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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닮은 아이

나와 닮은 아이

필애

Last update: 2023-12-03

제1화 컴백

  •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밤, 무거운 커튼이 드리운 방에는 한 점의 빛도 없었다.
  • 침대 위에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뒤엉켜있다.
  • 남자의 거친 숨결이 귓가에 울렸다.
  • 그의 몸은 건장했고 그녀를 다루는 손길 또한 러프했다. 안윤영은 밀려드는 통증에 모대기며 몇 번이나 그를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
  • 하지만 병원에 있는 엄마를 떠올린 그녀는 그를 밀쳐내던 손을 억지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한 번 또 한 번 그의 점령을 받아냈다…
  •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는 드디어 깊은 잠에 빠졌다.
  • 안윤영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고 나갔다…
  • “언니, 어떻게 됐어? 지우민 도련님 편하게 잘 모셨어?”
  • 풀 메이크업을 한 안윤정이 느릿느릿 걸어왔다. 너덜한 모습으로 나오는 안윤영을 본 그녀의 눈빛에 만족이 어렸다.
  • 안윤영이 아무리 예쁘고 성적이 출중하다고 해도 다 무슨 소용인가. 결국 자신의 대역으로 살 수밖에 없는데?
  • “안윤정, 나한테 약속했던 일 잊지 마.”
  • 이를 악문 안윤영은 강직하고 청초한 얼굴을 들었다. 목소리는 모래가 섞인 듯 갈라져 있었다.
  • “이미 카드에 4천만 원 보냈어.”
  • 안윤정은 안윤영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까칠한 목소리에 경멸 어린 비웃음이 가득했다.
  • “언니가 몸을 판 대가인데, 내가 잊을 수는 없지.”
  • 악랄한 말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 하지만 안윤영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핸드폰을 받아든 그녀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 안윤영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안윤정은 그제서야 콧방귀를 뀌고 허리를 비틀며 스위트룸의 문을 열었다.
  • 지우민은 지 씨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다. 그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지만 지 대표님은 늦둥이에 대한 총애가 각별했다.
  • 오늘 밤 지우민은 술이 떡이 되었으니 그녀들이 서로를 바꿔치기한 사실을 모를 것이다.
  • 잠에서 깬 그가 침대 위의 흔적을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를 책임질 것이다!
  • 지우민이 처녀를 좋아하는 것만 아니면 이 기회를 안윤영 그 쌍년에게 양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 안윤정이 막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갔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잠에서 깼다.
  • 힘이 느껴지는 손바닥이 순간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는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포악함을 내뿜고 있었다.
  • “너 누구야?”
  • 금방 잠자리를 마친 그의 목소리는 무척 허스키했다. 약간의 정욕이 배어있었지만 따져 묻는 기세는 너무나 무서웠다.
  • 안윤정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 옆에 있는 남자는 지우민이 아니라 현재 고 씨 가문의 권력자, 고승원이었다!
  • 고 씨 가문은 지 씨 가문 백 개와도 비교가 안 되는 존재였다…
  • 오 년 후, L 시 공항.
  • 길고 깔끔한 트렌치코트를 입은 안윤영이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인파 속에서 걷고 있었다. 예쁜 얼굴,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인 그녀에게 모두들 시선을 집중했다.
  • 다시 익숙한 이 도시로 돌아온 안윤영은 조금 얼떨떨했다.
  • 그때, 4천만 원을 손에 넣은 그녀는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병원에서 그녀에게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모두 전원이 꺼져 있었다고 했다.
  • 그 말을 들은 안윤영은 무너져내렸다.
  • 왜냐면 엄마가 사경을 헤매던 그 순간, 그녀는 지우민의 침대에 있었고 그녀의 핸드폰은 안윤정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안윤정이 엄마의 마지막 살길을 잘라버린 것이다.
  • 엄마의 장례를 치른 안윤영은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뱃속에 애물단지 하나가 더 생겼다…
  • “엄마, 빨리요, 빨리. 저 못 참겠어요.”
  • 갑자기 낭랑한 아이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뜨렸다.
  • 그녀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빨갛게 달아오른 아들의 뽀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암울했던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 “비행기에서 화장실에 가라고 할 때는 안 가더니. 이제 좀 급해?”
  • “엄마!”
  • 안현승은 조금 억울한 듯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
  • “됐어. 공항 화장실이 바로 저쪽이니까 엄마가 데려다줄게.”
  • 안윤영이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다그쳤다.
  • 아들을 끌고 인파를 뚫어 드디어 화장실에 도착했다.
  • “혼자 할 수 있지?”
  • 안윤영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 귀국할 때 아들이 갖고 가겠다던 물건이 하도 많아서 짐이 많았다. 그래서 같이 따라들어가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 “네. 엄마 걱정 마세요. 빨리 나올게요.”
  • 안현승은 그렇게 대꾸하며 쏜살같이 화장실 안으로 달려갔다. 정말 급한 모양이었다.
  • 안윤영이 짐을 들고 밖에서 기다리는데 주머니에 넣었던 업무용 핸드폰이 울려댔다.
  • 안윤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 왜 이 번호가 이렇게 낯이 익지? 업무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번호는 모두 저장해뒀는데…
  • 안윤영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미안한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리사 언니, 죄송해요…”
  • 여자의 목소리에서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목소리도 낯익었지만 안윤영은 이 번호의 주인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 “누구세요?”
  • 안윤영은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 오 년 동안 그녀는 줄곧 해외에서 디자인에 집중했다.
  • 그러다가 눈에 띄어 FM 그룹에 입사한 그녀는 그곳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녀의 코드명은 리사였고.
  • 이번에 귀국한 이유 역시 현승이와 함께 엄마의 묘지에 다녀오려는 것이었다.
  • 마침 FM 그룹의 지사가 선두 기업인 GK 그룹과 제휴를 맺을 구상을 하고 있었다. 대표님은 그녀를 보내 거들어주도록 했다…
  • 수화기 너머의 안윤정은 목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더 부드럽게 했다.
  • “리사 언니, 저는 국내에서 일을 도와드릴 비서예요. 제가 공항으로 모시러 나갔어야 했는데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갈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