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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내 아들은 내가 키워요

  • QR 그룹, 베일에 싸인 인수팀이 회의실에서 사장직을 맡은 잭슨과 담판을 이뤘고 5천억 달러의 격으로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 QR 그룹의 대표님이 바뀌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회의실 밖으로 걸어 나온 중년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회보했다.
  • “준표 도련님, 인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오늘부로 QR 주얼리의 대표님이십니다.”
  • “알겠습니다.”
  • 전화 너머로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할머니의 뜻을 따라 단하진을 위해 서준표는 5천억 달러로 그녀가 다니고 있는 회사를 인수했다. 이 결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하진뿐이니까.
  • 할머니한테 노력을 하는 모습은 보여야 한다. 하지만 결혼을 할 수 있을지 말지는 미지수다.
  • 서준표는 단하진이 저를 거절하길 원했다. 사랑 없는 결혼은 껍데기일 뿐이고 행복과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다.
  • 대표님이 바뀌었다는 걸 단하진도 모르고 있다.
  • 그리고 앞으로의 며칠 사이로 단하진은 근처에 위치한 사립유치원에 등록 수속을 밟았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난 뒤, 그녀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 새로운 환경에 흥미가 있었던지 작은 책가방을 메고 있는 꼬마는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콩콩 뛰어갔다.
  • “아들이죠? 정말 잘생겼네요! 이렇게 이쁜 남자아이는 정말 처음 봐요!”
  • 한 엄마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 단하진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 이쁘다는 칭찬에 엄마는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다.
  • 바이에가.
  • 오늘은 단하진의 첫 출근 날이다. 디자인부에서 파견한 디자이너이다 보니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전용 사무실에 일 잘 하는 비서까지. 그녀가 맡은 직무는 일반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제작 디자인이다.
  • QR 주얼리가 유명세를 떨친 이유 중 하나다. 매 손님은 이 세상 하나뿐인 디자인을 소유할 수 있다.
  • 이서현, 단하진의 비서다. 열정이 넘치는 젊은이이고 똑똑할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완벽하다.
  • “하진 언니, 커피요.”
  • 이서현이 커피를 건넸다.
  • “고마워.”
  • 단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서현이 노크를 하고는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 “하진 언니, 본부장님께서 전하시래요. 3시에 회의가 있을 거고요, 대표님도 직접 참석하니까 준비하래요.”
  • 정각 3시.
  • 회의실.
  • 단하진이 제 자리에 착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살펴보니 바이에가의 주요 멤버들이다. 꽤 중요한 회의라는 직감이 들었다.
  • 단하진이 두리번거리던 중 날카로운 시선과 눈을 마주쳤다. 20대 후반이 되어 보이는 섹시한 여자다. 그녀 앞에 놓인 명찰엔 “수석 디자이너 이안”이라고 적혀있다.
  • 단하진은 그제야 그 눈빛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디자이너들 사이에 경쟁은 어마어마하다. 이 바닥에선 친구란 없고 전부 이익 경쟁이다. 외국에서 온 그녀가 거슬리는 건 당연할 법도 하다.
  • 그때, 문밖으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꽤 많은 모양이다. 회의실이 문이 열림과 함께 제일 먼저 들어온 건 훤칠한 그림자였다. 깔끔한 핏을 자랑하는 슈트 차림에 조각 같은 얼굴,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게 되는 남자다. 특히나 맨 가운데 위치한 그 의자에 앉아있을 때 말이다.
  • 소리 없이 전해지는 그 위엄은 오랜 시간 높은 자리에 위치해있는 사람이라는 걸 직감하게 했다.
  • 회의실 안 쥐 죽은 듯 조용했다.
  • 대표님이 왜 바뀐 거지?
  • 준수한 남자의 얼굴에 여자 디자이너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흥분했고 넋을 잃고 그 얼굴에 빠져들었다.
  • 단하진도 어리둥절했다. 바이에가 대표는 50이 넘는 중년 남자라고 알고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젊지?
  • 그때, 부 사장직을 맡은 이양호가 기침을 했다.
  • “자, 소개하겠습니다. 이 분은 QR 그룹 대표님이자 이사장 직을 맡은 서준표 서 대표님이십니다. 오늘부로 바이에가의 모든 업무를 맡을 것이니 열렬한 환영 부탁합니다.”
  • 다들 숨을 죽이고 있다.
  • 서준표?
  • 서준표가 QR 그룹을 인수했다고?
  • 사람들은 놀라움에 어리둥절해있었다.
  • 하지만 단하진은 고개를 번쩍 들어 가장자리에 앉은 남자한테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남자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서준표의 그윽한 두 눈은 매와 같이 예리하고 또 날카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시선을 마주칠 용기가 없다.
  • 하지만 단하진은 다르다. 그리고 그녀는 이 남자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에 대한 이유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 서가의 보답을 받지 않겠다고 해서 자꾸 그녀의 근처에서 얼씬대는 건가? 혹시 저가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는가?
  • “회의 시작하시죠!”
  • 서준표가 시선을 거두고 옆에 서있는 부 사장 이양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 “시작하세요.”
  • 조각 같은 그 얼굴에 심취한 여자들은 회의 내용이 뭐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 회의의 중점은 서준표의 얼굴이니까.
  • 이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족 분위기가 물씬하다. 터프한 부잣집 도련님, 국민 남편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 단하진 역시 회의 내용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정신이 딴 데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고개를 들 때마다 남자의 시선이 느껴져 이 공간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역시 서준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챘다. 단하진. 설마 어리고 예뻐서인가?
  • 남자의 시선뿐만 아니라 질투의 시선들이 단하진에게로 향했다. 서준표의 차별 대우가 사람들의 화를 일으킨 모양이다.
  • 단하진은 자리를 박차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서준표, 그만 쳐다봐.
  • 하지만 결국 꿀꺽 집어삼켰다. 그녀는 이 회의가 빠르게 끝나길 바랐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금방 5년짜리 계약서를 체결한 그녀다.
  •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 단하진은 제일 먼저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가 사무실로 돌아갔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하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어구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데 서준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단하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 정말 끝이 없네.
  • “서 대표님께서 무슨 일이시죠?”
  • 단하진이 의자에 앉았다. 대표님을 대하는 태도라기엔 너무 건방진 어조다.
  • 서준표가 그녀 건너편의 의자를 당겨 우아하게 앉았다. 차갑고 고귀한 분위기를 뽐내며 중저음 목소리로 말했다.
  • “단하진 씨, 얘기 좀 하시죠.”
  • “일 얘기인가요?”
  • 단하진이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 “아시겠지만, 다섯 살 때 제가 납치를 당했어요. 어머님께서 목숨을 대가로 저를 구해주셨죠. 서가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니고 있고 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뭐든 요구하면 다 만족해 주죠.”
  • 역시나 또 그 보답 소리다.
  • “됐습니다. 어머니가 구해줬던 건 경찰이기 때문입니다. 직책이고 보답할 필요 없으십니다. 받지도 않을 거고요.”
  • 단하진이 간결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 “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원한다면 제가 아빠가 되어드리죠.”
  • 서준표가 눈을 찌푸리며 제안했다.
  • 단하진이 고개를 번쩍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순간,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 왜지?
  • 아들이 이 남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관이며 눈빛, 분위기 심지어 머릿카락까지.
  • 정말 희한한 일이다.
  • “필요 없습니다. 내 아들은 내가 키워요.”
  • 단하진이 재차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