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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사양할게요

  • “갈래요! 엄마랑 같이 있을래요!”
  • 꼬마는 커다란 두 눈으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두 눈은 마치 까만 보석같이 반짝거렸다.
  • 아들이 웃는 얼굴에 단하진은 넋을 잃고 말았다.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는 매 순간이 행복하다. 어쩌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낳은 걸까, 매번 감탄할 수밖에 없다.
  • “그래. 그럼 우리 빨리 짐 싸고, 내일 오후에 공항으로 가는 거다?”
  • “네!”
  • 꼬마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향해 옷을 정리했다.
  • 단하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5년 전 아버지에게 쫓겨난 뒤로 그녀는 계속 외국에서 생활했다.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제 그 집은, 제 집이 아니다.
  • 외국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는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았다. 지금은 일 때문에 반드시 귀국해야 하고 원한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뵈러 찾아갈 것이다.
  • 그래도 아버지니까.
  • 삼일 후 저녁 무렵, 공항. 단하진이 밀차를 밀고 꼬마가 밀차에 올려진 트렁크 위에 앉아있다. 아이는 똘망똘망한 두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국내의 모든 것들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 단하진이 갓 출구 밖으로 나오자마자, 슈트 차림의 두 남자와 마주쳤다. 두 남자는 젠틀하게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 “단하진 씨, 서 씨 가문 여사님께서 모시라고 합니다. 차는 출구 쪽에 있으니…”
  • 단하진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 “서가의 호의, 잘 알겠습니다만 사양할게요.”
  • “단하진 씨, 여사님께서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 중년 남자가 다시 그녀에게 부탁했다.
  • 단하진도 여사님의 호의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호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 “여사님께 전해주세요. 어머니가 목숨을 구해줬던 건, 제 어머니의 직책입니다. 그 보답을 제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 그리고 단하진이 밀차를 밀고 대문 쪽으로 향했다.
  • 그녀 뒤에 서있던 남자가 핸드폰을 꺼내 가까운 쪽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 “도련님, 단하진 씨께서 거절하셨습니다.”
  • 공항 출구 앞엔 세대의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세워져있다. 꽉 닫힌 차창은 신비함을 뽐냈고 그 누구도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
  • 가운데 차 뒷좌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출구 쪽을 지그시 바라봤다. 밀차를 밀고 나오는 젊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 여자는 흰색 티셔츠에 심플한 청바지 차림이었고 긴 머리를 가볍게 묶어올려 청순하면서도 뽀얀 얼굴을 드러냈다. 여유로운 그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다.
  • 서준표의 시선은 어딘가에 꽂혔다. 밀차 위에서 뛰어내린 남자아이,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다. 아이는 그레이 색 맨투맨에 운동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작은 이마를 덮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는 숨길 수 없었다. 정말 귀여운 아이다.
  • 단하진이 몸을 낮춰 꼬마의 옷차림을 정리해 주고 있다. 사랑을 말하는 그녀의 눈빛이 서준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저 아이는 누구지? 단하진이 이미 결혼한 건가?
  • 그런 거면 이제 할머니의 바람대로 저 여자와 결혼할 필요가 없겠군.
  • 멀어져 가는 택시를 바라보며 서준표도 공항을 떠났다.
  •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그는 빠르게 받았다.
  • “여보세요. 예선아!”
  • “준표, 언제 올 거야? 보고 싶어.”
  • 애교 섞인 송예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요즘 너무 바빠. 괜찮아지면 바로 갈게.”
  • 서준표가 대답했다.
  • “꼭 와야 돼!”
  • 송예선이 애교를 부렸다.
  • “응!”
  • 서준표가 인내심을 갖고 대답했다.
  • 서 씨 가문.
  • 은발머리 여사님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수하의 보고를 듣고 있다. 그러다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 “뭐라? 단하진이 애가 있다고? 결혼한 거야?”
  • “아이의 아빠가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단하진 씨, 미혼모인 것 같습니다.”
  • “참말로 불쌍한 아이네. 그 어린 나이에 미혼모라니.”
  • 여사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도에게 수십 번 난도질을 당하고 처참하게 세상을 뜬 여자 형사가 떠오르며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안함이 스며올랐다.
  • 바로 그때, 현관으로 훤칠한 그림자가 보였다. 서준표가 돌아왔다.
  • “준표야, 이리 오렴.”
  • 여사님이 손자를 향해 손짓했다.
  • 서준표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
  • “할머니, 단하진은 계속해서 우릴 거절했습니다. 제 생각엔…”
  • “방금 들었다. 단하진 양, 미혼모라고 하더라. 준표야, 네가 두 사람 보살펴야 한다.”
  • “…”
  • 포기한 줄만 알았던 할머니가 더 집요해졌다.
  • “할머니,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다른 방식으로 보답하고 보상해 줄 수 있잖아요.”
  • 서준표가 차분하게 말했다.
  • 그는 할머니가 그 점을 알았으면 했다.
  • 그 말을 들은 여사님이 그를 바라보며 단칼에 거절했다.
  • “안 된다. 넌 꼭 단하진을 신부로 맞아야 해. 평생을 아껴주고 보호해 줘야 해.”
  • 서준표의 미간이 뒤틀렸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하는 건 두 사람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은혜를 무엇보다도 중히 생각하는 할머니라 거절할 여지조차 없다.
  • “구현월 형사님이 너를 구해주느라 얼마나… 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
  • 여사님이 비통에 젖은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손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간결한 목소리로 말했다.
  • “형사님 딸을 이번 생은 물론 다음 생이라도 네가 책임져야 해. 그래도 보답할 수 없는 은혜야.”
  • 서준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럴게요. 결혼할게요.”
  • 하지만 5년 내내 마음에 걸렸던 또 다른 여자가 있다. 그 사람에게도 보상을 해야 하는데, 이 일에 관하여 어떻게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말을 하든 안 하든, 단하진과 결혼하라는 할머니의 뜻은 바뀌지 않을 거니까.
  • “단하진, 아이가 있더라고요.”
  • 그가 말했다.
  • “그래! 남자 아이더라. 서너 살쯤 되어 보이던데, 어떤 양심 없는 자식이 그렇게 이쁜 모자를 두고 떠났는지. 준표야, 너는 그 아이 싫어하면 안 된다.”
  • 여사님은 오히려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 “…”
  • 이건 무슨 원 플러스 원 이벤트인가?
  • 바이에가 주얼리는 단하진의 대표님이 인수한 국내에서 유명한 회사다.
  • 이 브랜드를 확장하기 위해 QR 주얼리의 수석 디자이너인 단하진이 국내로 소환되었다.
  • 바이에가의 도움으로 단하진은 한 오피스텔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들은 잠을 자고 있었고 그녀는 숙소를 정리했다. 겨우 2시간 만에 이곳은 아들과 함께 지낼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 잠든 아들의 모습을 보면 힘든 것들이 보람차게 느껴졌다.
  • 5년 전, 이 도시에서 일어났던 일은 아직도 그녀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당했던 배신, 악독한 의붓 자매 그리고 저를 쫓아낸 아버지.
  • 이 5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저도 몰랐다. 홀로 아들을 데리고 디자인 공부를 하며 회사 신인으로부터 한 걸음씩 수석 디자이너에 닿기까지 남들보다 백배 더한 노력이 있지만 하느님이 도운 것도 있다.
  • 넉넉한 잔고, 아들 그리고 좋아하는 직업까지, 하느님의 도움으로 행운스럽게 얻은 것들이다.
  • 복잡한 생각과 함께 그녀가 핸드폰을 들었다.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누르려고 했지만 매번 망설이게 됐다.
  • 5년이나 지났지만 아버지가 아직도 화나있지 않을까?
  • 됐어.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