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3화 집으로 찾아왔다

  • 대청마루 복도 앞에 서 있던 봉효진의 귀에 안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 “마님, 마님께서는 예슬의 고모님이신데, 신경 좀 써주시면 감사하겠사옵니다. 어머니의 뜻은 아버지가 조정으로 복귀하기 전에 예슬과 문석의 혼사를 치르라는 것이옵니다.”
  • 말은 꺼낸 사람은 한문석의 누님, 즉 봉 시랑의 부인인 한교영이였다. 봉효진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녀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 선우 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 “봉 마님, 과분한 말씀이지요. 예슬이가 제후 저택에 시집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운이 따라줬기 때문입니다. 이 혼사를 꼭 성사시키도록 하지요.”
  • 봉효진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전생에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한 그녀는 모두가 그녀를 위해서 그런 줄 알았고, 현명한 여성은 당연히 그런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줄 알았다.
  • 봉효진은 한숨을 내뱉으면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 그녀의 시선은 한문석의 얼굴에 닿았고, 기억 속의 그 흉악한 얼굴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무릎 꿇고 절을 하며 몇 번이고 애원하는 자신의 모습이며, 하늘로 치솟는 불길과 임씨 댁 어르신의 냉혹한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아 그녀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다.
  • 봉효진을 바라보는 한문석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록 그는 봉효진을 딱 두 번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항상 빨간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옷차림을 하고 금빛 머리 장식을 두른 채 얼굴은 마치 조색판처럼 얼룩덜룩해서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오늘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의외로 산뜻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 “효진아, 마침 잘 왔다!”
  • 고급스러운 꽃과 줄기 무늬가 수 놓인 비단옷을 입은 선우 댁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 봉효진의 시선은 한문석의 얼굴에서 선우예슬의 얼굴로 옮겨갔다.
  • 희고 매끄러운 그녀의 얼굴은 수줍은 듯 살짝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은 빨갛게 물든 채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속눈썹은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하얀 망사 치마의 소맷부리에는 우아한 녹색 대나무 잎이 수 놓여 있었고, 그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로우면서 자극적이었다.
  • 봉효진을 발견한 그녀는 눈빛이 재빨리 변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울음기가 다시 짙어졌다. 어깨가 이따금 떨려오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울음이라도 터뜨리는 듯싶었다.
  • 그녀의 옆에 앉아있는 한문석은 슬퍼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 “두려워하지 마시오. 내가 있잖소.”
  • 선우예슬의 미간은 활짝 펴지면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봉효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 ‘아주 주위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는 개같은 연놈이 납셨네...’
  • 한교영은 봉효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 “효진아, 우리가 오늘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아마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네 어머니께서 너는 원래 너그럽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했단다. 너와 예슬이는 또 사촌 자매가 아니더냐. 자매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예슬을 받아들이는 거, 맞지?”
  • 봉효진은 세 사람의 맞은편에 천천히 앉았다.
  • 한교영은 오늘 금색과 은색의 꽃무늬가 수 놓인 붉은색 주름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비취로 된 장신구를 잔뜩 하고 있었으며, 그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봉효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 “무슨 일이옵니까? 저는 아직 잘 모르겠사옵니다.”
  • 선우 댁은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
  • “효진아, 너 그렇게 철이 없으면 되겠느냐? 예슬은 이미 문석의 아이를 뱄으니 반드시 집 안으로 들여야 한다.”
  • 봉효진은 짧은 대답과 함께 선우예슬을 바라보았다.
  • “사실이냐?”
  • 선우예슬은 수줍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 “언니, 죄송하옵니다. 저... 저희는 단지 한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을 뿐이옵니다.”
  • “한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했느냐? 그건 혼전에 순결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야. 따지고 보면 연못에 빠져 죽어도 모자랄 판이지.”
  • 봉효진은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 “그게 무슨 헛소리냐!”
  • 선우 댁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예슬과 문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사랑해왔으며, 네가 중간에서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미 혼인을 올렸을 것이다.”
  •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 봉효진은 한문석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 “왜 나한테도 혼사를 논한 것이오? 결국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도 찰나의 쾌락을 바라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소?”
  • 한문석은 화를 버럭 냈다.
  • “무슨 허튼소리냐!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여자가 이토록 상스러운 말을 내뱉다니, 뻔뻔스럽기 그지없구나!”
  • 봉효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 “내가 뻔뻔하다고? 적어도 나는 다른 남자와 사통하여 임신하거나 윤리 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 경중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청주(青州)에서는 이런 남녀를 개 같은 연놈이라고 하지!”
  • 선우 댁은 깜짝 놀랐다.
  • “효진아,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어찌하여 이런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이냐. 너는 국공 저택의 셋째 아씨란다. 매사에 신중해야 하는 거 모르냐?”
  • 봉효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선우 댁을 쏘아봤다.
  • “벌써 듣기 거북하면 어떻게 하시옵니까? 아직 그녀를 상스러운 년이라고 하지도 않았사옵니다.”
  • 선우예슬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라 빨갛게 물들었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 “언니가 저를 용서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사옵니다. 이런 일이 생긴 이상 저도 더는 살고 싶지 않으니 당장 언니 눈앞에서 죽겠사옵니다.”
  •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기둥을 박으려고 몸을 움직였고, 이에 식겁한 한문석은 얼른 그녀를 끌어당겼다.
  • “예슬아, 아니 된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말아라. 내 너와 반드시 혼인을 치를 것이다.”
  • “문석 오라버니, 아니옵니다. 그냥 제가 죽게 놓아주십시오. 다른 사람을 볼 면목이 없으니 우리 아이와 함께 목숨을 거둘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선우예슬은 애처롭게 울음을 터뜨렸다.
  • 선우 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봉효진을 향해 외쳤다.
  • “대체 예슬이한테 무슨 막말을 하는 것이냐? 얼른 사과하지 못하느냐?”
  • 봉효진은 차가운 표정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 “그녀한테 사과하라니, 어이가 없사옵니다. 지금 제가 혼전 임신을 했사옵니까? 아니면 뻔뻔스럽게 다른 남자와 간통을 했사옵니까? 왜 제가 사과를 해야 하옵니까? 제가 사과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까?”
  • 그녀는 벌떡 일어서 선우예슬 앞에 다가가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말했다.
  • “죽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얼른 죽어버려!”
  • 선우예슬은 울면서 말했다.
  • “문석 오라버니. 이거 놓아주십시오. 놓아주십시오...”
  • “봉효진, 너...”
  • 극노한 한문석은 손을 들어 그녀를 때리려고 했다.
  • 봉효진은 그의 손목을 잡고 뒤로 확 밀어버리자 한문석은 비틀거리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황급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서야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었다.
  • 곧이어 봉효진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차가운 목소리로 선우예슬을 향해 말했다.
  • “이제 너를 막아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얼른 죽어버려!”
  • 선우예슬은 넋이 나간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이런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뭐 하느냐!”
  •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봉효진의 외침에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고 이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 “효진 언니, 저한테 왜 이러는 것이옵니까? 제가 잘못을 했으면 저를 꾸짖거나 손찌검을 하면 되지 않으시옵니까? 대체 저한테 왜 이러는 것이옵니까!”
  • 선우예슬은 울면서 말했다.
  •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봉효진은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뺨을 이리저리 갈기면서 연거푸 몇 대를 때리고 나서 비로소 멈추었다.
  • “나더러 때리라고 했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 봉효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뺨을 여러 대 맞은 선우예슬은 수치심에 화가 났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아예 몸에서 힘을 뺀 채 까무러치면서 바닥에 쓰러진 척했다.
  • 선우 댁은 깜짝 놀라 다급하게 그녀를 부축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봉효진을 향해 쏘아붙였다.
  • “국공 저택의 아씨가 이렇게 무식하고 악랄하다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손찌검까지해? 네 눈에 이 어미가 있기는 한 게냐?”
  • 봉효진은 오히려 그녀를 비난했다.
  • “그럼 부인께서는 저를 딸로 생각하고 있사옵니까? 다른 건 둘째치고 이처럼 윤리 도덕이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 딸을 괴롭히는 어머니라니! 대체 어디가 어머니의 행세를 한다는 것이옵니까?”
  • 한교영은 벌떡 일어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 “네가 예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이 혼사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 강녕 제후 저택에는 너처럼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 무례한 여자와 혼사를 치르는 복이 없구나. 나중에 사람을 보내 퇴혼서를 전해주지! 문석아, 가자.”
  • “그래. 혼인을 무르지!”
  • 사실, 한문석은 그녀와 혼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만약 아버지의 명령만 없었더라면 그녀와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봉효진은 ‘기절’한 선우예슬이 눈을 번쩍 뜨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눈빛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 “잠깐만!”
  • 이때, 봉효진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