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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 여자, 맛있었어

  • 실내의 화사한 조명으로 남자의 완벽한 미모가 드러났다.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남자다. 고급 재질로 만들어진 핸드메이드 셔츠는 남자의 탄탄한 근육라인을 돋보이게 했다. 헤아릴 수 없는 눈빛인 서준표의 머릿속엔 할머니가 단호하게 고집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 “준표야. 반드시 단하진 양을 아내로 맞아야 한다. 서가의 며느리는 그 아이일 수밖에 없다.”
  • 하지만 서준표는 오로지 다른 사람 생각뿐이다. 그날 밤 저가 가졌던 그 여자. 그날 뭔가 잘못 마신 탓으로 의식이 흐릿해졌고 제 몸 아래서 가녀린 울음소리와 함께 간곡히 빌던 여자의 목소리가 기억의 전부다.
  • 끝으로 손목에 있던 시계를 그녀의 손에 건네주곤 쓰러져 버렸다.
  • 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는 여자를 찾는데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주, 그때 그 시계가 중고시장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으라고 말씀했다.
  • 이때,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준표 도련님, 그 여자분 찾았습니다. 송예선이라고 합니다. 시계의 출처가 거기라고 합니다.”
  • “주소 보내줘. 내가 직접 찾으러 가지.”
  • 침침하던 서준표의 눈가에 뜻밖의 웃음이 번졌다. 그날 밤 신비로웠던 그 여자가 드디어 나타났다. 그는 반드시 그녀를 찾아내리라 다짐했다.
  • 그리고 그날 밤 졌던 빚을 갚겠다.
  • 여성 의류 스튜디오, 송예선이 일 년 전에 인수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사업이 점점 더 힘들어졌고 월세를 내는 것마저 버거워졌다. 그러니 수단 방법을 다 써가며 돈을 구할 수밖에 없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시계를 팔아보려 했더니 3천만 원 가까이의 고가로 팔렸고 그녀에겐 꿈같은 소식이었다.
  • 5년 전, 클럽에게서 연락이 왔다. 예약했던 룸에서 찾은 시계라며 직접 받아 가라고 했었고 고급 남자 시계인 걸 보니 두 말없이 받아왔다.
  • 그렇게 시계는 그녀의 서랍 속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저번 주, 그녀는 시계를 중고 시장에 내놓았다. 오래된 시계 하나가 3천만 원의 고가로 낙찰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 콧노래 흥얼거리며 입금된 금액을 바라보던 송예선이 한동안은 걱정 없이 보낼 수 있다며 들떠있었다.
  • 순간.
  • 스튜디오 문이 열렸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반겼다.
  • “어서 오세…”
  • 놀란 나머지 말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다.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는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이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고귀했다.
  • 놀란 송예선이 말을 더듬었다.
  • “누… 누구 찾으시죠?”
  • 이곳은 여성 의류 전문숍이다. 고급 슈트 차림의 남자가 쇼핑을 목적으로 찾아올 곳이 아니다. 1.9미터는 거뜬한 키의 남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었다.
  • “송예선 씨 맞나요?”
  • 서준표의 눈빛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5년 전 그 여자를 찾기에 급급한 눈빛이다.
  • “네… 네! 맞아요. 누구…?”
  • 그의 곧은 눈빛에 송예선은 말을 더듬었다.
  • 남자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건네며 무거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 “시계, 계속 그쪽이 갖고 있었나요?”
  • 남자 수중의 시계를 본 송예선이 흠칫 놀랐다. 조금은 양심에 찔려 눈을 깜빡 거렸지만 곧장 대답했다.
  • “네. 그 시계… 내 거예요.”
  • “5년 전, 포에버 클럽 808번 룸에 여자도 당신인가요?”
  • 서준표가 여자를 빤히 쳐다봤고 동시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날 밤 그 여자가 정말 이 여자라고?
  • 송예선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5년 전 808번 룸, 저가 단하진을 해코지하려 예약했었던 그 방이다. 이 남자가 그걸 묻는 이유가 뭐지?
  •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다. 송예선이 통쾌하게 인정했다.
  • “그럼요.”
  • “이 시계 잘 간직하고 있어요, 이젠 팔지 말고. 그날 밤 일은 제가 보상해 드릴 겁니다.”
  • 서준표가 시계를 그녀의 손에 건넸다.
  • “절 기억하세요. 서준표입니다.”
  • 송예선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바라봤다. 서준표, SC 그룹 그 재벌집의 도련님?
  • “서…서준표 씨라고요?”
  • 송예선은 격동해 쓰러질 것만 같았다.
  • 일행인 남자가 명함을 건넸다.
  • “송예선 씨, 저희 도련님 명함입니다. 무슨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하셔도 됩니다.”
  • 송예선이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골드 명함 위에 적혀있는 그 이름에 그녀의 심장은 주체할 수없이 쿵쾅거렸다. 설마 그날 밤 단하진과 하룻밤을 보냈던 그 남자가 저들이 준비했던 남자가 아니었나?
  • 설마, 이 준수한 서가의 도련님이었단 말인가?
  • 송예선이 바로 손을 뻗어 서준표의 팔짱을 끄집었다. 완벽한 연기로 붉어진 눈시울은 가녀린 모습이다.
  • “서준표 씨, 반드시 절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그날 밤 이후로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쪽은 전혀 모르니까요.”
  •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 피해자는 마치 그녀라는 듯이 말이다.
  • 지금 송예선은 딱 한 가지 생각뿐이다. 단하진을 대신해 그날 밤의 피해자가 되려는 것. 그녀는 서준표에게 책임을 물어 더 많고 좋은 것들을 누릴뿐더러 이 남자와 결혼해 서가의 사모님이 될 것이다.
  • “걱정 마세요. 책임질 겁니다.”
  • 힘 있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절로 안심하게 만들었다.
  • “도련님께서 특별히 송예선 씨를 위해 별장을 마련했습니다. 언제든지 입주 가능하고요. 앞으로 송예선 씨의 모든 수요는, 저희 도련님께서 책임 지실 겁니다.”
  • 곁에 서있던 실장 주호가 말했다.
  • 그 말에 송예선이 눈을 번쩍 떴다. 이게 웬 떡이냐? 갑작스레 닥치는 행복에 그녀는 기뻐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부귀영화는 그녀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 “그럼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 얘기를 끝낸 서준표는 그윽한 눈빛으로 송예선을 바라보고 뒤돌아 떠났다.
  • 여전히 시계를 쥐고 있는 송예선은 너무 흥분해서 눈물이 삐질 나왔다.
  • “이제 난 부자야! 부자!”
  • 그러면서 속으로 단하진이 제발 죽으라고 갑자기 나타나서 또 걸리적거리지 말라고 악독한 저주를 걸었다.
  • 호화롭지만 매끈하면서도 날렵한 디자인의 차 안, 서준표가 눈을 감고 생각을 되감고 있다. 5년 전 그 여자가 정말 이 송예선인가?
  • 왜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일까? 5년 사이에 많이 달라진 건가?
  • 해 질 녘의 노을이 차창을 뚫고 남자의 또렷한 콧날에 비쳤다. 하느님이 만든 작품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은 용모다.
  • SC 그룹의 후계자로 부족할 것 없는 남자다. 경영을 맡은지 5년 만에 SC 그룹의 주가를 몇 배나 올렸고 수많은 경쟁을 뚫고 이겨 세계적인 그룹으로 양성했다.
  • 5년 전 그날 밤, 그의 인생에서 유일했던 실수였다. 적은 약으로 그를 공제해 명성을 무너뜨리려 했고 그는 급하게 그때 그 룸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약성을 견딜 수 없을 무렵, 한 여자가 나타나 그를 구해줬다.
  • 한 여자의 결백을 망쳐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 결백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건, 그가 깨어났을 때 소파 위에 남은 혈흔이 보였기 때문이다.
  • 어지럽고 뒤죽박죽이던 그 룸을 되새기다 보니 서준표는 더 이상 송예선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반드시 그녀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 외국 모 오피스텔 안.
  • 단하진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
  • “네. 삼일 안으로 귀국해 대회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 “엄마, 우리 귀국하는 거예요?”
  • 꼬마가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에 청 반바지를 입은 남자아이었지만 오관은 남달리 이뻤다. 앳된 모습인 아이는 이제 겨우 네 살쯤이나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에게선 뿜어져 나오는 고귀함은 숨길 수 없다.
  • 단하진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엄마랑 같이 한국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