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봉국공의 얼굴은 여전히 다정하였지만 두 눈에는 어두운 빛이 감돌았다.
“오늘 성문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양규성은 살짝 머뭇거렸다.
“그게... 소직은 아무것도 보질 못했사옵니다.”
“널 탓하지 않을 터이니 사실대로 고하면 된다.”
봉국공은 그를 자리에 앉히고 술 한 잔을 따라주었다.
앉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준 술도 마실 수 없었던 양규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소직을 탓하지 말아주시옵소서, 국공 나으리. 국공 저택의 셋째 아씨께서 한 사내와 함께 성문을 나갔사옵니다. 그리고 셋째 아씨께서... 그 사내의 품에 안겨 있는 걸 소직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사옵니다.”
봉국공의 눈빛이 살짝 싸늘해졌다.
“그 여인이 나의 여식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자 양규성이 대답했다.
“소직 전에 선우 장군님 옆에 있었을 때 장군님과 함께 국공 저택에 간 적이 있사온데 그때 셋째 아씨를 한 번 뵌 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봉국공은 외마디 대답을 하고는 이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본 적이 있었다면 그럼 엄청 많이 닮았다는 게로구나. 네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야. 나의 여식은 지금 저택에 있고 밖을 나간 적이 없느니라.”
깜짝 놀란 양규성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그 뜻을 알아챘다.
“네, 소직이 아무래도 눈이 어두워 잘못 본 것 같사옵니다. 국공 나으리, 제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모르고 그런 것이니 죄는 아니니라!”
봉국공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자 초인이 그의 손에 엽전을 쥐여주었다.
“이건...”
몰래 안을 들여다보니 엽전 백 냥이었다. 깜짝 놀란 양규성은 순간 두 눈이 동그래졌다.
봉국공이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가서 병사들하고 거하게 술이나 마시거라. 하지만 술을 마셨다면 어디 가서 헛소리를 하면 아니 되니라. 그리고 바로잡아야 할 진실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양규성은 재빨리 엽전을 받고 간사스럽게 말했다.
“국공 나으리, 걱정 마시옵소서. 소직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럼 가보거라!”
봉국공이 웃으며 보내자 양규성은 재빨리 읍하며 나갔다.
초인이 문을 닫고 돌아서자 화가 잔뜩 난 봉국공의 얼굴이 보였다.
“국공 나으리, 이 정도로는 입을 막기에 어려울 듯 하옵니다.”
초인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졌고 게다가 그때 당시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직접 보고 들은 이가 적지 않았다.
봉국공은 이마에 핏줄까지 세우며 화를 냈다.
“당장 사람을 보내서 잡아오너라.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그 불효 자식을 잡아오도록 하거라.”
“알겠사옵니다!”
명을 받든 초인은 그대로 그들을 쫓아갔다.
초인이 떠난 후 봉국공은 눈빛에 담긴 분노를 가리려고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귓가에는 그날 효진이가 했던 결연한 말들이 계속 맴돌았다.
‘효진이가 도망을 갔다고? 아무런 낌새도 없었거늘. 설마 청주로 돌아간 건가?’
그날 밤 봉국공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선우 댁은 엉엉 울며 그를 맞이하였다.
“국공 나으리, 이게 다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저의 잘못이옵니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선우 댁까지 옆에서 울며불며 난리를 치자 봉국공은 싸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부인의 마음에 효진이가 있긴 있었소? 부인이 효진한테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오.”
그러자 선우 댁은 계속 울면서 잘못을 뉘우쳤다.
“다 제 잘못이옵니다. 효진이가 청주에서 온 뒤로 계속 절 좋아하지 않으니 모녀 사이가 어색한 건 어쩔 수가 없사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저한테 얘기하지 않았지요. 요즘은 조용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이런 망측한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사옵니까? 어쩐지 평소와 다르다 했더니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지요.”
방으로 들어가는 길 내내 선우 댁의 하소연에 마음속의 화가 점점 더 치밀어 올랐던 봉국공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상을 탁 쳤다.
“효진이를 따라다니던 계집종은 뭐라 하였소?”
그러자 선우 댁이 대답했다.
“그 천한 년은 처음에는 죽어도 입을 열지 않다가 고문을 하니까 사실대로 고했사옵니다. 효진이는 작년 연말부터 그 서생과 알고 지냈고 두 사람은 서로 첫눈에 반하여 진작에 혼인을 약조한 사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그 천한 년이 고하길 효진과 서생은... 오래전에... 오래전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하옵니다... 어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옵니까? 그렇게 입을 열 때마다 예슬이를 뭐라 하더니만...”
선우 댁의 말에 봉국공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면서 어찌 제후 저택과의 혼인을 약조했단 말인가! 봉국공과 강녕 제후 어르신의 관계가 그녀 때문에 이대로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그 계집종을 데려오너라!”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 봉국공은 마치 포효하듯 큰소리로 외쳤다.
선우 댁은 이씨 할멈더러 해월이를 데려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해월이가 끌려왔다.
세게 얻어맞은 바람에 숨이 간들간들하였다. 온몸에는 핏자국이 가득하였고 손가락도 퉁퉁 부어 피가 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심한 고문을 당한 게 분명했다.
이씨 할멈은 핏자국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내려치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국공 나으리께서 너한테 물어볼 것이 있으니 넌 그저 사실대로만 고하면 된다.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이씨 할멈의 말에 해월은 순간 움찔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에 가려진 두 눈을 천천히 뜨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고는 퉁퉁 부어올라 검자주색이 된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
“소인... 소인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모른다고?”
그러자 이씨 할멈은 또 뺨을 한 대 내려치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날카롭게 말했다.
“방금 내가 한 얘기를 그새 잊은 것이냐? 국공 나으리 앞에서 거짓을 고하면 아니 되고 셋째 아씨를 위해 사실을 숨겨서도 아니 된다.”
해월이 울음을 터뜨렸다.
“소인 잘못했사옵니다. 소인... 소인이 셋째 아씨더러 그 서생과 함께 가라고 부추겼사옵니다. 셋째 아씨는 가기 싫어하셨사옵니다...”
이씨 할멈의 두 눈에 무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선우 댁은 몰래 손을 움직이며 아무 얘기도 하지 말라는 눈치를 주었다.
화가 잔뜩 난 봉국공은 그대로 해월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해월은 너무도 아파 그대로 몸을 움츠렸고 숨도 쉬기 어려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고른 해월이 이렇게 말했다.
“나으리...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이 계집종을 일단 가두어 놓고 불효 자식이 돌아오면 그때 다시 죽이거라!”
봉국공이 화가 나 파래진 얼굴로 명령을 내리자 이씨 할멈은 재빨리 하인한테 해월이를 끌어내라고 하였다.
선우 댁의 두 눈에 의기양양한 눈빛이 살짝 스쳐 지나가더니 또 이내 고개를 숙이고 감추었다. 그러고는 걱정하는 척 말했다.
“국공 나으리,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제후 저택 쪽에서 곧 소식을 접할 터인데 어이 됐든 뒷수습은 잘 해야 하옵니다.”
봉국공은 차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으며 선우 댁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집안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먼저 안주인의 죄부터 물어야겠소. 만약 이 집을 이따위로 다스릴 거면 당장이라도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 오시라고 할 것이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선우 댁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그러더니 애써 참으며 말했다.
“소첩이 무능하여 국공 나으리께 실망을 안겨드렸사옵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또 이내 내키지 않는 듯 이렇게 말했다.
“지난번에 효진이가 장 어멈을 죽였을 때 마침 오라버니께서 미친 듯이 날뛰던 효진을 보고 한바탕 혼쭐을 내셨는데 그때도 나으리께서는 가슴 아파하셨지요...”
그러자 봉국공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부인의 뜻은 국공 저택의 집안일을 해결하려면 부인 오라버니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오?”
봉국공이 버럭 화를 내자 선우 댁도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그 뜻이 아니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옵고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지만 해결은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붕국공은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강녕 제후 저택에서 사람을 보내온다면 일단 알아서 잘 둘러대시오. 내가 이미 찾아오라고 사람을 보냈소. 그리고 기껏해야 청주밖에 갈 데가 더 있겠소? 효진이를 데리고 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하오.”
그러자 선우 댁이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방을 나서는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통쾌하였다.
‘다시 돌아온다고? 아니, 봉효진은 청산에서 죽을 것이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야. 강녕 제후 저택에 시집을 가? 다음 생에도 기대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