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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귀가

  • 하지만 갑자기 귀국한 단하진은 송예선에게 공포를 안겼다. 그날 밤의 진상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면 지금까지 가진 이 모든 걸 잃을 것이다.
  • 안 돼, 절대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준표가 그녀를 별장까지 데려다줬다.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기 전, 송예선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며 그를 초대했다.
  • “준표. 들어가서 차 한잔할래?”
  • “아니. 나 할 일이 남아서.”
  • “근데 나 혼자 무섭단 말이야. 네가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어.”
  • 송예선이 어떻게든 그를 붙잡으려 했다.
  • “임 씨 아주머니 불러줄게.”
  • 서준표가 핸드폰을 꺼냈다.
  • “아니, 아니 됐어. 난 네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 “회사에 할 일이 있어. 다음에!”
  • 서준표가 자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 “푹 쉬어, 잘 자고.”
  • 아주 아쉽지만 상냥한 서준표의 목소리에 더 이상 투정을 부릴 수 없었던 송예선이 어쩔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 멀어져 가는 서준표의 차를 바라보며 송예선이 빨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따뜻한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고 그 생각에 볼이 절로 빨개졌다.
  • 꼭, 꼭 내 거로 만들 거야.
  •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이 될 거야.
  • 오늘도 어김없이 화창한 하루다.
  • 단하진은 이은미와 함께 매장을 돌 계획이다. 분주히 돌아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오후 4시 반쯤 그녀는 먼저 퇴근했다.
  • 아들과 함께 아버지를 뵈러 가야 한다.
  • 단 씨 가문.
  • 단준석이 미리 알렸기에 이정은은 도우미더러 저녁식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단하진이 즐겨먹는 음식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식탁 위를 점령한 건 전부 제 딸이 즐겨먹는 음식들이다.
  • “사모님, 회장님께서 아가씨 좋아하신다면서 새우를 준비하라고 했는데. 준비할까요?”
  • 도우미가 물었다.
  • “준비해. 엄청 매운맛으로 해. 그년 아주 매워서 죽을 지경으로.”
  • 이정은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 도우미는 지시대로 준비했다. 그리고 이곳에 남은 건 붉으락푸르락해진 이정은뿐이다. 몇 년 사이로 단준석의 회사는 상장을 했고 재산도 억대를 훌쩍 넘었다. 이 판국에 단하진이 귀국을 했다는 건 남편한테 잘 보여서 유산을 좀이라도 더 뜯어먹으려는 게 분명하다.
  • 꿈도 꾸지 마.
  • “엄마, 단하진이 저녁 먹으러 온대?”
  • 단청아가 문밖으로부터 식식거리며 걸어왔다.
  • 이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아빠가 굳이 부르는데 내가 뭐라 할 수도 없잖니.”
  • “5년이나 지났는데 걔는 어떻게 지내나 몰라.”
  • 단청아가 입을 삐죽거렸다.
  • “뭘 어떻게 지내긴? 19살에 집에서 쫓겨났는데 대학도 졸업 못했을 거고. 제 밥벌이도 못하니까 우리 재산을 넘보는 거지.”
  • 이정은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 “엄마. 절대 뺏기면 안 돼. 아빠의 모든 것이 다 내 거야.”
  • 단청아가 당연하단 듯이 말했다.
  • “당연하지. 그년한테 차려지는 건 없어.”
  • “난 가서 화장이나 고쳐야겠네. 새로 산 원피스로 갈아입어야겠어.”
  • 단청아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단하진에게 이 집에서 사랑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각인시켜 줄 거라 다짐했다.
  • 단 씨 가문으로 향하는 택시 안, 단하진은 아들에게 오늘 밤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다. 똑똑하고 철이 든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 단하진이 그를 품에 껴안고 뽀뽀를 했다.
  • “역시 우리 아들이야.”
  • 정말 마음 아픈 일이기도 하다. 사랑만 받아야 할 아이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단준석도 일찍 퇴근했다. 그는 문 어구에서 실종한지 5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딸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 드디어, 택시 한 대가 도착했고 그는 급히 마중했다. 택시가 세워졌다.
  • 가녀린 그림자가 택시 안에서 내렸다. 바로 그의 딸 단하진이다.
  • 하지만 그 뒤로 한 남자아이가 콩 하고 뛰어내렸다. 놀라움에 단준석이 표정관리를 잊고 있었다.
  • 딸의 곁에 왜 서너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는 걸까? 설마… 단준석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 단하진이 아버지를 지그시 바라봤다. 5년 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예전 같지 않다. 세월이 그의 얼굴에 꽤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 얼굴을 보노라니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간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자신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 “아빠. 나 왔어.”
  • 단하진이 아들의 손을 잡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 “우진아, 외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 “외할아버지.”
  • 단우진이 고개를 들어 앳된 목소리로 불렀다.
  • 외할아버지? 뜬금없는 상황에 단준석이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단하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 “내… 내 손자? 엄마 된 거야?”
  • “네, 아빠. 단우진이라고 해요. 내 아들이에요. 세 살 반이에요.”
  • 단청아가 아들의 나이로 추리해 진실을 눈치챌까 봐 단하진이 아들의 나이를 속여 말했다.
  • “세 살 반인데 키가 이렇게 크네.”
  • 이렇게 이쁜 손자가 있으니 단준석은 꿈만 같았다.
  • “그러게요!”
  • 단하진이 미소를 지었다.
  • “애 아빠는?”
  • 단준석이 물었다.
  • “저 혼자 낳았어요. 애 아빠랑 같이 살지 않아요.”
  • 단하진은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 “외할아버지, 난 엄마랑만 살아요.”
  • 꼬마도 따라서 말했다.
  • 그 말에 단준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다면 그동안 딸은 혼자 힘으로 외국에서 아이를 키웠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라는 사람은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5년 전 그녀를 집에서 쫓아냈다.
  • “내 잘못이다. 아버지 잘못이야. 하진아, 아버지를 용서해 줘. 내가 꼭 보상할게.”
  • 미안함과 죄책감이 단준석을 괴롭게 했다.
  • “아니에요. 우진이랑 잘 살고 있어요.”
  • 단하진은 아버지가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 “어서 들어가자! 우진아, 외할아버지한테 오렴.”
  • 단준석이 몸을 낮춰 손자를 품에 안았다. 아이는 잘 컸다. 튼튼한 데다가 오관까지 아주 예뻤다.
  • 그가 본 중에서도 가장 예쁜 아이다.
  • 단하진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힐끗 시선을 주던 이정은은 남자아이를 안고 걸어들어오는 남편을 보게 되었다. 놀란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 “여보. 이 아이는 누구?”
  • “어, 정은아. 하진이 아들이야. 외국에서 내 손자 데려왔더라고.”
  • 단준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남자아이라는 게 그를 더더욱 기쁘게 했다.
  • 남존여비 사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번 생에 아들을 보지 못한 게 그에게 한으로 남았다. 딸의 아들이니 그의 핏줄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쁠 수밖에 없다.
  • “뭐?”
  • 이정은이 깜짝 놀랐다. 이 남자애, 단하진이 밖에서 낳은 애라고?
  • “정은 이모.”
  • 단하진이 시큰둥하게 인사를 건넸다.
  • “어머나! 5년 사이에 아이를 낳았었네. 왜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 이정은이 친절한 척을 해댔다. 남편 앞에서는 연기를 해야 한다.
  • “애 아빠는 누구래? 같이 안 왔나?”
  • “정은아. 아이는 하진이가 키우고 있어.”
  • 단준석이 쓸데없는 질문 삼가라고 눈치 줬다.
  • 그 말에 이정은이 바로 알아차렸다. 단하진은 재산을 뺏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다. 혼자 오는 걸로 모자라 아들 하나 낳아서 한몫 더 챙기려는 흑심이 눈에 선했다. 남편이 꼬마를 끔찍이 이뻐하는 모습을 보니, 그들에게 차려지는 몫이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 “아! 그렇구나! 대단하네! 미혼모!”
  •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다.
  • 꼬마 역시 그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이정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 “누구세요?”
  • 이정은이 꼬마를 힐끗 쳐다봤다.
  • “자, 할머니 하고 불러봐.”
  • “내가 왜 할머니라고 불러야 돼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 꼬마가 큰소리로 말했다. 순수한 아이지만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한눈에 구분할 수 있다.
  • “어머! 얘 봐봐. 넌 정말 예의가 없구나! 하진아, 좀 제대로 가르치지 그러니? 이다음 커서 어떡하려고?”
  • 이정은이 이상야릇한 어조로 말했다.
  • “내 아들한테 신경 끄세요.”
  • 단하진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