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단청아는 SPA를 받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통화가 끝나자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송예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단하진의 결백을 더럽히고 가문에서 쫓겨나게 만들었다. 그 후로 그녀는 송예선과 좋은 친구가 됐다. 다만 요즘 들어 송예선의 연락이 뜸해졌고 스튜디오도 문을 닫았다고 했다. 요즘 뭘 하고 지내는지 알수 없었다.
전화 너머로 송예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청아야.”
“예선아, 요즘 뭐해? 스튜디오는 왜 닫았어?”
“어! 나… 나 여행 중이야! 무슨 일 있어?”
“예선아, 나쁜 소식 하나 있어. 단하진이 귀국했대.”
럭셔리한 별장 안, 소파에 누워 도우미의 마사지를 받고 있던 송예선이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소파에 떨궜다. 그녀는 급히 핸드폰을 주어 숨을 고르고는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돌아왔어? 왜 귀국했대?”
“왜 이렇게 겁먹었어? 걔가 무섭기라도 해?”
“아니. 그게 아니라. 궁금해서.”
“아빠가 얘기해 줬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나랑 재산 싸움하려고 돌아온 것 같아. 너한테 찾아갈 수도 있겠다 싶어서.”
송예선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단하진이 왜 외국에서 죽지 않았을까? 그럼 이렇게 겁이 날 일도 없는데.
지금 그녀가 누리고 있는 전부가 단하진의 덕이다. 그때 그 여자가 단하진이었다는 사실, 죽어도 서준표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
“청아야. 나도 걔가 나한테 복수할까 봐 무서워. 앞으로 일거수일투족 다 나한테 알려줘, 응? 나도 미리 준비 좀 하게.”
송예선이 말했다.
단청아가 대답했다.
“그래. 같이 이겨보자고.”
전화를 끊고 나서도 불안감에 휩싸인 송예선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의 그녀는 재벌가 아가씨나 마찬가지다. 먹는 것, 쓰는 것 전부 최상급으로 준비되어 있고 서준표는 보상하기 위해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줬다. 하지만 송예선의 욕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물질적인 보상으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서준표의 아내가 되길 바랐다.
서준표 같은 남자의 여자가 된다는 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단하진이 제 계획에 흠이 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단청아도 냄새를 맡아서는 안 된다. 분명히 저를 질투해 진실을 까발릴 것이니까.
단하진의 일거수일투족을 장악해야만 한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을 이용해 그녀를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
다섯 시, 단하진은 제시간에 유치원 앞에 나타났다. 꼬마는 환한 미소로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엄마.”
“학교 재밌어?”
“재밌어요. 선생님도 나를 좋아하고, 친구들도 나를 좋아해요.”
꼬마가 흥얼거리며 말했다.
“저녁에 국수 어때?”
“좋아요!”
단하진은 천사 같은 아이가 태어났음을 행운으로 느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속을 썩인 적도, 음식을 거른 적도 없었다. 성격도 좋고 따뜻한 남자아이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꼬마는 레고를 맞추고 있었고 단하진은 2인분의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아늑한 오피스텔엔 사람 냄새로 가득 찼다.
“엄마, 오늘 출근 어땠어요?”
꼬마가 물었다.
“괜찮았어.”
단하진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들 앞에서 인생 그리고 일에 대한 불평불만을 단 한 번도 늘어놓은 적 없던 그녀다. 삶이 고달프고 가끔은 무너지게 만들어도 아들의 달콤한 미소는 모든 걸 괜찮아지게 만들었다.
“우진아, 며칠 이따 외할아버지 만나러 갈까?”
단하진이 아들 단우진에게 물었다.
“네. 우진이도 외할아버지 만나고 싶어요.”
꼬마가 기대에 찬 얼굴로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이정은 모녀가 무조건 제 아들을 반기지 않을 거란 생각에 단하진은 착잡했다.
5년 전 그 뜻밖의 상황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걸 단청아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한테 사랑하는 남자와 낳은 아이라고 말할 것이다.
저녁, 단하진은 아들을 껴안고 잠들었다. 창밖의 아련한 달빛이 두 사람을 비췄고, 모자는 서로 기댄 채로 꿈나라로 향했다.
아침.
아들을 유치원으로 보내고 난 뒤, 단하진은 택시를 타고 회사에 도착했다. 바이에가는 시중심에 있는 8층짜리 빌딩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바로 옆에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건물 앞에서 바이에가는 어쩔 수없이 아연실색해진다.
하지만 바이에가는 국내에서 엄청난 유명세를 떨쳤다. 현재 QR에게 인수 당함으로 그 가치가 더더욱 상승했으며 한 달 뒤 바이에가는 국내의 주얼리 쇼에 초대될 것이다.
단하진이 디자인했던 몇 개의 작품 시리즈도 쇼에 참석하게 되었고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아침을 사느라 시간을 많이 낭비한 단하진은 손에 있는 빵을 먹으면서 택시비를 물었다. 그러고는 택시에서 내려 걸음을 빨리 움직여 로비로 향했다.
아들은 8시 반에 등교를 하고 그녀는 9시에 출근한다. 시간이 너무나도 빠듯하다.
엘리베이터 입구.
직원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단하진은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엔 다 먹으려고 했다. 꽤 많이 남았음에도 그녀는 억지로 빵을 전부 입에 넣었다.
볼이 빵빵 해져서 우걱우걱 씹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준수하고 세련된 그림자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잠시 경직됐던 단하진이 간신히 빵을 목구멍으로 집어삼켰고 최대한 우아한 모습으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서준표가 중저음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단하진이 대답했다. 그리고 일초 뒤, 그녀는 제 우렁찬 트림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꺽!”
소리가 엄청났다.
단하진의 얼굴은 순간 새빨개졌다. 하지만 정말 목이 멨다.
그보다 더 최악인 건 엘리베이터의 벽은 거울로 되었다. 그녀의 추한 모습은 그대로 보였고 당황함에 급기야 입을 틀어먹었지만 몸이 급하게 먹었던 그녀에게 항의라도 하듯이 또 한 번의 그다지 우아하지 않은 트림을 올려보냈다.
서준표의 그윽한 시선은 거울을 통해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단하진은 민망함을 무릎 쓰고 그의 “관람”을 견뎌내고 있다.
드디어 6층에 도착했고, 단하진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쪽팔려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하느님이 정성껏 만들어 놓은 서준표의 차분한 얼굴에 웃음기에 번졌다.
재밌는 여자다.
사무실에 돌아온 단하진은 물을 몇 잔이나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트림을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쪽팔렸던 기억은 만회할 수 없다.
다른 남자였더라면 민망하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서준표다.
분명 저를 비웃었을 것이다.
10시 반.
“하진 언니, 부서 회의 시작해요.”
단하진이 대답했다.
“알았어.”
회의실.
총괄 디자이너 이은미가 회의실 한편에 앉아있다. 그녀의 밑으로 단하진을 포함한 여덟 명의 디자이너가 있다.
“좀만 기다리자. 서 대표님 참석하신대.”
이은미가 물 한 모금 마셨다. 어깨를 으쓱이는 게 조금 긴장한 모습이다.
고작 부서 회의까지 대표가 참여할 줄이야? 그녀는 부담이 컸다.
“단하진, 서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야?”
이안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단하진을 바라봤다.
단하진이 단칼에 부정했다.
“몰라.”
“모르는데 서 대표님이 왜 어제 그렇게 빤히 쳐다봤대?”
다른 여자 디자이너가 불만을 터놓았다.
“그 문제는 서 대표님한테 물으시고.”
단하진이 우아하게 응대했다.
“일은 일이야. 회사, 너희들 연애나 하라는 곳 아니고 쉬운 길 찾는 곳도 아니야. 똑똑히 기억해들.”
이은미가 엄격한 목소리로 아랫사람에게 경고했다.
이안이 단하진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가 봤을 때 단하진이 그런 사람이다. 서준표라는 지름길을 이용하려는 여자.
바로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기품이 서리고 위엄이 넘치는 그림자가 보였다.
서준표가 우아한 움직임으로 가장 자리에 앉았다. 이 남자를 보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알 수 있다.
부가 나라를 견줄 만한 재부, 인간과 신의 공분을 일으키는 예쁜 얼굴, 로마 신화의 아폴로 뺨치는 완벽한 바디라인, 왕자같이 우아한 기질 그리고 한 나라의 왕 같은 위엄 모두 그가 소유한 것들이다.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 여자들은 연모의 마음을 참을 수 없다.
이은미마저도 급히 머리를 정돈해 여자들 특유의 온유함을 과시하려 했다. 서른다섯이지만 재벌가에 시집을 가는 로망을 갖고 있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