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침하던 서준표의 눈가에 뜻밖의 웃음이 번졌다. 그날 밤 신비로웠던 그 여자가 드디어 나타났다. 그는 반드시 그녀를 찾아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졌던 빚을 갚겠다.
여성 의류 스튜디오, 송예선이 일 년 전에 인수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사업이 점점 더 힘들어졌고 월세를 내는 것마저 버거워졌다. 그러니 수단 방법을 다 써가며 돈을 구할 수밖에 없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시계를 팔아보려 했더니 3천만 원 가까이의 고가로 팔렸고 그녀에겐 꿈같은 소식이었다.
5년 전, 클럽에게서 연락이 왔다. 예약했던 룸에서 찾은 시계라며 직접 받아 가라고 했었고 고급 남자 시계인 걸 보니 두 말없이 받아왔다.
그렇게 시계는 그녀의 서랍 속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저번 주, 그녀는 시계를 중고 시장에 내놓았다. 오래된 시계 하나가 3천만 원의 고가로 낙찰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입금된 금액을 바라보던 송예선이 한동안은 걱정 없이 보낼 수 있다며 들떠있었다.
순간.
스튜디오 문이 열렸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반겼다.
“어서 오세…”
놀란 나머지 말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는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이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고귀했다.
놀란 송예선이 말을 더듬었다.
“누… 누구 찾으시죠?”
이곳은 여성 의류 전문숍이다. 고급 슈트 차림의 남자가 쇼핑을 목적으로 찾아올 곳이 아니다. 1.9미터는 거뜬한 키의 남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었다.
“송예선 씨 맞나요?”
서준표의 눈빛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5년 전 그 여자를 찾기에 급급한 눈빛이다.
“네… 네! 맞아요. 누구…?”
그의 곧은 눈빛에 송예선은 말을 더듬었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건네며 무거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시계, 계속 그쪽이 갖고 있었나요?”
남자 수중의 시계를 본 송예선이 흠칫 놀랐다. 조금은 양심에 찔려 눈을 깜빡 거렸지만 곧장 대답했다.
“네. 그 시계… 내 거예요.”
“5년 전, 포에버 클럽 808번 룸에 여자도 당신인가요?”
서준표가 여자를 빤히 쳐다봤고 동시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날 밤 그 여자가 정말 이 여자라고?
송예선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5년 전 808번 룸, 저가 단하진을 해코지하려 예약했었던 그 방이다. 이 남자가 그걸 묻는 이유가 뭐지?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다. 송예선이 통쾌하게 인정했다.
“그럼요.”
“이 시계 잘 간직하고 있어요, 이젠 팔지 말고. 그날 밤 일은 제가 보상해 드릴 겁니다.”
서준표가 시계를 그녀의 손에 건넸다.
“절 기억하세요. 서준표입니다.”
송예선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바라봤다. 서준표, SC 그룹 그 재벌집의 도련님?
“서…서준표 씨라고요?”
송예선은 격동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일행인 남자가 명함을 건넸다.
“송예선 씨, 저희 도련님 명함입니다. 무슨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하셔도 됩니다.”
송예선이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골드 명함 위에 적혀있는 그 이름에 그녀의 심장은 주체할 수없이 쿵쾅거렸다. 설마 그날 밤 단하진과 하룻밤을 보냈던 그 남자가 저들이 준비했던 남자가 아니었나?
설마, 이 준수한 서가의 도련님이었단 말인가?
송예선이 바로 손을 뻗어 서준표의 팔짱을 끄집었다. 완벽한 연기로 붉어진 눈시울은 가녀린 모습이다.
“서준표 씨, 반드시 절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그날 밤 이후로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쪽은 전혀 모르니까요.”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피해자는 마치 그녀라는 듯이 말이다.
지금 송예선은 딱 한 가지 생각뿐이다. 단하진을 대신해 그날 밤의 피해자가 되려는 것. 그녀는 서준표에게 책임을 물어 더 많고 좋은 것들을 누릴뿐더러 이 남자와 결혼해 서가의 사모님이 될 것이다.
“걱정 마세요. 책임질 겁니다.”
힘 있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절로 안심하게 만들었다.
“도련님께서 특별히 송예선 씨를 위해 별장을 마련했습니다. 언제든지 입주 가능하고요. 앞으로 송예선 씨의 모든 수요는, 저희 도련님께서 책임 지실 겁니다.”
곁에 서있던 실장 주호가 말했다.
그 말에 송예선이 눈을 번쩍 떴다. 이게 웬 떡이냐? 갑작스레 닥치는 행복에 그녀는 기뻐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부귀영화는 그녀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얘기를 끝낸 서준표는 그윽한 눈빛으로 송예선을 바라보고 뒤돌아 떠났다.
여전히 시계를 쥐고 있는 송예선은 너무 흥분해서 눈물이 삐질 나왔다.
“이제 난 부자야! 부자!”
그러면서 속으로 단하진이 제발 죽으라고 갑자기 나타나서 또 걸리적거리지 말라고 악독한 저주를 걸었다.
호화롭지만 매끈하면서도 날렵한 디자인의 차 안, 서준표가 눈을 감고 생각을 되감고 있다. 5년 전 그 여자가 정말 이 송예선인가?
왜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일까? 5년 사이에 많이 달라진 건가?
해 질 녘의 노을이 차창을 뚫고 남자의 또렷한 콧날에 비쳤다. 하느님이 만든 작품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은 용모다.
SC 그룹의 후계자로 부족할 것 없는 남자다. 경영을 맡은지 5년 만에 SC 그룹의 주가를 몇 배나 올렸고 수많은 경쟁을 뚫고 이겨 세계적인 그룹으로 양성했다.
5년 전 그날 밤, 그의 인생에서 유일했던 실수였다. 적은 약으로 그를 공제해 명성을 무너뜨리려 했고 그는 급하게 그때 그 룸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약성을 견딜 수 없을 무렵, 한 여자가 나타나 그를 구해줬다.
한 여자의 결백을 망쳐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결백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건, 그가 깨어났을 때 소파 위에 남은 혈흔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지럽고 뒤죽박죽이던 그 룸을 되새기다 보니 서준표는 더 이상 송예선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반드시 그녀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외국 모 오피스텔 안.
단하진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네. 삼일 안으로 귀국해 대회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엄마, 우리 귀국하는 거예요?”
꼬마가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에 청 반바지를 입은 남자아이었지만 오관은 남달리 이뻤다. 앳된 모습인 아이는 이제 겨우 네 살쯤이나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에게선 뿜어져 나오는 고귀함은 숨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