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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다음 생에도 기대하지 마!

  • 경중, 한 시진 후 초인은 그 문지기 병사를 데리고 왔다.
  • “국공 나으리께 인사드리옵니다!”
  • 살짝 당황한 병사는 봉국공을 보자마자 재빨리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 봉국공은 온화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부른 거니까 두려워할 것 없다. 너 이름이 무엇이냐?”
  • “나으리께 아뢰온데 소직 양규성이라 하옵니다.”
  •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봉국공의 얼굴은 여전히 다정하였지만 두 눈에는 어두운 빛이 감돌았다.
  • “오늘 성문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 양규성은 살짝 머뭇거렸다.
  • “그게... 소직은 아무것도 보질 못했사옵니다.”
  • “널 탓하지 않을 터이니 사실대로 고하면 된다.”
  • 봉국공은 그를 자리에 앉히고 술 한 잔을 따라주었다.
  • 앉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준 술도 마실 수 없었던 양규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 “소직을 탓하지 말아주시옵소서, 국공 나으리. 국공 저택의 셋째 아씨께서 한 사내와 함께 성문을 나갔사옵니다. 그리고 셋째 아씨께서... 그 사내의 품에 안겨 있는 걸 소직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사옵니다.”
  • 봉국공의 눈빛이 살짝 싸늘해졌다.
  • “그 여인이 나의 여식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 그러자 양규성이 대답했다.
  • “소직 전에 선우 장군님 옆에 있었을 때 장군님과 함께 국공 저택에 간 적이 있사온데 그때 셋째 아씨를 한 번 뵌 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 봉국공은 외마디 대답을 하고는 이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본 적이 있었다면 그럼 엄청 많이 닮았다는 게로구나. 네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야. 나의 여식은 지금 저택에 있고 밖을 나간 적이 없느니라.”
  • 깜짝 놀란 양규성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그 뜻을 알아챘다.
  • “네, 소직이 아무래도 눈이 어두워 잘못 본 것 같사옵니다. 국공 나으리, 제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 “모르고 그런 것이니 죄는 아니니라!”
  • 봉국공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자 초인이 그의 손에 엽전을 쥐여주었다.
  • “이건...”
  • 몰래 안을 들여다보니 엽전 백 냥이었다. 깜짝 놀란 양규성은 순간 두 눈이 동그래졌다.
  • 봉국공이 웃으며 말했다.
  • “이걸로 가서 병사들하고 거하게 술이나 마시거라. 하지만 술을 마셨다면 어디 가서 헛소리를 하면 아니 되니라. 그리고 바로잡아야 할 진실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 그러자 양규성은 재빨리 엽전을 받고 간사스럽게 말했다.
  • “국공 나으리, 걱정 마시옵소서. 소직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사옵니다.”
  • “그럼 가보거라!”
  • 봉국공이 웃으며 보내자 양규성은 재빨리 읍하며 나갔다.
  • 초인이 문을 닫고 돌아서자 화가 잔뜩 난 봉국공의 얼굴이 보였다.
  • “국공 나으리, 이 정도로는 입을 막기에 어려울 듯 하옵니다.”
  • 초인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졌고 게다가 그때 당시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직접 보고 들은 이가 적지 않았다.
  • 봉국공은 이마에 핏줄까지 세우며 화를 냈다.
  • “당장 사람을 보내서 잡아오너라.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그 불효 자식을 잡아오도록 하거라.”
  • “알겠사옵니다!”
  • 명을 받든 초인은 그대로 그들을 쫓아갔다.
  • 초인이 떠난 후 봉국공은 눈빛에 담긴 분노를 가리려고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귓가에는 그날 효진이가 했던 결연한 말들이 계속 맴돌았다.
  • ‘효진이가 도망을 갔다고? 아무런 낌새도 없었거늘. 설마 청주로 돌아간 건가?’
  • 그날 밤 봉국공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선우 댁은 엉엉 울며 그를 맞이하였다.
  • “국공 나으리, 이게 다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저의 잘못이옵니다.”
  •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선우 댁까지 옆에서 울며불며 난리를 치자 봉국공은 싸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 “부인의 마음에 효진이가 있긴 있었소? 부인이 효진한테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오.”
  • 그러자 선우 댁은 계속 울면서 잘못을 뉘우쳤다.
  • “다 제 잘못이옵니다. 효진이가 청주에서 온 뒤로 계속 절 좋아하지 않으니 모녀 사이가 어색한 건 어쩔 수가 없사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저한테 얘기하지 않았지요. 요즘은 조용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이런 망측한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사옵니까? 어쩐지 평소와 다르다 했더니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지요.”
  • 방으로 들어가는 길 내내 선우 댁의 하소연에 마음속의 화가 점점 더 치밀어 올랐던 봉국공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상을 탁 쳤다.
  • “효진이를 따라다니던 계집종은 뭐라 하였소?”
  • 그러자 선우 댁이 대답했다.
  • “그 천한 년은 처음에는 죽어도 입을 열지 않다가 고문을 하니까 사실대로 고했사옵니다. 효진이는 작년 연말부터 그 서생과 알고 지냈고 두 사람은 서로 첫눈에 반하여 진작에 혼인을 약조한 사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그 천한 년이 고하길 효진과 서생은... 오래전에... 오래전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하옵니다... 어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옵니까? 그렇게 입을 열 때마다 예슬이를 뭐라 하더니만...”
  • 선우 댁의 말에 봉국공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면서 어찌 제후 저택과의 혼인을 약조했단 말인가! 봉국공과 강녕 제후 어르신의 관계가 그녀 때문에 이대로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 “그 계집종을 데려오너라!”
  •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 봉국공은 마치 포효하듯 큰소리로 외쳤다.
  • 선우 댁은 이씨 할멈더러 해월이를 데려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해월이가 끌려왔다.
  • 세게 얻어맞은 바람에 숨이 간들간들하였다. 온몸에는 핏자국이 가득하였고 손가락도 퉁퉁 부어 피가 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심한 고문을 당한 게 분명했다.
  • 이씨 할멈은 핏자국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내려치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 “국공 나으리께서 너한테 물어볼 것이 있으니 넌 그저 사실대로만 고하면 된다.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 이씨 할멈의 말에 해월은 순간 움찔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에 가려진 두 눈을 천천히 뜨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고는 퉁퉁 부어올라 검자주색이 된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
  • “소인... 소인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 “모른다고?”
  • 그러자 이씨 할멈은 또 뺨을 한 대 내려치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날카롭게 말했다.
  • “방금 내가 한 얘기를 그새 잊은 것이냐? 국공 나으리 앞에서 거짓을 고하면 아니 되고 셋째 아씨를 위해 사실을 숨겨서도 아니 된다.”
  • 해월이 울음을 터뜨렸다.
  • “소인 잘못했사옵니다. 소인... 소인이 셋째 아씨더러 그 서생과 함께 가라고 부추겼사옵니다. 셋째 아씨는 가기 싫어하셨사옵니다...”
  • 이씨 할멈의 두 눈에 무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선우 댁은 몰래 손을 움직이며 아무 얘기도 하지 말라는 눈치를 주었다.
  • 화가 잔뜩 난 봉국공은 그대로 해월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해월은 너무도 아파 그대로 몸을 움츠렸고 숨도 쉬기 어려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고른 해월이 이렇게 말했다.
  • “나으리...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 “이 계집종을 일단 가두어 놓고 불효 자식이 돌아오면 그때 다시 죽이거라!”
  • 봉국공이 화가 나 파래진 얼굴로 명령을 내리자 이씨 할멈은 재빨리 하인한테 해월이를 끌어내라고 하였다.
  • 선우 댁의 두 눈에 의기양양한 눈빛이 살짝 스쳐 지나가더니 또 이내 고개를 숙이고 감추었다. 그러고는 걱정하는 척 말했다.
  • “국공 나으리,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제후 저택 쪽에서 곧 소식을 접할 터인데 어이 됐든 뒷수습은 잘 해야 하옵니다.”
  • 봉국공은 차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으며 선우 댁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 “집안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먼저 안주인의 죄부터 물어야겠소. 만약 이 집을 이따위로 다스릴 거면 당장이라도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 오시라고 할 것이오.”
  •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선우 댁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그러더니 애써 참으며 말했다.
  • “소첩이 무능하여 국공 나으리께 실망을 안겨드렸사옵니다.”
  •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또 이내 내키지 않는 듯 이렇게 말했다.
  • “지난번에 효진이가 장 어멈을 죽였을 때 마침 오라버니께서 미친 듯이 날뛰던 효진을 보고 한바탕 혼쭐을 내셨는데 그때도 나으리께서는 가슴 아파하셨지요...”
  • 그러자 봉국공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 “부인의 뜻은 국공 저택의 집안일을 해결하려면 부인 오라버니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오?”
  • 봉국공이 버럭 화를 내자 선우 댁도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 “그 뜻이 아니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옵고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지만 해결은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 붕국공은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 “강녕 제후 저택에서 사람을 보내온다면 일단 알아서 잘 둘러대시오. 내가 이미 찾아오라고 사람을 보냈소. 그리고 기껏해야 청주밖에 갈 데가 더 있겠소? 효진이를 데리고 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하오.”
  • 그러자 선우 댁이 대답했다.
  • “알겠사옵니다!”
  • 방을 나서는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통쾌하였다.
  • ‘다시 돌아온다고? 아니, 봉효진은 청산에서 죽을 것이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야. 강녕 제후 저택에 시집을 가? 다음 생에도 기대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