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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독극물

  • 마당으로 나온 효진은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와 선우 댁이 더듬거리며 변명하는 소리를 듣고 냉소를 지었다. 전에 국공으로 봉했을 때 아버지는 확실히 휘황찬란한 나날을 보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그는 전장에 나가지도 않고 관직에 머물러 허송세월만 하였으며 국공 저택의 위엄은 일찌감치 빈 껍데기로 변질해버렸다. 봉국공은 선우예슬의 아버지인 선우지석을 끌어들일 생각이지만, 이 속내를 아무한테도 말해줄 수 없었다.
  • 선우예슬이 한문석의 아이를 가진 일과 봉국공이 선우지석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일, 이 두 가지를 터트리게 된다면 오늘 밤 영명각을 발칵 뒤집어놓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내일부터 이화원의 음식도 계속 공급될 것이었다.
  •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해월이가 배시시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 “아씨, 아침밥이 준비되어 있사옵니다.”
  • 장 어멈은 친히 아랫사람들을 분부하여 아침상을 가져오더니 이내 그들을 돌려보내고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 “셋째 아씨도 이젠 제법이시네요, 국공 어르신께 고자질하시다니. 다만 어르신도 조정의 업무가 다망하여 안채의 일은 마님이 전부 책임지옵니다.”
  • 조금 전, 장 어멈은 마님을 찾아가 자신이 얻어맞은 일을 고자질하려고 했는데 봉효진이 한발 앞서 국공 어르신께 일러바쳤다. 이를 본 장 어멈은 화가 나서 이를 꽉 악물었다.
  • ‘그래요, 진지를 드시고 싶으시면 마음껏 드세요, 실컷 드시라고요.’
  • 봉효진이 이제 막 젓가락을 들려고 할 때 그녀의 말을 듣게 되자 이내 수저를 내려놓고 장 어멈한테 손짓했다.
  • “이리 오거라.”
  • 장 어멈은 견제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 “셋째 아씨께서 혹시 또 저를 때리시려는 것이옵니까?”
  • “그런 거 아니다.”
  • 봉효진은 고기 몇 점을 집어서 다른 그릇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 “검둥이한테 갖다 주거라. 선우예슬의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다.”
  • 장 어멈은 그녀의 태도가 누그러지는 것을 보고 겁을 먹은 줄로 여기면서 그릇을 건네받았다.
  • “잘 생각하셨사옵니다, 셋째 아씨. 무슨 일이든 대화로 잘 해결할 수 있사옵니다. 정실이 될 수 없다면 첩으로 살면 되는 법이지요.”
  • “일리 있는 말이구나!”
  • 봉효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장 어멈도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봉효진은 재빨리 해월에게 말했다.
  • “문을 닫거라!”
  • 해월이는 황급히 달려가 문을 닫으며 배시시 웃었다.
  • “셋째 아씨는 역시 현명하십니다. 문을 닫지 않으면 제대로 식사하지 못할 거예요.”
  • 봉효진은 사실 입맛이 별로 없었다.
  • “네가 다 먹거라, 나는 배고프지 않구나.”
  • 해월이는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 “아니옵니다, 소인은 나중에 먹겠사옵니다.”
  • “어젯밤에 아무것도 못 먹었잖느냐?! 어서 먹거라.”
  • 봉효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밖에서 장 어멈이 잔뜩 화난 채 문을 쾅쾅 두드렸다.
  • “셋째 아씨, 문을 열어주세요!”
  • 봉효진은 그녀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해월에게 밥을 먹도록 명령했다. 해월이가 다 먹은 뒤에야 천천히 문을 열어주었고 장 어멈은 분노에 차서 쏘아붙였다.
  • “셋째 아씨, 대체 왜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느냐?”
  • 봉효진은 의자에 걸터앉아서 말을 이어갔다.
  • “아씨인 내가 문을 닫고 아침밥을 먹겠다는데 너 따위 노비가 지금 불만인 것이냐?”
  • 장 어멈은 씩씩거리면서 봉효진을 힐긋 쳐다보더니 이내 눈길을 돌려 반쯤 남긴 음식을 확인하고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봉효진은 그녀의 눈빛에서 대뜸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시선을 천천히 음식에 옮겼다.
  • “아이고!”
  • 이때 해월이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괴로운 듯 바닥에 쪼그리고 앉더니 얼굴까지 창백해졌다.
  • “해월아, 왜 이러는 것이냐?”
  • 봉효진은 손을 뻗어 해월이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 “모르겠사옵니다.”
  • 해월이의 조그마한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봉효진의 손을 꼭 붙잡고 울먹이면서 말했다.
  • “아씨, 소인 배가... 너무 아프옵니다.”
  • 이때 갑자기 문밖에 있던 검둥이가 으르렁대며 울부짖었고 봉효진은 해월이를 제쳐두고 재빨리 밖으로 나가보았다. 검둥이는 잔뜩 괴로운 듯 바닥을 내 뒹굴었고 그녀는 다시 한번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힐끔 바라보았다.
  • 봉효진은 조금 전 장 어멈의 사악한 눈빛을 되새기더니 그녀가 독을 탔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 전생에는 이런 장면이 없었는데, 하긴, 전생의 봉효진은 선우 댁과 장 어멈한테 지나치게 순종적이라 그녀를 혼내려거든 굳이 독을 탈 필요가 없었다.
  • 장 어멈은 자신을 노려보는 봉효진에게 코웃음을 쳤다.
  • “셋째 아씨, 어찌하여 저를 뚫어지라 쳐다보시는 것이옵니까? 해월이가 음식을 잘못 먹고 배앓이를 하는 것 같사옵니다.”
  • “음식에 무슨 독을 탄 것이냐?”
  • 봉효진은 날카롭게 쏘아붙였고 장 어멈도 뒤질세라 큰소리로 대꾸했다.
  • “셋째 아씨,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주인님께 독을 타는 건 죽을죄에 해당하는데 소인은 저택에 있는 몇 년 동안 줄곧 충성하면서 살아왔사옵니다. 제발 제게 억울한 누명을 엎어 씌우지 마세요.”
  • 봉효진은 음침한 눈빛으로 그녀를 째려보더니 차갑게 웃어 보였다.
  • “충성이라고 했느냐? 그럼 내가 보상을 톡톡히 치러줘야지.”
  • 그녀는 장 어멈의 머리채를 확 잡아채더니 손바닥을 한 대 갈겨서 그녀의 머리를 식탁에 깔아뭉갰다. 봉효진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 “여기 먹다 남은 음식들을 전부 네게 사하겠다.”
  • 장 어멈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 “사람 살려요, 셋째 아씨가 사람을 죽여요.”
  • 문 앞에서 바닥을 쓸고 있던 계집 홍연이 장 어멈의 비명을 듣고 재빨리 뛰어왔다. 봉효진은 홍연의 뒷덜미를 꽉 붙잡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 “의원을 불러오거라!”
  • 홍연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봉효진의 윽박질에 못 이겨 허둥지둥 의원을 찾아 나섰다.
  • 봉효진의 음침한 목소리가 그녀들 뒤에서 들려왔다.
  • “부인께 이를 생각은 하지 말아라. 만약 반 시간 뒤에 의원이 오지 않는다면 너희들도 장 어멈과 똑같은 꼴이 될 거다!”
  • 말을 마친 봉효진은 그릇을 번쩍 들고 장 어멈의 머리에 내리쳤다. 장 어멈은 끙끙대더니 이내 수그러들었고 화들짝 놀란 홍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봉효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국공 저택에서 그녀는 어찌 됐든 적출이었는데 한낱 노비 따위가 감히 그녀의 음식에 독을 타다니, 자신이 오죽 만만했으면 이런 일을 저지르나 싶었다. 봉효진은 오늘 이들에게 반드시 혼쭐을 내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유사한 일이 계속 일어날 게 분명했다.
  • 그녀는 장 어멈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나가더니 복도에 있는 기둥에 묶어놓았다. 화 난 장 어멈은 큰소리로 외쳤다.
  • “셋째 아씨, 저는 마님의 지시를 받고 이곳에 왔는데 어찌하여 저한테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마님께서 아시게 되면 아씨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옵니다.”
  • 봉효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허리를 굽히고 자수로 된 신발을 한 짝 벗더니 장 어멈의 얼굴에 마구 휘둘렀다. 연속 열몇 번 후려치니 장 어멈의 고함도 점점 낮아지고 그제야 그녀도 마음속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해 보였다.
  • “나중에 다시 혼내줄게!”
  • 봉효진은 신발을 장 어멈의 얼굴에 내던지고 이내 해월이를 보러 갔다.
  • 해월이는 너무 아픈 나머지 바닥을 뒹굴었고 커다란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 “아씨... 소인 죽을 것 같사옵니다. 소인... 아씨를 더는 시중하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 “그만하거라, 괜찮다. 저들은 나를 감히 죽이지 못한다. 그저 나를 혼내려던 속셈이었어.”
  • 봉효진은 해월이의 혈 자리를 눌러주며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 “나중에 의원이 오시거든 처방해준 약을 제때 먹거라, 그러면 곧 나을 거야.”
  • 그녀는 해월이를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월이는 봉효진의 손을 꼭 잡고 고통스러워하며 말을 이어갔다.
  • “아씨... 일러바치지 마세요.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자꾸만 반복한다면 국공 어르신께서... 귀찮아하실 겁니다.”
  • 봉효진은 애틋한 눈빛으로 해월이를 바라보았다.
  • ‘이 아이가...’
  • “그만 말하거라!”
  • 해월이를 진정시키고 나서 봉효진은 또다시 밖으로 나가 검둥이를 안았다. 검둥이는 이미 상태가 호전되었는데 전생에도 몸 안에 독을 물리치는 항체가 있어 중독된 후 바로 괜찮아지더니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전생에 검둥이는 강녕 제후댁 어르신 손에 죽임을 당했다.
  • “이년을 똑똑히 보아라, 이년 얼굴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년이 너를 해쳤어!”
  • 봉효진은 검둥이를 안고 장 어멈 앞에 다가와 차갑게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