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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망신

  • 한편, 단청아는 SPA를 받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통화가 끝나자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송예선.
  •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단하진의 결백을 더럽히고 가문에서 쫓겨나게 만들었다. 그 후로 그녀는 송예선과 좋은 친구가 됐다. 다만 요즘 들어 송예선의 연락이 뜸해졌고 스튜디오도 문을 닫았다고 했다. 요즘 뭘 하고 지내는지 알수 없었다.
  • 전화 너머로 송예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청아야.”
  • “예선아, 요즘 뭐해? 스튜디오는 왜 닫았어?”
  • “어! 나… 나 여행 중이야! 무슨 일 있어?”
  • “예선아, 나쁜 소식 하나 있어. 단하진이 귀국했대.”
  • 럭셔리한 별장 안, 소파에 누워 도우미의 마사지를 받고 있던 송예선이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소파에 떨궜다. 그녀는 급히 핸드폰을 주어 숨을 고르고는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 “언제 돌아왔어? 왜 귀국했대?”
  • “왜 이렇게 겁먹었어? 걔가 무섭기라도 해?”
  • “아니. 그게 아니라. 궁금해서.”
  • “아빠가 얘기해 줬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나랑 재산 싸움하려고 돌아온 것 같아. 너한테 찾아갈 수도 있겠다 싶어서.”
  • 송예선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단하진이 왜 외국에서 죽지 않았을까? 그럼 이렇게 겁이 날 일도 없는데.
  • 지금 그녀가 누리고 있는 전부가 단하진의 덕이다. 그때 그 여자가 단하진이었다는 사실, 죽어도 서준표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
  • “청아야. 나도 걔가 나한테 복수할까 봐 무서워. 앞으로 일거수일투족 다 나한테 알려줘, 응? 나도 미리 준비 좀 하게.”
  • 송예선이 말했다.
  • 단청아가 대답했다.
  • “그래. 같이 이겨보자고.”
  • 전화를 끊고 나서도 불안감에 휩싸인 송예선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의 그녀는 재벌가 아가씨나 마찬가지다. 먹는 것, 쓰는 것 전부 최상급으로 준비되어 있고 서준표는 보상하기 위해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줬다. 하지만 송예선의 욕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물질적인 보상으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서준표의 아내가 되길 바랐다.
  • 서준표 같은 남자의 여자가 된다는 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일 것이다.
  • 그러니 단하진이 제 계획에 흠이 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 그리고 단청아도 냄새를 맡아서는 안 된다. 분명히 저를 질투해 진실을 까발릴 것이니까.
  • 단하진의 일거수일투족을 장악해야만 한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을 이용해 그녀를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
  • 다섯 시, 단하진은 제시간에 유치원 앞에 나타났다. 꼬마는 환한 미소로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 “엄마.”
  • “학교 재밌어?”
  • “재밌어요. 선생님도 나를 좋아하고, 친구들도 나를 좋아해요.”
  • 꼬마가 흥얼거리며 말했다.
  • “저녁에 국수 어때?”
  • “좋아요!”
  • 단하진은 천사 같은 아이가 태어났음을 행운으로 느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속을 썩인 적도, 음식을 거른 적도 없었다. 성격도 좋고 따뜻한 남자아이다.
  •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꼬마는 레고를 맞추고 있었고 단하진은 2인분의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아늑한 오피스텔엔 사람 냄새로 가득 찼다.
  • “엄마, 오늘 출근 어땠어요?”
  • 꼬마가 물었다.
  • “괜찮았어.”
  • 단하진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들 앞에서 인생 그리고 일에 대한 불평불만을 단 한 번도 늘어놓은 적 없던 그녀다. 삶이 고달프고 가끔은 무너지게 만들어도 아들의 달콤한 미소는 모든 걸 괜찮아지게 만들었다.
  • “우진아, 며칠 이따 외할아버지 만나러 갈까?”
  • 단하진이 아들 단우진에게 물었다.
  • “네. 우진이도 외할아버지 만나고 싶어요.”
  • 꼬마가 기대에 찬 얼굴로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 이정은 모녀가 무조건 제 아들을 반기지 않을 거란 생각에 단하진은 착잡했다.
  • 5년 전 그 뜻밖의 상황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걸 단청아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한테 사랑하는 남자와 낳은 아이라고 말할 것이다.
  • 저녁, 단하진은 아들을 껴안고 잠들었다. 창밖의 아련한 달빛이 두 사람을 비췄고, 모자는 서로 기댄 채로 꿈나라로 향했다.
  • 아침.
  • 아들을 유치원으로 보내고 난 뒤, 단하진은 택시를 타고 회사에 도착했다. 바이에가는 시중심에 있는 8층짜리 빌딩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바로 옆에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건물 앞에서 바이에가는 어쩔 수없이 아연실색해진다.
  • 하지만 바이에가는 국내에서 엄청난 유명세를 떨쳤다. 현재 QR에게 인수 당함으로 그 가치가 더더욱 상승했으며 한 달 뒤 바이에가는 국내의 주얼리 쇼에 초대될 것이다.
  • 단하진이 디자인했던 몇 개의 작품 시리즈도 쇼에 참석하게 되었고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 아침을 사느라 시간을 많이 낭비한 단하진은 손에 있는 빵을 먹으면서 택시비를 물었다. 그러고는 택시에서 내려 걸음을 빨리 움직여 로비로 향했다.
  • 아들은 8시 반에 등교를 하고 그녀는 9시에 출근한다. 시간이 너무나도 빠듯하다.
  • 엘리베이터 입구.
  • 직원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단하진은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엔 다 먹으려고 했다. 꽤 많이 남았음에도 그녀는 억지로 빵을 전부 입에 넣었다.
  • 볼이 빵빵 해져서 우걱우걱 씹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준수하고 세련된 그림자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 잠시 경직됐던 단하진이 간신히 빵을 목구멍으로 집어삼켰고 최대한 우아한 모습으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 “안녕하세요!”
  • 서준표가 중저음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세요.”
  • 단하진이 대답했다. 그리고 일초 뒤, 그녀는 제 우렁찬 트림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 “꺽!”
  • 소리가 엄청났다.
  • 단하진의 얼굴은 순간 새빨개졌다. 하지만 정말 목이 멨다.
  • 그보다 더 최악인 건 엘리베이터의 벽은 거울로 되었다. 그녀의 추한 모습은 그대로 보였고 당황함에 급기야 입을 틀어먹었지만 몸이 급하게 먹었던 그녀에게 항의라도 하듯이 또 한 번의 그다지 우아하지 않은 트림을 올려보냈다.
  • 서준표의 그윽한 시선은 거울을 통해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단하진은 민망함을 무릎 쓰고 그의 “관람”을 견뎌내고 있다.
  • 드디어 6층에 도착했고, 단하진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쪽팔려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 하느님이 정성껏 만들어 놓은 서준표의 차분한 얼굴에 웃음기에 번졌다.
  • 재밌는 여자다.
  • 사무실에 돌아온 단하진은 물을 몇 잔이나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트림을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쪽팔렸던 기억은 만회할 수 없다.
  • 다른 남자였더라면 민망하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서준표다.
  • 분명 저를 비웃었을 것이다.
  • 10시 반.
  • “하진 언니, 부서 회의 시작해요.”
  • 단하진이 대답했다.
  • “알았어.”
  • 회의실.
  • 총괄 디자이너 이은미가 회의실 한편에 앉아있다. 그녀의 밑으로 단하진을 포함한 여덟 명의 디자이너가 있다.
  • “좀만 기다리자. 서 대표님 참석하신대.”
  • 이은미가 물 한 모금 마셨다. 어깨를 으쓱이는 게 조금 긴장한 모습이다.
  • 고작 부서 회의까지 대표가 참여할 줄이야? 그녀는 부담이 컸다.
  • “단하진, 서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야?”
  • 이안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단하진을 바라봤다.
  • 단하진이 단칼에 부정했다.
  • “몰라.”
  • “모르는데 서 대표님이 왜 어제 그렇게 빤히 쳐다봤대?”
  • 다른 여자 디자이너가 불만을 터놓았다.
  • “그 문제는 서 대표님한테 물으시고.”
  • 단하진이 우아하게 응대했다.
  • “일은 일이야. 회사, 너희들 연애나 하라는 곳 아니고 쉬운 길 찾는 곳도 아니야. 똑똑히 기억해들.”
  • 이은미가 엄격한 목소리로 아랫사람에게 경고했다.
  • 이안이 단하진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가 봤을 때 단하진이 그런 사람이다. 서준표라는 지름길을 이용하려는 여자.
  • 바로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기품이 서리고 위엄이 넘치는 그림자가 보였다.
  • 서준표가 우아한 움직임으로 가장 자리에 앉았다. 이 남자를 보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알 수 있다.
  • 부가 나라를 견줄 만한 재부, 인간과 신의 공분을 일으키는 예쁜 얼굴, 로마 신화의 아폴로 뺨치는 완벽한 바디라인, 왕자같이 우아한 기질 그리고 한 나라의 왕 같은 위엄 모두 그가 소유한 것들이다.
  •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 여자들은 연모의 마음을 참을 수 없다.
  • 이은미마저도 급히 머리를 정돈해 여자들 특유의 온유함을 과시하려 했다. 서른다섯이지만 재벌가에 시집을 가는 로망을 갖고 있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다.
  • “시작하죠.”
  • 여심 홀릭 중저음 목소리가 울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