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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아내의 방에 있는 남자

  • 방문을 닫은 하 어르신은 다시 존경에 찬 눈으로 임찬을 바라봤다.
  • “저는 하금염이라고 합니다. 혹 선생님의 존함을 여쭤봐도 괜찮을런지요?”
  • “임찬이라고 합니다.”
  • “임찬 선생님이셨군요.”
  • 하 어르신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병상에 누워있는 임희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임 선생님, 혹 제가 더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 임찬은 한참 말이 없더니 책상 위에 놓인 종이와 펜을 들어 슥슥 써내려갔다.
  • “그러면 약을 좀 지어다 주세요.”
  • 임찬은 그 종이를 하 어르신에게 건네며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고작 몇 천 원밖에 안 되자 임찬은 어쩐지 난감해졌다. 이 처방전에 적힌 약재들 중 일부분은 꽤 비싼 약재들이라 다 준비하려면 적어도 30만 원은 있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임찬이 꺼내 들은 이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 임찬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하 어르신은 얼른 처방전을 받아 들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임 선생님, 성원대약국에서는 제가 그래도 아직 말이 꽤 먹히는 지라 이 약재들은 굳이 돈을 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 임찬은 하 어르신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지만 전 다른이에게 빚지고 못사는 성격인지라, 이렇게 하죠. 이 처방전에 적힌 약재들을 각 10회분씩 준비해주시면 이 처방전을 어르신께 드리겠습니다.”
  • 만약 일반인이 하 어르신에게 이런 말을 했더라면 그건 크나큰 무례를 범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찬에게서 이 말이 나오자 하 어르신은 임금의 선유라도 받은 듯했다. 조화신침을 시침할 수 있는 자는 감히 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써준 처방전이니 그야말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이었다.
  • “감사합니다, 임 선생님!”
  • 하 어르신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보물이라도 얻은 듯 처방전을 든 채 종종 걸음으로 달려나가더니 얼마 안 되어 다시 손에 한가득의 짐을 든 채로 돌아왔다.
  • “임 선생님, 적으신 처방전의 약재들이니 한 번 봐주시죠.”
  • 하 어르신이 말하자 임찬은 약재들을 쓱 둘러봤다. 하 어르신은 꼼꼼하게 모든 약재들을 잘 분류해 놓은 것 같았고 냄새로 보나 모양새로 보나 약재들은 모두 최상품인 듯했다. 옥패의 전승을 받은 임찬은 그의 선조가 일평생 배웠었던 학문과 행의 경험들을 모두 전수 받아 비록 이 약재들을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한 눈에 그 약재들의 좋고 나쁨을 알아볼 수 있었다.
  • “감사합니다, 하 어르신!”
  • 약재를 건네 받은 임찬은 그 중에서 한 봉지를 꺼내들어 풀어헤쳤다. 그러자 하 어르신도 얼른 약재를 지을 수 있게 기기를 준비해놓고 숨을 천천히 내쉬며 옆에 가만히 서있었다. 사실 약재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그 약을 짓는 방법이었다. 많은 독특한 처방전들은 그에 따르는 특별한 닳이는 방법이 따랐으며 그렇지 않을 시 약효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임찬은 약 닳이는 방법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조금전 약 처방을 하 어르신에게 드리겠다 했으니 모든 걸 다 알려드릴 생각이었다. 임찬은 그 약재들을 한꺼번에 모두 넣는 것이 아닌 순서대로 넣기 시작하며 한편으로 하 어르신에게 설명도 덧붙였다.
  • “약을 넣는 시간, 불의 세기, 순서, 그리고 약탕관의 재질 등, 이 처방을 짓는데 있어 그 어느 하나라도 빠트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니 꼭 모든 절차들을 잘 기억해두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을 닳이는데 문제가 생겨 약효가 좋지는 않을 거예요.”
  • 하 어르신은 초등학생이라도 된 듯 종이와 펜을 들고는 꼼꼼히 임찬의 모든 말을 가슴에 새겨 넣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자 약이 완성되었고 약탕관의 뚜껑을 열자 잡냄새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맑고 깨끗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 냄새를 맡자 하 어르신은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 “임 선생님, 이 탕약은 무엇인지요? 향기가… …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죠?”
  • 그러자 임찬이 담담하게 말했다.
  • “소귀원단이라 합니다. 부상을 치료하는 데에 뛰어난 효능을 발휘하죠. 일반 사람이 복용했을 때 신체를 건강히 하는 것은 물론 장수에도 그 약효가 좋습니다.”
  • “단이라고요?”
  • 하 어르신은 눈 앞의 탕약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리고 곧 가까이 다가갔는데 역시나 약탕관에는 10여 알의 검은색 단약이 바닥에 깔려있는 게 보였다.
  • “이, 이게 연단하는 과정이었단 말입니까?”
  • 하 어르신은 눈을 크게 떴다. 그도 이런 방법은 들어본 적은 있으나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임찬은 약탕관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더니 물과 함께 임희에게 먹였다. 하 어르신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임희의 몸에 나있는 상처들이 천천히 회복되고 있는 게 느껴졌다.
  • “정말… …정말 신기하군요!”
  • 하 어르신은 깊은 감탄을 했다. 이런 일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약탕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아마 약탕관에 있는 단약 하나만 갖고도 최고가에 팔 수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상처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서야 임찬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로서 임희의 명은 지켜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약탕관에서 단약 3알을 꺼내더니 하 어르신에게 건넸다.
  • “이 3알은 어르신께 드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임 선생님.”
  • 하 어르신은 사양하지 않고 얼른 두 손을 내밀어 약을 건네 받았다. 그는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 단약은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것이기에 단약을 아주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은 하 어르신은 탄복한 얼굴로 임찬을 공손하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젊은 나이에 하늘을 거스르는 의술을 행할 수가 있다니, 앞으로 임찬의 성취는 절대로 광양시가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아닐거라 하 어르신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현재 임희의 목숨은 살렸으나 호흡이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임찬은 침대 옆에 앉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병상을 지켰다. 그에게 남은 가족은 이제 동생 하나밖에 없었기에 그녀에게 아무런 사고도 생기게 해서는 안 되었다. 하 어르신은 여러 번 찾아왔고 또한 사람들을 시켜 먹을 것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임찬은 전혀 뭘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 그렇게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임희의 호흡이 차츰 안정되자 임찬은 겨우 숨을 뱉을 수가 있었다. 이제 임희의 목숨은 완전히 생사의 갈림길에서 건져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제서야 배고픔을 느낀 임찬은 옆에 놓인 밥을 들고는 반찬이 모두 식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후루룩 먹어 치웠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임찬은 한참을 생각에 잠기더니 그래도 허윤하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가 자신한테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3년 동안 부부로 살면서 이렇게 몰인정한 것은 너무 가슴을 찌르는 일이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자 임찬의 마음도 목구멍 끝까지 들렸다.
  • “윤하야… …”
  • 임찬이 한마디도 채 꺼내기 전 전화 너머에서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는 윤하가 아닙니다.”
  • 임찬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 곧 11시가 되어가는 시간, 어찌하여 아내의 전화를 남자가 받는 거지?
  • “누구십니까?”
  • 임찬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윤하는요?”
  • “윤하요? 아, 아까 운동을 좀 했더니 몸에 땀이 났다고 지금 샤워하고 있어요.”
  • 남자의 목소리가 으스대고 있었다.
  • “그리고 제가 누군지는, 하하, 한 번 맞춰보시죠?”
  • “윤하의 핸드폰을 왜 당신이 받죠? 윤하는… …윤하는 지금 어디서 샤워하고 있는데요?”
  • 임찬이 다급하게 묻자 남자는 큰 소리로 웃으며 답했다.
  • “저희가 한 방에 있거든요. 윤하가 샤워하고 있으니 당연히 핸드폰이 제 손에 있는 거고요. 그리고 샤워야 당연히 욕실에서 하고 있겠죠. 아니면 뭐, 주방에서 하고 있겠어요?”
  • “둘이 어떻게 한 방에 있는 거죠?”
  • “저녁에 남녀가 한 방에 있는 게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 남자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 “이렇게 늦게 전화를 걸다니,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방해할까 봐 걱정되지도 않나 보죠?”
  • “당신… … 당신… …”
  • 임찬의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 “당신 도대체 누군데?”
  • “제가 누군진 상관 말고요, 대신 저는 그쪽이 누군지 잘 알죠.”
  • 남자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 “당신이 허윤하의 루저 남편 임찬 맞죠? 하하하! 허윤하랑 결혼을 3년이나 해놓고 아직 그녀와 잔 적 없다면서요. 쯧쯧, 그러면 당신 아내의 몸매와 피부가 얼마나 좋은지 아직 모르겠네요? 하하하!”
  • 말을 마친 남자는 전화를 끊어버렸고 화가 잔뜩 난 임찬이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받는 사람이 없었다. 계속 걸어도 계속 받지 않는 전화, 임찬은 자신이 전화를 몇 번 걸었는지도 모른 채 계속 걸다가 배터리가 다 나가서야 멈출 수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임찬은 한자리에 멍하니 서있었고 그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겨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과 결혼한지 3년이나 되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은 거였구나! 그래서 허씨 가문의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대한 거였어! 역시 그들은 처음부터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거야!
  • 막연히 침묵을 지키던 임찬의 가슴에 순간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순간 몸을 벌떡 일으킨 임찬은 이를 꽉 깨물었다.
  • “허씨 가문, 이번 일은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꼭 강해져서 너희들을 후회하게 만들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