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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혼인을 무르다

  • 한교영은 걸음을 멈추고 경멸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었다.
  • ‘겁이 났나 보네? 봉효진, 네가 아무리 적출이라 하더라도 고작 마을에서 자란 말괄량이에 불과할 뿐, 제후 저택과 혼사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은 네 평생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복이야. 진짜 혼사를 무르면 네 체면도 말이 아닐 테지!’
  •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봉효진을 바라보았다.
  • 봉효진은 그녀의 앞에 다가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비웃었다.
  • “혼사를 무른다고 하더라도 제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한씨 가문에서 무슨 자격으로 혼사를 무른다고 하는 것이옵니까? 이런 추악한 일이 생겼는데도 여기까지 찾아와서 생떼를 쓰며 허세를 부리는 모양새라니, 정말 창피하기 짝이 없네요.”
  • 봉효진은 더 이상 양반집 규수처럼 행동할 생각이 없었고, 그녀의 본모습에 맞게 일을 처리하며 어울리는 말을 하기로 했다. 이런 미천한 사람에게 그녀의 소양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 한교영은 표정이 확 변했고, 봉효진이 이토록 호락호락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 한씨 가문은 당연히 파혼할 수도, 파혼당할 수도 없었다. 이 혼사는 그녀의 아버지가 출정하기 전에 이미 정해놓은 것으로 봉효진은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장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이 또한 그들이 아버지가 출정하고 나서야 황급히 예슬을 집안에 들이려는 이유였다. 예슬이가 집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모든 일은 확정이 나고 아버지는 기껏해야 성을 내며 노여워하겠지만, 사실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 당시 봉효진이 그저 말괄량이에 불과하다고 여긴 한교영은 그녀가 무식하고 멍청해서 몇 마디만 윽박질러도 찍소리도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교활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 한교영은 선우 댁을 바라보았고, 선우 댁도 예상 밖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 그녀는 환한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효진아, 예슬이는 네 사촌 동생이지 않으냐. 그동안 항상 사이좋게 지냈는데...”
  • 봉효진은 차가운 어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 “그녀는 제 사촌 동생이 아니옵니다. 외삼촌이 이처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날뛰는 딸을 낳을 수는 없사옵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와 사이가 안 좋습니다. 만약 절친한 사이라면 제 미래의 부군까지 탐내지 않겠지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다들 가식 떨지 마시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어떠시옵니까.”
  • 선우 댁은 이를 악물었다.
  • “예슬은 이미 임신 중이니 어떻게 하면 집 안으로 들일 것이냐?”
  • “그녀를 집 안으로 들이는 것은 불가능하옵니다.”
  • 봉효진은 선우 댁을 바라보았다. 전생에는 그녀의 웃음이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징그럽기 그지없었다.
  • “하오나, 그녀가 이미 한문석의 아이를 가졌으니 저도 남의 길을 막지는 않겠사옵니다. 국공 저택에서 파혼하되, 혼서를 다시 돌려주시면 앞으로 저와 한문석은 각자의 혼사에 서로 관여하지 않는 것이지요.”
  • 선우 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 “만약 그녀가 평처로 되고 네가 정실로 되면 어떠냐?”
  • “첩은 불가능하옵니다!”
  • 봉효진은 딱 잘라 거절했다.
  • “너... 왜 이렇게 철이 없니? 어쩜 그렇게 잔인한 것이냐! 그녀가 억울함을 꾹 참고 평처가 되겠다는데, 대체 무엇을 더 원하는 것이냐?”
  • 선우 댁은 끝내 화를 터뜨리며 봉효진을 손가락질했다.
  • 봉효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 “억울하다고 했사옵니까? 그녀가 진짜 억울하다고 느끼면 불평불만 하는 건 말도 안 되고,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싶으면 스스로 뒷감당을 해야 하옵니다. 이 일은 이렇게 처리할 테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그녀는 말을 마친 후 그들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 선우예슬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했고, 넓은 소매 속에서 손톱이 살갗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 ‘봉효진, 오늘에 받은 수모는 나중에 반드시 갚도록 하겠다.’
  • 한교영은 선우 댁을 바라보며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 “제후 저택에서 부인이 설 자리는 없는 것 같사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의붓딸마저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니.”
  • 선우 댁은 국공 저택의 부인으로서 한교영의 말을 듣자마자 홧김에 수치심이 들었다. 한낱 시랑 부인이 감히 자신을 비꼬는 것에 대해 그녀는 화를 참을 수 없었고, 오늘 봉효진 그 계집애의 기를 확실히 꺾지 못한 것에 대한 수치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그러고 보니 이 계집애가 옛날에는 감히 나한테 대들지도 못하더니 오늘 왜 이러는 거지? 미쳤나?’
  • 방금 봉효진의 태도를 또다시 떠올린 그녀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지만, 꾹 참으며 한교영을 향해 말했다.
  • “다들 먼저 댁으로 돌아가십시오. 제가 그녀와 얘기를 좀 더 나눠볼 테니 혼사는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시지요. 제후 어르신이 조정에 도착하기 전에 문석과 예슬은 반드시 혼인을 올려야 합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배를 봐서라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지요.”
  • 선우예슬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한문석을 바라보았다. 오늘 한문석의 태도는 그녀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고, 그가 왜 좀 더 강하게 파혼을 밀어붙이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한문석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위로했다.
  • “예슬아, 기다리거라. 내 너와 꼭 혼인을 올릴 것이다.”
  • 한씨 가문 남매를 떠나보내고 선우 댁은 못났다는 듯이 선우예슬을 쏘아보았다.
  •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웬 소란을 피우는 게냐! 망신도 가지가지 하네!”
  • 선우예슬은 눈물을 싹 거두고 눈빛에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 “고모, 저년을 죽여주세요!”
  • 선우 댁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 “사람을 죽이는 게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처럼 쉬운 줄 아느냐?”
  • “고모부는 그녀를 싫어하옵니다. 그녀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추궁할 사람이 아무도 없사옵니다.”
  • 선우예슬이 다급하게 말했다.
  •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비록 국공 나으리께서 그녀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뜬금없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야. 어찌 됐든 그 천한 년은 나으리의 적녀이지 않느냐.”
  • “고모, 그럼 어떡하옵니까? 제 배는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사옵니다!”
  • 선우예슬은 울면서 말했다.
  • 선우 댁은 초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 “알았으니까 그만 떠들 거라. 생각 좀 해볼게.”
  • 봉효진이 이화원에 돌아가자, 해월은 그녀를 우러러보면서 말했다.
  • “아씨, 아까 기세가 진짜 대단하셨사옵니다.”
  • 봉효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이 시큰시큰 거리고 아프기만 했다.
  • 환생 직전의 장면은 끊임없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들을 증오하는 마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녀는 아까 한문석과 선우예슬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죽기 직전에 만약 자신에게 복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맹세했었다.
  • 그녀는 천천히 앉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배를 가렸지만, 평평한 복부가 손에 닿자마자 또다시 그녀에게 가슴이 쥐어뜯기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 “셋째 아씨, 정녕 사리 분별이란 모르는 것이옵니까?”
  • 문발을 거두면서 들어 선 장 어멈은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 봉효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자 받침대에 등을 기댄 채 장 어멈을 향해 손짓했다.
  • “할 말이 있으니 이리 오너라.”
  • 장 어멈은 불쾌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 “셋째 아씨께서 무슨 말을...”
  • 봉효진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고, 장 어멈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벌써 뺨을 두 대 얻어맞았다.
  • 봉효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자, 대체 누가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지 얘기해 보아라.”
  • 장 어멈은 얼굴을 부여잡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지금 소인한테 손찌검하셨사옵니까?”
  • “그래, 왜? 내가 때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느냐?”
  • 봉효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새빨간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보였지만,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 장 어멈은 가슴이 철렁했다.
  • ‘이 계집애가, 어찌하여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지? 일부러 센 척하는 게 틀림없어!’
  • 그녀는 표독스럽게 말했다.
  • “알겠사옵니다. 셋째 아씨께서 소인을 홀시하오니, 당장 마님을 찾아가서 이 댁에서 소인을 쫓아내라고 하겠사옵니다.”
  • 그녀는 선우 댁을 내세워 봉효진의 기를 꺾으려고 했지만, 봉효진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 “가거라, 당장 찾아가거라.”
  • 그녀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자, 장 어멈은 오히려 망신을 당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쌀쌀맞은 태도로 대답했다.
  • “지금 가겠사옵니다.”
  • 쌩하니 찬 바람을 일으키며 떠나가는 장 어멈의 뒷모습을 바라본 해월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셋째 아씨, 이젠 마님이 두렵지 않으시옵니까?”
  • “진짜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 늙은이도 내 상대가 안 되지!”
  • 봉효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해월은 그녀를 따라 마을에서 올라온 사람이었고, 그녀가 무술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 다만, 그 늙은이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지 그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봉효진은 당연히 자기 아버지인 봉국공을 가리켰다.
  • 그는 바로 그녀를 외진 마을에 보내 13년 동안이나 내버려 두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생전에 딱히 그를 미워하는 감정이 없었고, 아버지라는 사람은 다 그런 줄만 알았다. 비록 자신과 다른 태도로 오라버니와 언니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선우 댁은 그녀가 마을에서 자랐기에 만나는 시간이 거의 없어서 당연히 항상 곁에 머물러 있는 자녀만큼 정이 없다고 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