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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지우민을 만나다

  • 안윤영은 현승이 때문에 지 씨 가문을 거의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 지강득, 지우민의 아버지, 60대 영감이다.
  • 2년 전 조강지처가 세상을 뜨자 젊은 여자들과 놀아났다. 아들과 비교해도 지나칠지언정 덜하지 않았다.
  • 그때는 아들의 시중을 들라고 하더니 이제는 아버지야? 정말 대단들 하다!
  • 안윤영은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엄마의 유품을 갖고 나가고 싶었다.
  • “필요 없어. 엄마 유품이나 줘!”
  • 그녀의 말이 끝나자 톤이 높은 안윤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윤영, 왜 순진한 척이야! 오 년 전에는 4천만 원 때문에 모르는 사람의 침대에 올라갔잖아. 지 씨 가문에 시집가기만 하면 엄청난 재물을 손에 넣을 텐데 왜 거절해!”
  • 안윤정은 알고 있었다. 고승원이 그녀에게 예비 사모님의 감투를 준 것은 오 년 전에 그녀가 그를 ‘구했기’ 때문이라는걸.
  • 하지만 그 고승원을 구한 사람은 사실 안윤영이었다!
  • 그녀는 절대 그 어떤 누구도 지금 그녀의 삶을 파괴하게 둘 수 없었다!
  • 안윤영이 지강득과 결혼만 한다면 나중에 고승원이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안윤영을 품지 않을 것이다!
  • 오 년 전…
  • 안윤영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 오 년 전에 엄마가 위독하지만 않았다면 자신의 몸을 팔 정도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나 돈 안 부족해.”
  • 그녀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 안윤정은 명품 하나 걸치지 않은 안윤영의 차림새를 보더니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 “언니, 고집 피우지 마. 어차피 지 씨 가문에 대해서 익숙하잖아, 아니야?”
  • 안윤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 “입만 열면 지 씨 가문.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면서 왜 너는 시집을 안 가?”
  • 그들이 엄마의 유품을 건네줄 생각이 없는 것을 눈치챈 안윤영은 더 이상 힘 빼기 싫었다.
  • 그녀는 사리에 밝았다. 엄마의 유품을 받으면 좋겠지만 받지 못한다고 해도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다.
  • “다른 일 없으면 그만 가볼게.”
  • 안윤영은 말을 마치고 나가려고 했다.
  • 안윤정은 그 모습에 서둘러 다가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안윤영, 문밖으로 나가서 후회하지 마!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으면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종업원? 술집 아가씨? 아니면 기생?”
  • 안윤영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 “정말 미안하게 됐네. 네가 생각한 대로 살아주지 못해서. 나는 지금 FM 그룹의 수석 디자이너야. 그깟 돈 부족하지 않아.”
  • “수석 디자이너? 리사?”
  • 안윤정은 그녀를 보며 살짝 톤을 높였다.
  • “응.”
  • 안윤영이 대꾸했다. 자신의 명성이 이 정도로 커서 안윤정까지 알 줄은 몰랐다.
  • 말을 마치자 안윤정이 푸흡, 하고 웃었다.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 “안윤영, 허세를 부리고 싶어도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댈 필요는 없잖아? 리사는 40대 여자야. 경험도 풍부하고 기교도 뛰어난데 너 같은 사람이랑 비교가 돼?”
  • 40대 여자?
  • 안윤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았다.
  • “믿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나가자마자 추위가 몰려왔다.
  • 그녀는 코트를 여미고 비를 맞으며 달려갔다.
  • 그녀는 이곳에 잠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 안윤영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아들은 소파에서 노트북을 끌어안고 놀고 있었다.
  • 그녀가 들어서자 아이는 바로 노트북 전원를 껐다. 도둑이 제발 저린 표정이었다.
  • 안윤영은 슬리퍼로 갈아 신고 재밌다는 듯 아들 앞에 다가섰다.
  • “뭐 했길래 엄마한테 안 보여줘?”
  • 안현승은 노트북을 끌어안았다. 크고 맑은 눈동자에서 애꿎은 순진함이 보였다.
  • “현승이 혼자만의 비밀이에요. 엄마라도 말 못 해요.”
  • 안윤영은 긴장한 아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늦었어. 현승이 이제 자자. 노트북 하지 마.”
  • 안윤영은 집으로 돌아와 아들만 보면 최악이었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 아이는 정말 그녀의 수호천사였다…
  • 이튿날 아침, 안윤영은 어제 속상했던 일을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냈다.
  • 막 방을 정리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낯선 번호였다.
  •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 “리사님이신가요?”
  • 수화기 너머로 시원시원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윤영은 핸드폰을 힐끔 쳐다보았다. 업무용 번호인 것을 확인한 그녀가 대꾸했다.
  • “맞는데요.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지오 패션의 총괄 매니저 지우민입니다. 저희가 늘 리사님과 콜라보를 진행하고 싶었거든요. 귀국하셨다고 들었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만나 뵐 수 있을까요?”
  • 지우민의 말투는 부드럽고 예의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겸허한 도련님 같았다.
  • 리사가 GK 그룹과 콜라보를 진행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 소문을 들은 패션 업체에서도 앞다투어 리사와 콜라보를 하려고 혈안이었다. 모두들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고 안달이었는데 지 씨 가문도 빠질 수 없었다.
  • 리사의 번호를 받기 위해 그는 큰 대가를 지불했다. 결국 안윤정에게서 받아냈으니 그녀에게 큰 신세를 진 셈이었다.
  •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던 안윤영은 그동안 봤던 그에 대한 기사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지우민이 겸허한 도련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막 거절하려는데 안현승이 방에서 나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엄마, 나 배고파요.”
  • 안윤영이 멈칫했다.
  • 이 자식이 늘 자신의 아빠를 보고 싶어 했는데 이번이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 안윤영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
  • “좋아요. 오늘 오후 세 시. 미드 백화점의 카페에서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