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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행운의 장군

  • 그들은 효진을 청산 산적들의 소굴로 데리고 왔다.
  • 전생에 산적들이 섬멸된 후 효진은 이곳에 수차례 다녀갔었다.
  • 이곳의 건축물들은 전부 나무로 만들어졌고 정교하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견고하였다. 전생에 그녀가 이곳에 왔을 때 우익(右翼) 부분이 불에 탔었고 다른 부분은 손상된 곳이 없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 이곳 산적 소굴에는 명실상부한 지하 감옥이 있었다.
  • 지하 감옥이 있기 전까지는 그저 산굴이었는데 산적들이 이곳을 점령한 후 철창과 철문으로 단단히 고정시켜 놓았다. 효진은 바로 이 지하 감옥에 버려졌다.
  • 산적들의 거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 지하 감옥에서 빛을 내는 거라곤 등잔 하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마저도 약하고 어두워 눈앞에 있는 것밖에 볼 수가 없었다.
  • 묶였던 두 손도 자유를 얻었고 입을 막고 있던 헝겊도 없어졌다. 아마도 그녀가 이젠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 어찌 됐든 이 청산에서 여인이 아니라 백여 명의 군사들이 온다고 해도 큰 풍파를 일으키긴 어려울 것이다.
  • 바로 그때 누군가의 미약한 숨소리가 들려왔고 그 밖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 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밖을 한참 동안 살펴보았다. 어둠 속에서 산적이 없는걸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기어갔다.
  • 어린아이였는데 아직 숨은 쉬고 있었다.
  • 효진은 이 아이가 바로 광희 세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직 살아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 가느다란 빛을 빌어 효진은 지저분하고 퉁퉁 부은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붓고 벌게져있었다. 지금 혼미 상태인지 아니면 자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숨소리는 얕고 짧았다.
  •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니 불덩이처럼 따가웠다. 효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 ‘머리가 뜨겁네.’
  • 그녀가 어루만지자 광희 세자는 정신이 들었는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녀를 보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그녀는 재빨리 그의 입을 막고 쉿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세자 저하, 무서워 마십시오. 저는 세자 저하의 어머니께서 보내온 사람입니다. 겁먹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말아요.”
  • 그녀의 말에 광희 세자의 눈에 가득했던 당황함이 천천히 사라지고 울음을 터뜨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 효진은 손을 내려놓고 광희 세자를 안아주며 그의 두려움을 없애주려고 계속 속삭였다.
  • “제가 꼭 구해드릴 테니 무서워 마십시오. 곧 세자 저하의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 광희 세자는 효진을 안으며 작은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꽉 붙잡았다. 작은 몸은 계속 부르르 떨고 있었고 눈물이 그녀의 옷에 뚝뚝 떨어졌지만 울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이토록 철이 들고 듬직한 네다섯 살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난 효진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하였다.
  • 전에 그냥 모른 척하려 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 “잘하셨어요. 있잖아요, 세자 저하. 나쁜 사람들이 여기에 있을 때는 계속 자는 척하시고 제가 깨울 때만 일어나십시오. 울지 말고 말썽 피우지도 말고 소리를 내서도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 효진은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말했다.
  • “알... 알겠습니다.”
  • 광희 세자는 코 맹맹한 소리로 대답했다.
  • “참 말도 잘 들으시고 착한 세자 저하이십니다.”
  • 효진은 코끝이 찡해났다. 사실 그녀는 평강 공주와 한 대감의 지금 심정을 너무나도 잘 헤아리고 있었다.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고통을 받진 않았는지, 어떤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 고통은 정말로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 그녀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혼자 도망가기도 어려운데 아이까지 있으니 더욱 어려움이 많을 것이고 잘못하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전생의 원한 같은 건 전혀 생각나지 않았고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 있는지 그 생각뿐이었다.
  •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광희 세자가 초이렛날 저녁에 해를 입었으니 산적들이 손을 쓰기 전까지 이삼일 정도가 남았다.
  • 그때까지 기다렸다가가는 도망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얼른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 허리춤을 만져보니 채찍이 아직 있었다.
  • 효진은 이 산적들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 극악무도하기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만약 선우지석과 결탁하여 꾸민 일이라면 선우지석은 절대로 그녀를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만약 진짜로 선우지석이 그녀를 죽이려 했다면 산적들이 왜 아직도 그녀를 살려두고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 그녀를 살려둬봤자 선우지석에게 별 도움이 없을 텐데 말이다.
  • 설마 그녀를 살려두면 좋은 점이라도 있는 건가?
  • 그녀를 살려두면 선우지석에게는 아무런 좋은 점이 없다. 하지만 산적들은 선우지석한테 뭔가를 요구할 수 있게 된다.
  • 산적들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당장은 죽이지 않을 것이다.
  • 그녀는 도망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 그녀의 시선이 등잔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그러고는 감옥의 바닥에 깔려있는 마른 볏짚을 쳐다보았다...
  • 지금 상황을 놓고 볼 때 방화야말로 가장 좋은 계획이었다. 비록 위험하지만 산적들이 그녀와 광희 세자를 당장 죽일 생각이 없는걸 보면 그들에게 일을 시킨 자와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은 게 확실하니 그녀 혹은 광희 세자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 지금 밖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어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만약 아무도 없다면 그야말로 오직 죽음뿐이다.
  • 약 한 시진 정도 지나자 광희 세자는 점점 잠이 들었다.
  • 그때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오자 효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 ‘검둥이!’
  • 검둥이 말고도 다른 그림자가 또 있었다.
  • 그림자가 점점 뚜렷하게 보이자 효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그는 항상 그녀의 행운의 장군이었다.
  • 봉태우는 불같은 눈빛으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마땅한 곳을 찾아 숨을 터이니 얘기하지 마시오. 아직은 도망가기 가장 좋은 때가 아니오.”
  • “불을 지르겠습니다!”
  • 효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내밀어 등잔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쪼그리고 앉아 검둥이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 봉태우의 두 눈에 의아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런 곳에 갇혀 있어 두려워할 줄 알았는데 이미 대응책까지 다 세워놓고 있었다.
  • ‘설마 내가 괜히 온 건 아니겠지?’
  •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앞으로 걸어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숨었다.
  • 검둥이도 끙끙거리더니 이내 봉태우를 따라 구석으로 숨었다.
  • 봉태우는 아직 안에 누워있는 광희 세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차를 쫓아오면서 그는 봉효진이 사내와 도망친 게 아니라 납치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 그리하여 계속 밖에서 지키고 있다가 기회를 엿보고 들어왔던 것이었다.
  • 조금 전에 다행히 검둥이가 먼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산적들을 따돌린 덕에 안으로 들어와 은밀한 곳에 숨을 수 있었다. 산적들이 점점 멀어지고 검둥이가 돌아온 후에야 그는 검둥이와 함께 감옥으로 들어왔다.
  • 검둥이는 주인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에 검둥이만 따라가면 무조건 찾을 수 있다.
  • 저녁 해시 무렵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 광희 세자의 옆에 앉아있던 효진이 휘파람을 불자 지하 감옥에는 순간 불길이 치솟았다.
  • 산적 두 명이 재빨리 달려왔다. 봉태우는 그들이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긴 검으로 두 사람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피를 튕기며 바닥에 쓰러졌다.
  • 봉태우는 산적의 몸에서 열쇠를 찾고 철문을 열었다.
  • “얼른 가시오!”
  • 봉효진은 광희 세자를 안고 재빨리 걸어나갔다.
  • “한 사람이 더 있었소?”
  • 깜짝 놀란 봉태우가 불빛을 빌려 자세히 들여다보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였다.
  • “광희 세자 저하입니다!”
  • 효진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 그러자 봉태우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내밀어 광희 세자를 안으려 하였다. 하지만 광희 세자는 효진을 꽉 안은 채 절대로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 “괜찮습니다. 제가 안고 있을 테니 앞에서 지켜주십시오.”
  • 효진이 말했다.
  • 지하 감옥을 지키고 있는 산적은 별로 없었다. 어찌 됐든 자신들의 구역이고 청산을 쉽게 오를 수 없으니 이곳까지 쳐들어 올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세 사람과 강아지 한 마리가 재빨리 지하 감옥에서 도망쳐 나왔다.
  • 그들이 도망치는 길 내내 사람 하나 없었다. 하지만 지하 감옥에 불이 났으니 결국에는 근거지에서도 알게 되기 때문에 신속하게 도망쳐야 했다.
  • 봉태우는 효진을 끌고 우익 쪽으로 갔다. 오기 전에 알아봤더니 우익 쪽에 산적들이 비교적 적었다.
  • 산적 소굴을 벗어나자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 “저들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 효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백여 명의 산적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횃불을 들고 쫓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