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 그룹, 베일에 싸인 인수팀이 회의실에서 사장직을 맡은 잭슨과 담판을 이뤘고 5천억 달러의 격으로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QR 그룹의 대표님이 바뀌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회의실 밖으로 걸어 나온 중년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회보했다.
“준표 도련님, 인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오늘부로 QR 주얼리의 대표님이십니다.”
“알겠습니다.”
전화 너머로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의 뜻을 따라 단하진을 위해 서준표는 5천억 달러로 그녀가 다니고 있는 회사를 인수했다. 이 결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하진뿐이니까.
할머니한테 노력을 하는 모습은 보여야 한다. 하지만 결혼을 할 수 있을지 말지는 미지수다.
서준표는 단하진이 저를 거절하길 원했다. 사랑 없는 결혼은 껍데기일 뿐이고 행복과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다.
대표님이 바뀌었다는 걸 단하진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며칠 사이로 단하진은 근처에 위치한 사립유치원에 등록 수속을 밟았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난 뒤, 그녀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환경에 흥미가 있었던지 작은 책가방을 메고 있는 꼬마는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콩콩 뛰어갔다.
“아들이죠? 정말 잘생겼네요! 이렇게 이쁜 남자아이는 정말 처음 봐요!”
한 엄마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단하진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 이쁘다는 칭찬에 엄마는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다.
바이에가.
오늘은 단하진의 첫 출근 날이다. 디자인부에서 파견한 디자이너이다 보니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전용 사무실에 일 잘 하는 비서까지. 그녀가 맡은 직무는 일반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제작 디자인이다.
QR 주얼리가 유명세를 떨친 이유 중 하나다. 매 손님은 이 세상 하나뿐인 디자인을 소유할 수 있다.
이서현, 단하진의 비서다. 열정이 넘치는 젊은이이고 똑똑할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완벽하다.
“하진 언니, 커피요.”
이서현이 커피를 건넸다.
“고마워.”
단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서현이 노크를 하고는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진 언니, 본부장님께서 전하시래요. 3시에 회의가 있을 거고요, 대표님도 직접 참석하니까 준비하래요.”
정각 3시.
회의실.
단하진이 제 자리에 착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살펴보니 바이에가의 주요 멤버들이다. 꽤 중요한 회의라는 직감이 들었다.
단하진이 두리번거리던 중 날카로운 시선과 눈을 마주쳤다. 20대 후반이 되어 보이는 섹시한 여자다. 그녀 앞에 놓인 명찰엔 “수석 디자이너 이안”이라고 적혀있다.
단하진은 그제야 그 눈빛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디자이너들 사이에 경쟁은 어마어마하다. 이 바닥에선 친구란 없고 전부 이익 경쟁이다. 외국에서 온 그녀가 거슬리는 건 당연할 법도 하다.
그때, 문밖으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꽤 많은 모양이다. 회의실이 문이 열림과 함께 제일 먼저 들어온 건 훤칠한 그림자였다. 깔끔한 핏을 자랑하는 슈트 차림에 조각 같은 얼굴,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게 되는 남자다. 특히나 맨 가운데 위치한 그 의자에 앉아있을 때 말이다.
소리 없이 전해지는 그 위엄은 오랜 시간 높은 자리에 위치해있는 사람이라는 걸 직감하게 했다.
회의실 안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대표님이 왜 바뀐 거지?
준수한 남자의 얼굴에 여자 디자이너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흥분했고 넋을 잃고 그 얼굴에 빠져들었다.
단하진도 어리둥절했다. 바이에가 대표는 50이 넘는 중년 남자라고 알고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젊지?
그때, 부 사장직을 맡은 이양호가 기침을 했다.
“자, 소개하겠습니다. 이 분은 QR 그룹 대표님이자 이사장 직을 맡은 서준표 서 대표님이십니다. 오늘부로 바이에가의 모든 업무를 맡을 것이니 열렬한 환영 부탁합니다.”
다들 숨을 죽이고 있다.
서준표?
서준표가 QR 그룹을 인수했다고?
사람들은 놀라움에 어리둥절해있었다.
하지만 단하진은 고개를 번쩍 들어 가장자리에 앉은 남자한테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남자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준표의 그윽한 두 눈은 매와 같이 예리하고 또 날카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시선을 마주칠 용기가 없다.
하지만 단하진은 다르다. 그리고 그녀는 이 남자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에 대한 이유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서가의 보답을 받지 않겠다고 해서 자꾸 그녀의 근처에서 얼씬대는 건가? 혹시 저가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는가?
“회의 시작하시죠!”
서준표가 시선을 거두고 옆에 서있는 부 사장 이양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작하세요.”
조각 같은 그 얼굴에 심취한 여자들은 회의 내용이 뭐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 회의의 중점은 서준표의 얼굴이니까.
이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족 분위기가 물씬하다. 터프한 부잣집 도련님, 국민 남편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단하진 역시 회의 내용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정신이 딴 데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고개를 들 때마다 남자의 시선이 느껴져 이 공간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역시 서준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챘다. 단하진. 설마 어리고 예뻐서인가?
남자의 시선뿐만 아니라 질투의 시선들이 단하진에게로 향했다. 서준표의 차별 대우가 사람들의 화를 일으킨 모양이다.
단하진은 자리를 박차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서준표, 그만 쳐다봐.
하지만 결국 꿀꺽 집어삼켰다. 그녀는 이 회의가 빠르게 끝나길 바랐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금방 5년짜리 계약서를 체결한 그녀다.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단하진은 제일 먼저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가 사무실로 돌아갔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하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어구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데 서준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단하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 정말 끝이 없네.
“서 대표님께서 무슨 일이시죠?”
단하진이 의자에 앉았다. 대표님을 대하는 태도라기엔 너무 건방진 어조다.
서준표가 그녀 건너편의 의자를 당겨 우아하게 앉았다. 차갑고 고귀한 분위기를 뽐내며 중저음 목소리로 말했다.
“단하진 씨, 얘기 좀 하시죠.”
“일 얘기인가요?”
단하진이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아시겠지만, 다섯 살 때 제가 납치를 당했어요. 어머님께서 목숨을 대가로 저를 구해주셨죠. 서가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니고 있고 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뭐든 요구하면 다 만족해 주죠.”
역시나 또 그 보답 소리다.
“됐습니다. 어머니가 구해줬던 건 경찰이기 때문입니다. 직책이고 보답할 필요 없으십니다. 받지도 않을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