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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악독한 송예선

  • 이은미의 기침 소리와 함께 회의가 시작됐다.
  • “네. 오늘 회의 주제는 이번 대회 해당사항이고요. 우선 참석 자격을 얻은 두 디자이너 이안 그리고 단하진, 축하해.”
  • 고개를 든 단하진은 도발적인 표정을 지은 이안과 두 눈을 마주쳤다. 이번 대회에서 선출되면 회사에선 어마어마한 상금을 챙겨줄 것이 분명하다. 이건 이익이 걸린 경쟁이다.
  • 곧이어 이은미는 이번 대회의 경쟁상황에 대해 분석했다. 풍부한 경력을 자랑하는 총괄 디자이너로서 작품에 엄청난 신심을 갖고 있다.
  • 책상을 바라보고 있던 단하진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앉은 위치로 봐서는 서준표가 틀림없다.
  • 이 남자는 정말 한가한 건가? 왜 하루 종일 쳐다보는 거야?
  • 어머니는 그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솔직히 말하면, 꼴도 뵈기 싫다. 겨우 다섯 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 탓할 수는 없지만 단하진은 늘 원한을 갖고 있었다.
  • “하진. 네 생각 얘기해 봐.”
  • 이은미가 갑자기 그녀를 지목했다.
  • 딴 생각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단하진인데 이은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지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은미를 바라봤다.
  • “음… 본부장님,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 이은미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감히 제 회의에서 딴 생각을 하다니?
  • “단하진. 본사에서 파견한 디자이너여도 지나친 자신은 오만이야. 나는 안 중에도 없는 건가? 아까 내가 한 말들 하나도 귀에 담지 않았다 이거지!”
  • 이은미는 일반 캐릭터가 아니다. 그녀는 단하진에게 혼쭐을 내주리라 작심했다.
  • 다른 디자이너들은 재밌는 구경 하듯 그녀를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에 단하진은 낯이 뜨거워졌고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스럽던 때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작품의 구매력이 뭡니까.”
  • 서준표가 말했다.
  • 전문 분야라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 “이번 작품은 상감으로 가장 적합한 백금을 사용했고 덤으로 로듐, 팔라듐 원소를 사용해 훨씬 훌륭한 광택도, 경도 그리고 내성을 완비했습니다. 제품 특성으로는 희귀함 고귀함 그리고 가치 유지 가능하고요. 온정성이 좋아 색감 유지가 보장됨으로 수장하기에 적합합니다. 그래서 저는 수장을 흥취 삼거나 사치품 구매를 즐기는 사람들을 목표 고객으로 설정했습니다.”
  • 얘기를 마친 단하진이 맞은 켠에 앉은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고, 당황함에 즉시 눈을 피했다.
  • “그냥 비싼 거네!”
  •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 “난 너랑 다르거든. 디지털 시대인 지금, 사람들에게 보이는 새로운 사물들은 너무 많죠. 그러다 보니 취향이나 심미는 아주 빠른 속도로 바뀝니다. 제 작품은 시대에 걸맞은 디자인을 선호함으로써 지금 이 시장에 더더욱 적합할 겁니다.”
  • 단하진이 입꼬리 씩 올렸다.
  • “각자 특색이 있는 거지.”
  •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서준표는 들으러 온 것뿐 제 의견에 관해 지나치게 얘기하지 않았다.
  • “그래요 그럼. 회의는 이만 끝낼게요.”
  • 이은미가 선포했다.
  • “단하진 씨는 남고, 나머지 분들은 일 보세요.”
  • 서준표가 뜬금없이 말했다.
  • 물로 목을 축이려던 단하진이 그 얘기에 물을 뿜을뻔했다. 질투의 시선들이 또다시 그녀를 감쌌다. 특히 이안, 그녀는 원한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단하진을 째려봤다.
  • 마치 그녀가 무슨 수단으로 서준표를 꼬시기라도 한 듯 말이다.
  • 단하진 역시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 이 남자는 지금 회사에서 제 처지가 어떤지 눈치를 못 채는 건가? 이미 다른 사람들한테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중인데, 왜 굳이 이런 오해를 만드는 걸까?
  •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 단하진이 의자에 기대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 “무슨 일이에요?”
  • “어제 내가 선물한 아파트, 왜 안 받았습니까?”
  • 서준표가 눈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 “준다고 제가 받아야 하나요? 말했죠. 서가의 호의, 받지 않을 거라고.”
  • 단하진이 또 한 번 강조했다.
  • “아들 생각해야죠. 내가 고른 아파트, 기초시설이 아주 완벽해요. 아파트 안에 귀족 유치원이 설립되어 있고 안정성이 보장되고 있어요. 아이 데리고 생활하기 아주 적합한 곳입니다.”
  • 서준표는 고귀한 대표 신분을 내려놓고 아파트 판매원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 꽤 유혹적인 조건이다. 특히나 엄마인 단하진한테는. 아들에게 최고의 교육과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게 그녀가 가장 원하는 일이다.
  • “됐어요. 아들한테 진짜로 필요한 게 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나예요.”
  • 사업가인 서준표가 하는 말에 단하진이 동의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정말로 중요한 건 돈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이다.
  • 함께라면 거주 조건이 그다지 좋지 않아도, 산진해미를 맛보지 못해도 행복하다.
  • 서준표의 미간이 뒤틀렸다. 온몸을 가시로 무장한 여자 앞에서 어쩔 바를 모르는 남자다.
  • “그리고 앞으로 회사에서 일 때문이 아니라면 저 찾지 마세요.”
  • 단하진이 제 얘기를 끝내고 자료를 손에 쥐고 떠났다.
  • 오후, 단하진이 아버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내일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자며 보고 싶다고 했다.
  • 단하진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집에 한번 가봐야 하긴 했으니까.
  • 사무실.
  • 서준표는 우아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실장의 보고를 듣고 있다.
  • “단하진 아들의 아빠에 대해서 조사해.”
  • 물질적인 것으로 그녀를 움직일 수 없다면 다른 방도를 생각해 보는 수밖에 없다.
  • “네.”
  • 주호는 바로 조사를 시작했다.
  • 그리고 그때, 서준표의 핸드폰이 울렸다. 송예선이다.
  • “여보세요.”
  •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준표, 일 바빠? 저녁에 같이 밥 먹으면 안 될까?”
  • “그래. 내가 예약할게.”
  • 서준표는 동의했다.
  • “그럼 기다릴게.”
  • 전화 너머로 송예선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았어.”
  • 전화를 끊은 서준표의 머릿속엔 송예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송예선에게서 그날 밤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흐릿해진 기억으로 그날 밤을 되돌려보면 지나치게 부드럽던 입술 그리고 은은한 그녀의 향기가 떠오른다. 내내 울음소리뿐이었지만 가슴 울리는 아련한 보이스였다. 반면, 송예선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날카롭다.
  • 5년, 그 사이에 사람이 변하기 마련이다. 지금 서준표는 그녀를 보상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날 밤이 그녀의 인생에 만회할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을 테니까.
  • 고급 레스토랑.
  • 송예선은 샤넬 신상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고가의 화장품 그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힘으로 평범한 그녀의 얼굴을 업그레이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송예선은 놀란 만큼 이쁘지 않았다.
  • 그녀는 외적으로 평범한 스타일이다. 못생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쁘지도 않다.
  • 하지만 오늘 밤,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최상급 남자는 잘생기고 젠틀하고 매력적이고 황제 같은 분기를 뽐내고 있다.
  • “준표. 건베.”
  • 송예선이 주동적으로 잔을 들었다. 사모하는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제 3주가 되는 시간을 알고 지냈지만 서준표는 늘 그녀에게 예의를 갖추고 있다.
  •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다. 그녀는 간절히 이 남자를 원하고 있고 함께 밤을 보내고 싶고 또 그의 아내가 되고 싶다.
  • 지금 소유한 것들 때문에 송예선은 더더욱 겁이 났다. 아니, 이 모든 걸 잃게 될까 끔찍하다.
  • 재벌이 되는 기분이 너무 좋다. 원하는 물건이 뭐든 곧바로 눈앞에 나타났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샤넬 신상 제품들은 직접 고를 수 있도록 집으로 배송된다. 원하는 가방은 색깔별로 챙길 수 있고 다이아몬드나 주얼리는 더더욱 원하면 다 가질 수 있다.
  • 이런 기분은 마치,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번 생엔 절대 추락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