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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다음을 기대하는 거야?

  • 나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사실 긴장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손바닥에서는 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그저 그가 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에 넘어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 내가 원나잇을 즐기는 척한 것은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입술을 핥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 왠지 내가 속은 느낌이 들었다.
  • “가야겠어.”
  • 그의 손을 내린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정말 떠나야 할 때였다.
  • “데려다줄까?”
  • 그도 일어나 앉더니 침대의 다른 쪽으로 내렸다. 나를 등진 그의 등에는 기다란 생채기가 나 있었다. 내가 남긴 흔적인 듯했다.
  • “당신은 손톱으로 날 할퀸 첫 번째 사람이었어.”
  • 그는 나를 돌아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봄바람같이 따스한 얼굴로 말했다.
  •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봄바람이 아닌 꽃밭으로 날아 들어간 꿀벌일 뿐이었다.
  • “할퀸 게 아니야.”
  • 나는 애써 변명했다.
  • 그가 피식 웃었다.
  • “그럼 뭐야?”
  • 난… 할 말이 없었다.
  • “정당방위였어. 날 아프게 했잖아.”
  • 그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 “당신이 너무 조여서 그랬어.”
  • “왜 당신 거가 너무 크다고는 하지 않아?”
  • 나도 모르게 이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말을 마친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후회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날 얼마나 방탕하게 보겠는가?
  • “소국진이 당신에게 큰 충격을 주었나 봐.”
  • 그는 말 한 마디로 내가 한 짓을 그의 친구이자 내 남편의 바람에 뒤집어씌웠다.
  • 그는 진작부터 소국진이 바람난 것을 알고 있었다. 참 끼리끼리라더니. 이렇게 방탕한 친구가 있는데 내 남편이 어떻게 지고지순한 남자겠는가? 나도 참 눈이 멀었었다.
  • 그러나 난 후회가 되어 질문했다.
  • “왜 말을 안 했어?”
  • 그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단추를 잠그더니 말했다.
  • “뭐라고 말하라는 거야? 소국진이 내 후배와 붙어먹은 걸? 아니면 당신을 데리고 현장을 잡으러 갔어야 하나?”
  • 난 말문이 막혔다.
  • “가.”
  • 그는 내가 말이 없자 내 손을 잡았다.
  • “데려다줄 필요 없어.”
  • 나는 그를 밀치며 문을 나섰다.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원나잇일 뿐인데 깊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
  • 그도 쫓아오지 않았다.
  • 난 약국으로 가서 피임약을 사서 급히 먹었다. 그제야 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 집으로 돌아와 보니 소국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밤새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문자도 보내지 않을 것을 보니 참 걱정도 없나 보다.
  • 난 커튼을 치고 잘 준비를 했다. 이때,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주동욱이었다.
  • “커튼을 왜 쳐? 내가 훔쳐보는 것도 아니고. 뭐 이미 볼 건 다 봤지만.”
  • 난 깜짝 놀라 다급히 커튼을 젖히고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길가에 정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 주동욱? 정말 날 미행한 건가?
  • “앞으로 약 같은 거 먹지 마. 내가 콘돔 사용할게.”
  • 휴대폰이 다시 한 번 울렸다. 난 입가를 실룩거렸다. 뭐라고? 다음번? 지금 다음을 기대하는 거야?
  • 차가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동욱이었다.
  • 나는 휴대폰 화면에 손가락을 멈춘 채,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화기록을 지웠다.
  • 여기까지가 딱 좋았다.
  • 이튿날 아침, 밥을 먹고 있는데 소국진이 물었다.
  • “어젯밤 어디로 갔던 거야?”
  • 난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여 하마터면 숟가락을 놓칠 뻔했다. 그가 무슨 눈치라도 챈 줄 알았던 것이다.
  • 그러나 내가 힐끗 훔쳐봤을 때, 그는 느긋하게 신문을 펼치고 있었다.
  • 순간, 나는 더없이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원나잇 상대도 내가 밤에 혼자서 집에 가다 위험에 처할까 봐 따라오며 날 지켜보았는데 사랑하는 남편이 이토록 무관심하다니.
  • 난 쓴웃음을 지으며 대충 넘겼다.
  • “친구랑 스파 다녀왔어.”
  • 그는 멍청한지,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지 전혀 의심하지 않고 ‘응’이라고만 했다. 그러고 다른 말은 없었다.
  • 결혼한 지 이 년 된 나는 이런 말없는 상황에 익숙했다. 그래서 식탁을 치우고 일어나려고 했다.
  • 바로 이때, 어깨가 눌리는 느낌이 들더니 난 도로 앉게 되었다.
  • 고개를 들자 하얀색의 모습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