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청아가 갑자기 계단에 나타났다. 아빠 품에 안겨있는 아이를 보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구긴, 네 언니가 외국에서 낳은 아이란다.”
이정은이 아니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단청아가 두 눈을 부릅 떴다.
“뭐?”
그녀가 계단으로 내려와 단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를 낳으면 낳는다고 미리 얘기라도 하지. 뭐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그렇지?”
“청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진이도 우리 가족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단준석이 불쾌한 표정으로 째려봤다.
그 장면을 본 이정은은 단하진이 미워죽을 지경이다. 손자 하나로 남편을 온전한 제 편으로 만들었고 딸을 대하는 태도까지 확 달라지게 만들었다.
“아빠. 난… 난 관심하는 거잖아요!”
단청아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
“자, 우진이. 외할아버지랑 정원에서 산책 좀 할까?”
단준석은 손자와 가까워지고 싶다.
단준석이 꼬마를 데리고 가자마자 단청아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상간녀라도 된 거야? 사생아지!”
단하진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돌변했다. 그때 단청아와 송예선이 제게 했던 일들, 그녀는 죽는 날에도 잊지 않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신경 꺼.”
단하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녀 특유한 강렬한 분위기는 전보다 더 세졌다. 그뿐만 아니라, 더 예뻐진 것만 같았다.
점점 더 좋아지는 그녀의 모습에 단청아는 질투가 솟구쳤다. 어릴 적부터 단하진의 미모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그녀다. 이 집에서 쫓아내기만 하면 낙백해질 거라 단정 지었던 그녀에게 제대로 한방 먹여준 단하진이다. 태연하고 우아한 기질, 흰 눈같이 뽀얀 피부 그리고 영롱한 몸매… 완벽 그 자체다.
아무리 봐도 아이를 낳았을 것 같은 여자가 아니다.
“단하진, 이 집에 무슨 의도로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경고할게. 수작 부리지 마. 이 집에서 네가 가져갈 수 있는 건 없어.”
이정은이 협박했다.
단하진이 피식 코웃음을 터뜨렸다.
“상관없다뇨? 아버지 회사 초창기 때 저희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투자했거든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누리는 주제에 뻔뻔하기도 하네요?”
“너…”
“단하진. 정신 차려. 5년 전에도 널 쫓아낼 수 있었던 나야. 지금이라고 못할 것 같아?”
단청아가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들이랑 상관없이 난 우리 아버지만 있으면 돼요. 나중에 회사를 어떻게 나누던, 그건 아버지가 결정하실 일이고 그쪽들이 걱정할 문제는 아닐 텐데?”
단하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정말 어처구나가 없었다.
“아들 데리고 와서 한몫 더 챙기려나 본데, 꿈도 꾸지 마.”
이정은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 아직 멀쩡한데 왜 입만 뻥끗하면 재산, 유산이지? 뭐, 우리 아버지가 빨리 죽기라도 바라는 건가? 앞으로 아버지를 더 챙겨드려야겠네. 건강하게, 오래오래 앉을 수 있도록! 두 사람이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지 못하게.”
단하진이 말했다. 모녀가 사랑 그리고 관심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돈을 탐내는 것이 분명하다.
“너…”
팩트 폭행에 이정은은 말문이 막혔다.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체면을 살리려 입을 열었다.
“내 남편이야. 당연히 오래 살길 바라지.”
단청아도 다급히 말했다.
“단하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엄마보다 더 아빠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
단하진이 소파에 털썩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두 사람을 외면한 채로 그녀는 핸드폰에만 집중했다.
도우미는 맛난 음식들로 식탁을 가득 채웠다. 단준석은 도우미더러 아이가 먹기 좋은 음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단준석이 단우진을 바라보는 그 애틋한 표정 때문에 이정은과 단청아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다. 단하진이 아들 덕 보고 다시 단준석의 사랑을 받을 게 뻔했다.
“하진아, 무슨 일하고 있나?”
단준석이 물었다.
“외국에서 주얼리 디자인 공부를 했었어요. 지금은 디자이너로 바이에가에서 출근하고 있습니다.”
단준석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단해. 바이에가 유명하지.”
“아빠, 나도 일자리 찾고 있잖아! 모델 면접 보고 있어.”
단청아가 뒤질세라 말했다.
“그것도 무슨 직업이라고? 망신 나기 전에 당장 그만둬.”
단준석이 엄격한 눈빛으로 단청아를 혼냈다.
“여보. 모델이야 청아가 재미 삼아 하는 일이지. 앞으로 당신 회사에 출근할 건데.”
이정은이 딸의 편을 들어 말했다.
“나 참! 그 정도 능력 갖고 내 회사에서 뭘 한다고 그래? 프런트 직원 한대?”
단준석이 개의치 않은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단청아는 단하진이 미워서 죽을 지경이다. 그녀 앞에서 저의 무능력함이 처절하게 드러났다.
“외할아버지. 우리 엄마 엄청 대단해요. 엄마 디자인이 전국적인 대회에 참석하게 됐어요!”
단우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단준석의 얼굴에도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정말? 엄청 대단하네! 우진아, 오후에 할아버지랑 나갈래? 할아버지가 선물 사줄게. 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
“네! 고마워요, 외할아버지!”
꼬마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단하진은 아버지가 아들을 이렇게나 이뻐할 줄 예상 못 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은 큰 위안이 됐다.
그와 반대로 이정은과 단청아는 꼬마를 보면 볼수록 짜증이 났다. 어린 것이 어찌나 약삭빠른지.
식사가 끝난 뒤, 단하진은 아버지의 차에 앉아 별장을 떠나 근처에 있는 쇼핑몰로 향했다. 단준석은 외손자 선물에 아낌없었다. 몇십만 원짜리 로봇이며 레고며 눈도 깜빡하지 않고 결제를 했다.
“아버지, 사지 마요. 애 버릇 들어요.”
단하진이 아버지를 말렸다.
“알았다, 알았다. 이것만 사고. 며칠 이따 또 사면 되지.”
단준석은 제 마음을 표현하기에 한참 부족하다 여겼다.
“외할아버지, 그만 사줘도 돼요. 이미 충분해요.”
꼬마는 철이 들었다.
그 말을 들은 단준석은 더더욱 애틋한 눈빛으로 꼬마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꾸 봐도 이쁘기만 했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단하진은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딸이 지내고 있는 오피스텔을 보고 나니 단준석은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몇 년간 순탄하게 보냈고 회사도 성장해 꽤 많은 돈을 거뒀다. 이제 큰 딸을 보상해 줄 때가 되었다.
아버지를 보내고 단하진이 아들을 품에 안고 말했다.
“우진아, 외할아버지가 너 많이 좋아해.”
“나도 외할아버지가 좋아요.”
단우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볼이 빵빵해지더니 물었다.
“엄마, 그럼 나 이제 알려주면 안 돼요? 우리 아빠 어디 있어요?”
단하진이 흠칫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아들에게 말했다.
“우진아. 엄마도 아빠가 어디 있는지 몰라. 어쩌면 절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어. 어쨌거나 변하지 않는 건, 엄마가 늘 우진이 옆을 지켜주면서 사랑해 줄 거야.”
꼬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고를 들었다.
“난 그럼 이거 놀러 갈게요!”
“그래!”
단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 앉아 포장을 뜯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빠를 찾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단청아나 송예선에게 그날 밤 그 남자가 누군지 물어보면 끝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술집 남자라고 했었다. 아들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 아빠가 술집 남자라는 것을.
관두자. 그녀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까지 아들을 좋아해 주니 더더욱 기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