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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도망친 셋째 아씨

  • 마차에 올라탄 효진은 곳곳을 훑어보았다. 방석과 발도 깨끗하였고 향긋한 냄새까지 풍겨왔다. 아무래도 경조 저택 쪽에서 그녀를 정중히 모시는 게 맞긴 한가 보다.
  • 그냥 형식적인 조사라면 아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왠지 모르게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 발을 열어 보니 마차는 확실히 경조 저택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거리에는 군대와 관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포도 대장이 관차들과 인사하는 소리도 들렸고 모든 게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 차 한잔 정도 마실 수 있는 시간이 흐르자 마차가 멈춰 섰다. 한 관차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포도 대장에게 말했다.
  • “포도 대장님, 서부 거리에 수상한 자가 발견되어 나으리께서 가보시라고 하옵니다.”
  • 그러자 양씨 포도 대장은 말의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 “알겠다. 지금 바로 가보도록 하지.”
  • 그는 고개를 돌려 마차를 몰고 있는 관차에게 명령을 내렸다.
  • “일단 아씨를 관아로 모셔간 다음에 서부 거리로 오거라.”
  • “알겠사옵니다!”
  • 마차를 몰고 있던 관차가 대답했다.
  • 양씨 포도 대장은 말을 채찍질하며 가버렸고 처음부터 끝까지 효진한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효진도 별로 개의치 않아 하였다. 왜냐하면 속으로 선우 댁이거나 선우지석의 의견을 듣고 장 어멈의 가족이 관아에 고발했을 것이라고 몰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녀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혹이 있었다. 설령 그렇게까지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란 걸 모른단 말인가? 때가 되면 아버지의 한마디로 일이 해결될 것이고 결국에는 그저 그녀의 기분만 상하게 하는 정도일 텐데 말이다.
  • 고작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하여 일을 이렇게도 복잡하게 만들어 놓지는 않을 것이다.
  • 그런 걸 보면 최소 선우지석의 짓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의 서모(庶母) 선우 댁의 짓일 가능성이 크다.
  • 마차가 달리는 달그락 소리가 청석판 길 위에서 울려 퍼졌고 마치 망치로 두드리듯 효진의 마음을 두드렸다.
  • 그때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고 순간 위험이 닥쳤다는 걸 느꼈다.
  • 그리고 그 향기는...
  • “검둥이!”
  • 효진의 머릿속에 뭔가 번쩍 떠올랐지만 온몸에 힘이 점점 빠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성문에 도착하기 전 한 남자가 마차에 올라탔다.
  • 광희 세자의 실종 사건 때문에 성문에 관문을 설치하여 오고 가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 마차가 관문 앞에 멈춰 서자 성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 병사가 다가와 검문하였다.
  • “어디서 온 자들이고 어디로 가시오?”
  • “국공 저택 셋째 아씨께서 요양하러 성 밖으로 나가던 길이오!”
  • 문지기 병사는 힐끗 쳐다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는 묻지 않고 발을 내렸다.
  • “가시오!”
  • 마차가 나간 후 문지기 병사는 고개를 돌려 다른 병사에게 물었다.
  • “국공 저택 셋째 아씨가 강녕 제후의 도련님하고 혼인을 한다고 하지 않았소?”
  • “나도 그렇게 알고 있소.”
  • 다른 한 병사가 대답했다.
  • “그럼 아까 내가 본 건 무엇이란 말이오? 국공 저택의 셋째 아씨가 어떤 한 사내와 끌어안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 같았소.”
  • 문지기 병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요양을 간다고는 했지만 딱 봐도 밀회를 하러 가는 게 분명하오. 한 도련님 불쌍해서 어쩌오? 색시가 들어오기도 전에 다른 사내와 정을 통하고 있으니 강녕 제후 저택의 체면이 그야말로 말이 아니게 됐소.”
  • “그게 사실이오?”
  • 그러자 몇몇 병사들이 다가와 물었다. 성문을 드나들던 백성들도 모여들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 성문 위에는 청색 옷차림에 흑발의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성문의 노란 벽돌을 짚으며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아래에 있는 병사들의 웃음소리를 듣던 그의 차가운 두 눈에 화난 기색이 살짝 묻어있었다.
  • ‘봉효진!’
  • 그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자 신나게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다급히 웃음을 거두고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 “봉 장군님!”
  • 봉 장군이 대체 언제 성문 위로 올라간 걸까? 그럼 아까 사람들이 하던 얘기를 다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봉 장군이 바로 강녕 제후의 수양아들인데 말이다...
  • 봉태우는 한없이 차가운 얼굴로 검은 말을 잡더니 바로 말 위에 올라타고는 쏜살같이 성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국공 저택의 셋째 아씨가 웬 사내와 성 밖으로 밀회하러 나갔다는 소문이 경중 전체에 퍼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셋째 아씨가 그 사내와 도망쳤다고 얘기하는 이도 있었다.
  • 효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손은 묶여있었고 입도 틀어막혀 있었다. 그리고 마차가 아니라 작은 가마였고 옆에 있던 검둥이도 사라졌다.
  • 비스듬히 기울어진 가마를 보니 산을 오르는 중인 것 같았다.
  • 발로 가마발을 걷어차자 앞쪽에 두 사람이 가마를 들고 있었다. 산을 오르는 중임이 확실했다.
  • ‘아니, 이 산길 어딘가 익숙해.’
  • 자세히 살펴보니 청산을 오르는 길이란 걸 단번에 알아챘다.
  • 전생에 수백 번도 더 다녔던 길이라 길 옆 어디에 큰 돌멩이가 있는 것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 그녀를 데리고 청산을 오른다는 건 설마 선우지석이 아니라 청산의 산적들이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말인가?
  • 하지만 그녀와 청산의 산적들은 평소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지금 원수를 진 집안이라고는 선우 집안밖에 없는데 그들 말고 또 누가 그녀를 노리고 있단 말인가?
  • 그녀는 가마발을 내리고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전생에서 광희 세자가 변을 당한 후 선우지석은 산적들을 섬멸하겠다고 조정에 상주문을 올렸다.
  • 경조 저택에서 여러 차례 양씨 포도 대장을 보내 산적을 섬멸하게 하였지만 매번 실패하여 돌아왔다. 하지만 선우지석은 고작 병사 3백 명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도 그만큼의 산적 소굴을 없애버렸다.
  • 사실 이건 거의 성공할 수 없는 임무였지만 선우지석은 아주 완벽하게 완성하였다. 그는 성공하여 돌아와 이렇게 아뢰었다. 3백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을 때 산적들이 한창 연회를 벌리고 있어 전부 고주망태가 되었기에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쉽게 산적들을 섬멸하였다고 했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심문하니 산적의 우두머리가 바로 자신들의 죄를 고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정동현 아들한테서 거금을 받고 광희 세자의 목숨을 해쳤다는 것이었다.
  • 그렇게도 손쉽게 임수를 완성하였다는 건 생각해 보면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선우지석이 청산에 대해 익숙히 알고 있고 청산의 산적들도 그에게 아무런 경계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말한 고주망태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술을 준 사람이 바로 선우지석일 가능성이 크다.
  • ‘만약 진정 그렇다면 정동현의 아들이 세자 저하를 해한 것이 아니라 선우지석이 한 짓이 아닌가? 그런데 선우지석은 왜 세자 저하를 해하려 했던 걸까?’
  • 효진이 숨을 죽이고 곰곰이 생각하자 머릿속에 무언가가 갑자기 스쳐 지나갔다. 전생에서 이맘때쯤 광희 세자의 일을 제외하고 또 다른 큰일이 발생했다.
  • 그것은 바로 폐하께서 복주 탐관과 경관의 결탁 사건에 대해 조사하라고 황명을 내린 것이다. 당시 조사를 받은 신하가 매우 많았는데 몇몇 무장도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선우지석이 산적들을 섬멸하고 세자의 복수를 하자 감찰아문의 한 대감은 그에게 매우 고마워하였고 결국 두 사람은 가장 좋은 벗이 되었다.
  • 수많은 단서들이 빈틈없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 효진은 몰래 힘을 모았다. 혼미향(迷香)의 양이 별로 많지 않았거나 전에 소복단을 복용하여 혼미약이 생각보다 빠르게 약효를 잃었을 수도 있다.
  • 아무튼 선우지석이 세자를 잡아갔든 가지 않았든 지금 청산으로 가는 길이라면 이참에 기회를 엿봐서 세자를 구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복주 사건 때문에 봉국공은 감찰아문에서 정신없이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 항상 그의 옆을 따라다니던 병사 초인이 다급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 “국공 나으리, 저택에 큰일이 일어났사옵니다.”
  • 봉국공은 고개를 들고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문지르며 살짝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
  • “사람이 죽은 게 아니면 아뢰지 않아도 된다.”
  • 그러자 초인이 말했다.
  • “셋째 아씨께서 한 사내와 도망쳤다는 소문이 지금 경중에 파다하게 퍼졌사옵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직접 보았다고 하옵니다. 마님께서도 방금 사람을 보내오셨는데 해월을 잡아다가 사실대로 고하라고 강요한 끝에 셋째 아씨께서 한 서생과 도망친 게 확실하다고 하옵니다.”
  • 봉국공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 “그럴 리가 없다!”
  • 강녕 제후 저택에 시집을 간 것 자체가 더없는 영광인데 서생과 도망을 쳤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 “마님께서는 국공 나으리께서 저택에 돌아오신 후에 다시 결정을 내리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사옵니다. 그리고 셋째 아씨의 옆에 있던 계집종 해월이도 이미 잡아놓고 있다고 하옵니다.”
  • 성문 문지기 병사의 증언 그리고 해월이의 진술까지 더해졌으니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 두 눈을 감고 있던 봉국공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상을 탁 내리치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이냐? 만약 사실이라면 그냥 계속 갈 길을 갈 것이고 만약 거짓이라면 결국에는 돌아올 것이니 그때 다시 물으면 되니라. 지금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세자 저하께서 납치를 당해 공주님과 한형님이 걱정이 태산인데 어찌 갈 수가 있겠느냐!”
  • 그러자 초인이 한마디 하였다.
  • “국공 나으리,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그건 상관이 없사온데 제후 저택 쪽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 장담할 수 없사옵니다. 변방에 계신 제후 어르신의 체면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아무래도 뭔가 방법을 대여 밖에 떠도는 소문부터 잠재우는 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 초인은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켜왔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말들도 초인은 할 수 있었고 국공 나으리도 귀담아들었다.
  • 아니나 다를까 초인의 얘기를 들은 봉국공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 “가서 그 문지기 병사를 데리고 오너라. 떠벌리지 말고 조용히 데리고 오면 된다.”
  • “알겠사옵니다!”
  • 초인은 그의 명령대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