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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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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미

Last update: 2023-03-22

제1화 아이를 빼앗다

  • 대주조(大周朝) 강녕(江寧) 제후 저택 마당.
  • 한 여성이 푸른 빛이 감도는 옷을 입은 채 눈밭에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 새하얀 눈밭 위에 그녀의 뒤로 쭉 늘어진 핏자국은 마치 빨간 비단처럼 유난히 짙고 검붉었다.
  • 그 여성은 눈밭에 쌓아 올린 불더미 옆에 내팽개쳐졌고,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무릎과 이마에서는 피가 새어나왔고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 온몸에 채찍 자국으로 가득한 그녀는 옷이 찢긴 채 살갗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고, 피부가 터지고 살점이 뜯겨 핏자국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배는 마치 임신 7~8개월 차인 임산부처럼 부풀어있었다.
  • 그녀는 두 손으로 눈을 움켜쥐고 나머지 한쪽 눈을 애써 부릅뜬 채 처마 밑에 서 있는 흰 비단옷의 남자를 노려보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 “부부로 지낸 세월이 8년이나 되는데, 정녕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단 말이오?”
  • 강녕 제후 한문석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봉효진, 화를 일으키는 네 팔자를 탓하거라. 너는 이미 제 아비를 죽였으니 너를 죽이지 않으면 예슬이마저 네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
  • 예슬은 그의 평처(平妻)이자 그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인데, 설 전에 임신하였으나 갑자기 병이 생겨 도통 낫지 않아 도인을 불러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곤 했다. 하지만 그 도인은 제후 부인인 그녀가 화를 일으키는 팔자를 타고 나서, 만약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더욱 불길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했다.
  • “당신은 조정(朝廷)의 중신으로서 그런 술사의 헛소리를 철썩 같이 믿고 있다니.”
  • 봉효진이 한이 서린 주먹질로 바닥을 내리치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 “문석아, 그녀에게 더 이상 현혹되지 말고 어서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 불태워 버리거라!”
  • 그 옆에는 자손의 번창함을 바라는 무늬가 수 놓인 검은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귀부인이 앉아있었고, 그녀는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녀가 바로 전 강녕 제후의 미망인이자, 현 강녕 제후의 어머니인 임씨 댁이었다.
  • 그녀는 예전부터 며느리를 눈엣가시로 여겨왔고, 봉효진이 애초에 강녕 제후 어르신을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혼사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무술을 연마하는 무식한 여자가 어찌하여 감히 제후 저택의 부인 자리를 넘볼 수 있으리라!
  • “그건 전부 선우예슬의 음모이며 그녀가 술사를 매수했기 때문이오!”
  • 봉효진은 배를 감싸 안으며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선우예슬은 그렇다 쳐도 그녀도 임신했는데, 그녀의 아이만 죽으란 법이 어디 있는가!
  • “감히 예슬에게 누명을 씌우는 게냐!”
  • 강녕 제후는 화를 버럭 내며 성큼성큼 다가가 봉효진의 뺨을 내리쳤고, 그녀의 눈에서 피가 터져 나와 그의 얼굴에 튀었다.
  • “너만 아니었다면 내가 소동(蘇東) 전투에서 참패를 당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 그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출정하면서 유일하게 그녀가 빠진 그 전투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참패를 당했고, 그는 틀림없이 화를 불러일으키는 그녀의 팔자 때문이라고 여겼다.
  • 봉효진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얼굴을 끌어당기며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눈가에는 주름을 따라 피가 묻어있었고, 그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 “당신이 요란스럽게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면서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오!”
  • “그 입 다물어!”
  • 강녕 제후는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를 발로 걷어차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날카로운 칼로 옷을 찢어버리자 하얗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배가 드러냈다.
  • 봉효진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한껏 뒤틀려진 채 씩씩거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통증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했다.
  • “제발 이 아이만 낳게 해주시오! 나중에 나를 어떻게 죽이든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 “꿈도 꾸지 마!”
  • 그는 칼을 들고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말했다.
  • “어머님, 어머님.”
  • 봉효진은 임씨 댁 어르신을 황급히 바라보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 “제 뱃속에는 어머님의 손자가 있사옵니다. 그동안 어머님에게 효도한 저를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주시고 제발 아이를 낳게 해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리옵니다.”
  • 그녀는 애써 몸을 일으켜 개처럼 앞으로 기어가 임씨 댁 어르신을 향해 땅바닥이 울리도록 연신 절을 했고, 이마가 점점 부어오르면서 피가 새어 나왔지만, 애원을 멈추지 않았다.
  • 임씨 댁 어르신은 냉정한 눈빛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면서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 “나를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한테 그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강녕 제후 어르신께서 너를 이 집안으로 끌어들이겠다고 고집만 피우지 않았더라면 너 따위가 감히 우리 한씨 가문의 며느리로 가당키나 하겠느냐? 꿈도 꾸지 마!”
  • 애원해도 소용없다는 걸 눈치챈 봉효진은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쥔 채 남은 한쪽 눈으로 한문석을 노려보며 슬픔과 절망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한문석, 내가 한씨 가문에 시집온 지 5년이 지났지만, 당신이 세운 전공(戰功) 중에서 나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뭐가 있소. 당신은 대장으로 있고, 선봉인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로를 세웠으면 당신이 강녕 제후라는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겠소? 오늘날 당신은 첩을 살리려고 본처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피붙이를 죽이려 하다니, 이 뒈져버려도 시원찮을 놈아!”
  • 한문석은 노여운 눈빛으로 봉효진의 턱을 한 방에 걷어찼고, 그녀는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져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임씨 댁 어르신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 “문석아, 저 천벌 받을 놈을 배에서 꺼내기 위해 얼른 움직이거라. 네 누나와 예슬이는 반드시 그녀가 살아 있을 때 그놈을 꺼내서 불태워 버려야만 나쁜 기운을 없앨 수 있다고 했거늘.”
  • 차가운 칼이 그녀의 배에 닿자마자 봉효진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배 속의 아이를 보호하려 애를 썼다.
  • 피범벅이 된 그녀의 눈에 복도의 기둥 뒤에서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예슬이 들어왔다.
  • 선우예슬은 그녀의 가까운 사촌 동생으로 그녀가 한문석과 혼사를 맺은 후, 한문석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서 그와 함께 국공(國公)저택으로 찾아와 그녀에게 자신을 평처로 삼는 데 동의해 달라고 부탁했다.
  • 당시 옆에서 설득하는 계모에 못 이겨 그녀는 결국 선우예슬을 집으로 들이는 것을 동의했다.
  • 하지만 그때는 어쩜 그렇게 멍청했을까!
  • 그녀는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한문석을 바라보았다.
  • 핏발이 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한문석은 칼로 그녀를 베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누비면서 가차 없이 적을 죽이는 대장님이라 하더라도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봉효진이 없었다면 그 위치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 임씨 댁 어르신은 은은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한문석을 바라보면서 마치 지하 감옥에서나 들을 법한 음험하고 독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녀를 죽여야만 네가 입궁해서 폐하께 봉효진이 적과 내통하고 군사 기밀을 적들에게 유출했기에 소동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고 아뢸 수 있단다. 그렇지 않으면 패전의 죄를 너 혼자 감당해야 하거늘. 어찌 됐든 그녀는 요괴의 환생으로 남편을 죽일 팔자를 타고났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녀가 너 대신 죄를 뒤집어쓰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야.”
  • ‘어쩐지, 그런 거였어!’
  • 봉효진은 피를 토해냈다. 도사가 뭐 어쩌더라 했던 것은 단지 핑계일 뿐, 그는 그녀한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작정이었다.
  • ‘이런 겁쟁이, 쓰레기 같으니라고!’
  • “한문석, 당신은 대장이 될 자격이 없소! 이 천하에 쓸모없는 인간아!”
  • 그녀는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 그녀의 말에 화가 난 한문석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 “이런 미천한 년, 너를 당장 죽여버리겠다!”
  • 그는 차가운 칼을 높이 들었고, 이내 날카로운 통증이 그녀의 복부에 전해졌다. 그동안 봉효진은 칼에 찔리거나 검에 베이면서 수많은 상처를 입었고, 심지어 한 번은 그녀의 심장 옆을 뚫고 지나가는 적의 화살로 인해 목숨까지 잃을 뻔했지만, 지금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슴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 그녀는 흉악하기 그지없는 한문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배가 칼에 의해 갈라지는 느낌과 칼날의 묵직한 통증은 그녀의 가슴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그녀가 고함을 지르며 두 손을 마구잡이로 허우적거리자, 그녀의 손톱자국으로 인해 한문석의 얼굴에는 핏자국이 흥건했다.
  • 임씨 댁 어르신은 차가운 표정으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고, 그나마 오늘 그녀에게 먼저 약을 먹인 덕분에 저 괴팍한 여인을 제압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 한씨 가문은 패전의 죄를 짊어질 수 없었다. 한문석이 출정하면 반드시 봉효진과 함께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모든 죄를 그녀에게 떠밀어야만 강녕 제후 저택의 명예와 명성을 지킬 수 있었다.
  • 봉효진의 의식이 점점 사라져가는 찰나, 그녀는 머리 위로 빛이 보이는 듯싶었다.
  • 그녀는 애써 눈을 떴지만, 그 빛은 단지 옆에서 불타오르던 불빛이었고 방금 그녀의 뱃속에서 끄집어낸 아이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내던져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아니야... 안 돼!”
  • 봉효진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고,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피로 물든 몸을 질질 끌고 불더미를 향해 기어갔다.
  • “내 아이, 내 아이!”
  •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을 태워버렸지만, 그녀는 뜨거움조차 느끼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오열했고, 울음소리와 함께 끔찍한 저주가 들려왔다.
  • “한문석, 나 봉효진은 귀신이 된다고 하더라도 한씨 가문의 모든 사람을 처참하게 죽여버릴 거야!”
  • 불빛이 타닥타닥 타오르면서 저주가 섞인 그녀의 목소리는 마침내 서서히 가라앉았다.
  • 불길이 꺼지자 검게 그을린 시체 한 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시체의 품에는 작은 숯 조각이 있었다.
  • 임씨 댁 어르신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끝내 죽었어. 재수 없는 사람이 마침내 죽었어! 도사의 말에 따르면 저 불행한 씨앗을 불태워 버리면 모든 불운이 사라진다고 했거늘.’
  • 반면, 그녀의 죽음은 한씨 가문에 행운을 가져다주기는 했었다. 적어도 한씨 가문은 패전의 죄를 뒤집어쓸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