가락질했다.
  • “그만해...”
  • 한율은 한마디 남기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 “x발, 건드리면 뭐 어쩔 건데? 여기서 곧 주원 도련님 결혼식이 진행될 거야...”
  • 화가 잔뜩 난 박정재는 당장 손을 뻗어 한율의 멱살을 잡고 그를 번쩍 일으켜 세웠다.
  • 이건 모두 신주원한테 잘 보이기 위한 쇼였다.
  • 신주원의 눈에만 든다면 앞으로 승승장구하며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 박정재는 한 손으로 한율의 멱살을 잡고 다른 한 손은 꽉 움켜쥐고 주먹을 날리려고 할 때 한율이 먼저 그의 뺨을 때렸다.
  • 짝!
  • 뺨소리는 결혼식장에 울려퍼졌고 박정재는 한율의 힘에 밀려 테이블 위로 자빠지고 말았다.
  • 쾅...
  • 테이블은 두 동강 났고 위에 펼쳐졌던 그릇과 수저는 모두 바닥에 떨어져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 이에 모든 하객의 눈길이 이곳으로 쏠려 무대 위에 서 있는 신주원과 강서연을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다.
  • 신주원과 강서연의 눈길도 자연스레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 “죽으려고 환장했나...”
  • 광수는 한율이 먼저 손찌검을 한 사실을 확인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 “다 덤벼, 저 자식 죽여버려...”
  • 꼬투리를 잡은 광수는 엄연히 사적인 원한을 풀 수 있게 되었다.
  • 그러나 한율이 한 실력 갖추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 있던 십여 명의 부하들한테 명령했다.
  • “자식, 주원 도련님의 결혼식에서 난리를 피우다니, 진짜 죽으려고 환장한 거야? ...”
  • 십여 명의 부하들이 몽둥이를 꺼내들고 한율을 향해 다가갔다.
  • 주변의 하객들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모두 한율이 곧 호되게 당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