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8화 선우예슬의 아버지

  • 선우 댁은 썩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이씨 할멈을 노려보았다.
  • “얼른 가서 의원을 부르지 않고 무엇 하느냐? 장 어멈이 피 흘리며 죽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냐?”
  • 이때 마침 의원이 도착했다.
  • 홍연은 회색 옷차림의 삐쩍 마른 중년 남자 한 명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어깨에 약상자를 메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 안으로 들어오더니 장 어멈을 발견하고 한숨을 들이쉬었다.
  • “이토록 심하게 다쳤사옵니까?”
  • “그 년이 아니라 안에 있는 계집을 치료하거라.”
  • 봉효진의 다그침에 의원은 그제야 마당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챘지만 커다란 저택에 괴이한 일들이 한두 가지도 아닌지라 감히 묻지 않았다.
  • 홍연은 봉효진의 매서운 감시하에 의원과 함께 해월이를 치료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단장초즙의 독은 쉽게 해독할 수 있었는데 침을 몇 대 놓고 백초단 두 알을 복용하니 금세 해독되었다.
  • 의원이 약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오려 하자 봉효진은 소매에서 주머니를 꺼내어 그에게 은을 한 냥 쥐여주었다.
  • “이젠 가도 된다.”
  • 의원은 다소곳하게 받고 이내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선우 댁에게 가로막혀버렸다.
  • “잠깐, 이 사람도 피를 멈추게 해주거라.”
  • 의원이 다가가려 하자 채찍 소리가 허공에 휘날렸다.
  • “누구도 저년에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 의원은 깜짝 놀라서 봉효진의 음침한 표정을 바라보더니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허겁지겁 손사래 치며 자리를 떠났다. 선우 댁은 조급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 “너 진짜 미쳤구나. 의원이 왔는데도 구하지 못하게 하다니, 진짜 죽일 셈이냐? 장 어멈이 죽으면 너도 살인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야.”
  • 봉효진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그러거나 말거나요.”
  • 그 뒤로 그녀는 누군가 장 어멈에게 접근하기만 한다면 재빨리 채찍을 휘둘렀다. 장 어멈의 숨결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그녀는 서서히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 적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은 자신을 잔인하게 괴롭히는 것과 별다를 게 없다는걸 봉효진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또한, 그녀는 선우 댁이 장 어멈에게 독을 타라고 지시한 게 아니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온전히 장 어멈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 때문에 봉효진도 마음을 굳게 먹고 그녀를 죽인 것이다.
  • 사람에게 지시를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주인을 해치는 건 죽는 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단장초즙이 기승을 부리고 진짜 아프기 시작하면 혀를 깨물고 벽에 부딪칠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녀가 해월이의 혈 자리를 제때 닫지 않았더라면 해월이는 아마도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혀를 악물어버릴 게 뻔했다.
  • 해월이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봉효진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장 어멈도 이미 죽었는데 이 기회를 빌려서...
  • 봉효진은 천천히 몸을 돌리고 선우 댁을 노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 “이번 일은 정말 하늘이 저를 돕는 것 같네요. 부인께서는 장 어멈을 지시하여 저의 아침상에 독을 타고 저를 해치려고 했죠. 이 일이 관아에 퍼지게 된다면 사람들은 어쩌면 부인이 선우예슬을 위해 저에게 독을 탔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한문석은 그들의 삿대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선우예슬과 혼인을 하지 않을 거고요. 제 소원을 이뤄주셔서 정말 고맙네요, 부인.”
  • 선우 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독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 “여봐라, 셋째 아씨를 끌어내고 집안에 남은 음식을 모조리 버리거라.”
  • “부인, 그만하십시오. 고작 이 사람들로 저를 상대할 수 있겠사옵니까?”
  • 봉효진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걸터앉아 거만한 눈빛으로 호위무사들을 흘겨보았다. 호위무사들은 선 자리에서 꿈틀거릴 뿐 감히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보다 못한 집사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 “마님, 이 음식들을 절대 남기시면 안 됩니다. 장 어멈은 이미 죽었고 그녀는 마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옵니다. 독을 타라고 장 어멈에게 지시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번 일을 추궁한다면 마님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럴 바엔 국공 어르신이 관아로 간 지금, 장군을 저택에 불러오시는 건 어떻겠사옵니까? 일단 셋째 아씨를 제압한 뒤, 음식부터 버리고 봐야죠. 저희로서는 도저히 아씨에게 상대가 되지 않사옵니다.”
  • 선우 댁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
  • ‘현재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구나, 다만 국공 저택의 안채에서 벌어진 일에 오라버니까지 끌어들인다는 말이야? 만에 하나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꽤 불미스러울 텐데.’
  • 집사는 고민에 빠진 그녀를 눈치채고 계속 나지막이 속삭였다.
  • “조급해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누가 물어본다면 장군께서 예슬 아씨를 뵈러 왔다가 마침 이런 일을 마주쳤고, 셋째 아씨가 흉악하게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더니 장군께서 재빨리 나서서 제지하셨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독을 탄 일은 셋째 아씨도 아무런 근거가 없으신데 그때 가서 국공 어르신이 아씨를 믿을까요 아니면 장군을 믿을까요?”
  • 선우 댁은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 “네 말대로 해라. 어서 가서 장군과 예슬 아씨를 저택으로 모셔오너라.”
  • 쏜살같이 달려가는 집사를 바라보며 봉효진은 속으로 자신의 계획이 절반은 성공했다는 걸 짐작했다.
  • 장군 저택과 국공 저택은 고작 거리 세 곳을 사이 두고 있어 선우지석과 선우예슬은 곧장 자리에 도착했다.
  • 선우지석은 젊은 시절에 성문을 지키는 어린 장수였는데 공을 세운 뒤로 관직을 임명받게 되었다. 선우 댁은 원래 국공 저택에서 첩에 불과했고 규정상 첩은 정실이 될 수 없었다. 친정에 혹여나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정실로 될 가능성이 있었고 이에 안달이 난 선우지석은 공을 세운 뒤 곧장 여동생을 위하여 은혜를 구했다. 선우 댁은 그제야 국공 저택의 명실상부 안주인으로 등극했다.
  • 선우지석은 위풍당당했고 비록 용모가 어수룩하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사실 그가 매우 지독한 인간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 그의 수단은 지극히 악랄하고 매사에 인정사정없기로 유명했다. 상대가 설사 항복한다고 하더라도 싹 다 죽여버리고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 전생에 봉효진은 전장에서 그와 마주친 적이 있는데 그는 공적을 탐내고 무모하게 전진하며 자신의 공로를 티 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 방면에서 한문석과 아주 비슷했지만, 그는 진짜 실속이 있는 사람이었고 한문석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였다.
  • 애초에 사부님도 선우지석의 손에 죽임을 당했는데 그는 한 통의 밀고장으로 사부님의 명예를 산산조각내버렸고 한 자루의 기나긴 검으로 사부님의 심장을 가차 없이 찔렀다. 봉효진은 이 모든 걸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았지만, 사부님을 위해 복수할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 이토록 야심만만하고 비열한 수단을 가진 인간을 이번 일에 끌어들인다는 것은 지금으로서 다소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걸 봉효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지석은 곧 선우 댁의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아버지도 그와 손을 맞잡으려고 애쓰는 중인데 두 사람 사이를 반드시 이간질해 손을 맞잡지 못하도록 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야만 봉효진도 더는 누군가에게 제압을 당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위기를 무릅쓰고 값진 도전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 선우지석은 청색 비단포 차림에 장검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고 선우예슬은 그의 뒤에서 바짝 따라왔다.
  • 그의 두 눈은 장 어멈의 시체에 꼿꼿이 떨어졌고 어수룩한 얼굴에 경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우지석은 봉효진을 바라보며 천천히 검을 들었다.
  • “효진이 너 지금 사람을 죽인 것이냐?”
  • 그는 마치 사람 죽이는 일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인 것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 밑에 가려진 독사 같은 서늘한 눈빛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봉효진은 어쩌면 그를 믿었을 것이었다.
  • “오라버니.”
  • 선우 댁은 선우지석을 보더니 긴장했던 표정을 풀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 “저 아이를 어서 끌어내세요. 안에 있는 아침밥도 지금 바로 처리해야 합니다.”
  • 선우예슬은 장 어멈의 시체를 보더니 깜짝 놀라서 선우지석의 뒤로 물러섰지만 눈 밑에는 오히려 독기가 어렸다.
  • “아버지, 언니가 사람을 죽였어요. 저러다가 고모도 죽일 것 같아요. 어서 가서 언니를 제지해요. 잘못을 저지른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다고요.”
  • 봉효진은 채찍을 쥐고 있었고 마침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나의 제자 봉효진’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봉효진은 문구를 어루만지며 다짐했다.
  • ‘사부님, 전생에는 이 제자가 사부님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드리지 못했지만, 이번 생에는 절대 저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선우 집안의 사람이라면 단 한 명도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 선우지석은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았다.
  • “효진아, 나는 너의 외삼촌이기에 네가 사람을 죽이는 꼴을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단다. 만약 그랬다간 무슨 면목으로 네 아버지를 본단 말이냐.”
  •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시죠!”
  • 봉효진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 “저희 아버지는 아직 건재하신데 당신 따위가 어딜 감히 국공 저택의 안채에서 벌어진 일에 간섭하려고 해요?”
  • 그는 장검을 빼 들었다. 비록 집사가 와서 보고할 때 봉효진이 무술을 안다고는 했지만 선우지석은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낱 여인 주제에, 게다가 촌구석에서 자라온 사람이라 기껏해야 힘이 좀 세고 권법을 조금이나마 터득했을 뿐이라고 쉽게 생각한 것이다.
  • 국공 저택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이유도 이상할 게 없었다. 국공 저택은 주인부터 노비까지 하나같이 물러터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