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6화 그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 한쪽 발을 이미 어코드에 들여놓았던 방혜는 갑자기 마이바흐의 차문을 연 임찬을 보고 놀라서 그대로 멈췄다. 허건공과 황양도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임찬이 빌려왔다던 차가 바로 저 못해도 8억 원은 된다던 마이바흐였단 말이야?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분위기가 일순간 어색해지며 모든 사람들이 임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운전자석에 올라앉은 임찬이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저희 빨리 가야 돼요.”
  • 방혜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허건공과 마주 보았다가 얼른 어코드에서 몸을 뺐다. 농담하는 것도 아니고, 마이바흐가 있는데 어코드를 타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어코드를 타고 허윤하를 데리러 가면 무조건 체면 사는 일인가? 그건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마이바흐와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
  • 제자리에서 멍을 때리고 있었던 황양은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차에 올라 탄 방혜는 신기한 듯 차 안을 둘러보며 부러운 얼굴을 하였다. 그녀는 비록 차에 대해 잘 몰랐으나 그래도 이 차가 비싼 차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가죽으로 된 시트는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에 앉은 것처럼 편했으며 또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이것저것을 조절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차 안에 장착된 무드등 또한 내부의 분위기를 딱 적당하게 밝혔다. 차를 운전할 때는 잡음이 하나도 없이 매우 조용했는데 제일 관건적인 건 바로 차의 주행 과정이 매우 안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도로 상황은 울퉁불퉁하였으나 차 안의 사람들은 일말의 흔들림도 느끼지 못한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비싼 차였다. 당연히 방혜보다는 조금 더 견식이 넓었던 허건공은 한 눈에 지금 이 차가 자신의 아버지가 타고 다니는 차보다 더 비싼 차라는 걸 알아챘다. 한참을 침묵했던 허건공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임찬, 이 차 어디에서 났어?”
  • 방혜도 임찬을 얼른 쳐다봤다. 그들은 임찬의 상황을 잘 알았다. 임찬의 지인 중에 허술한 차라도 갖고 있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던 터라 이렇게 비싼 차를 어디에서 빌려올 수 있었는지 두 사람은 의아했다.
  • “친구한테서 빌렸어요.”
  • 임찬이 가볍게 대답했다.
  • “친구 누구? 이름이 뭔데?”
  • 그러나 허건공은 계속해서 물었다.
  • “두 분은 모르는 사람이에요.”
  • 임찬이 대충 둘러댔다. 허건공은 그 뒤에도 계속 캐물었으나 임찬은 여전히 한마디로 딱 잘라 대답했다. 허건공은 조금 실망을 했다. 저렇게 말을 삼가는 임찬을 보니 그 친구가 격이 딸리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 “임찬, 사람은 정정당당해야 돼. 사람이 가난한 건 흉이 못 돼. 마음이 가난한 거야 말로 제일 무서운 거라고!”
  • 느긋하게 한마디를 던진 허건공은 눈을 감고는 그 뒤로 말을 하지 않았다. 방혜도 남편의 뜻을 대충 알아들었는지 임찬을 향한 시선에 무시가 조금 담긴 게 보였다.
  • 공항에 도착한 세 사람이 출구에서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어 사람들이 무리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유난히 사람의 이목을 끄는 여자가 한 명 있었는데 하얀 셔츠에 검정 오피스 수트, 거기에 검은색 짧은 치마를 입은 그녀는 하얀 피부에 잘 빠진 몸매로 전형적인 직장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큰 선글라스를 껴서 얼굴 반쪽이 다 가려졌으나 드러난 나머지 반쪽의 얼굴로 봤을 때 사람들의 질투를 불러모을 정도로 정교하였다. 그 여자가 바로 광양시에서 한때 이름을 날렸었던 제일의 미녀, 임찬의 아내인 허윤하였다.
  • 허나 그런 허윤하의 곁에는 웬 낯이 반반한 청년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몸을 아래위로 휘감은 아르마니나 손목에 찬 파텍 필립으로 봤을 때 그 청년의 신분이 비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청년은 임찬도 본 적이 있었던, 광양시 최 씨 가문의 후계자 최일범이었다. 그는 예전에 허윤하를 꽤 오랫동안 따라다녔었으며 그녀를 꼭 손에 쥐겠노라 여러 번 대외적으로 선포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이 한 비행기를 타고 왔을 줄이야, 그것도 둘이서 나란히 밖으로 걸어 나온 사실에 임찬은 가슴이 콕콕 쑤셨다. 허건공과 방혜는 이미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 “아이고, 최 도련님. 저희 윤하를 돌봐주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 방혜의 얼굴에 아부의 웃음이 잔뜩 걸려있었다. 만약 최일범이 허윤하를 아내로 얻으면 자신의 집이 또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옷을 초라하게 갖춰 입은 임찬을 보자 방혜는 또 한 번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을 같이 놓고 비교하자니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 비싼 차를 빌려와도 어쩌랴? 최일범의 가문이 마이바흐를 살려면 큰 힘을 들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차와 빌려온 차는 비교조차도 안 되었다. 최일범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 “아니에요, 방 이모. 다 제가 응당 해야 될 일인데요, 뭘.”
  • 옆에 서있었던 임찬은 속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매우 익었다. 저 사람, 어제 저녁 허윤하의 전화를 받았던 남자 아냐? 그 순간 임찬은 마음이 완전히 식는 걸 느꼈다. 어제 저녁에 자신의 아내인 허윤하가 저 최일범이랑 한 방에 있었다니. 방혜와 허건공이 한창 최일범과 친사를 주고받는데 차가운 얼굴을 한 허윤하가 그들 곁으로 걸어왔다.
  • “집에 가요. 저 피곤해요.”
  • 허윤하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녀는 임찬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듯 쳐다도 보지 않았다.
  • “얘도 참, 그렇게 급할 게 뭐 있어? 오랜만에 최 도련님 만났는데 좀 수다나 떨면 어때서!”
  • 허윤하는 엄마의 말에도 무시하고 손에 든 짐을 임찬에게 맡기더니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를 악문 임찬은 짐을 그냥 내팽개치고 싶었으나 결국에는 참았다. 어제 저녁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건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던 임찬은 화를 내더라도 모든 게 다 밝혀지고 난 후에야 내야겠다 생각했다. 묵묵히 짐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는데 글쎄 최일범이 허윤하를 따라잡았다.
  • “윤하 씨, 제가 데려다 줄게요.”
  • 최일범이 웃으며 말했다.
  • “제가 얼마 전에 페라리를 사서 윤하 씨가 같이 시승해줬으면 하는데.”
  • “페라리요?”
  • 방혜가 옆에서 큰소리로 감탄했다.
  • “그 차 꽤 비싸잖아요. 얼마 주고 사셨는데요?”
  • “많이 안 비싸요. 12억 원 정도일 뿐이에요.”
  • 최일범이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저번 프로젝트에서 큰 돈은 아니지만 조금 벌어서요, 저한테 수고했다는 의미로 차를 하나 뽑았어요.”
  • 역시 최 도련님께서는 유능하세요. 이렇게 젊으신데도 벌써 장사에 그리 밝으시다니, 너무 존경스럽네요!”
  • 감탄을 금치 못하던 방혜가 임찬을 힐끔 바라보더니 더 차가운 눈빛을 쐈다. 두 사람의 차이가 너무도 컸다. 방혜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윤하야, 너 최 도련님이랑 같이 가면서 일 얘기도 좀 하지 그래?”
  • 허윤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최일범이 얼른 웃으며 덧붙였다.
  • “맞아요, 윤하 씨. 마침 저희 회사가 최근에 의료 프로젝트에 투자를 하려고 생각 중이었거든요. 집 가는 길에 얘기를 좀 나누죠, 우리.”
  • 말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어느새 출구에 도착했다. 그러자 밖의 도로 위에 주목을 끄는 빨간색의 스포츠카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힐끔대는 차의 옆에는 한 젊은이가 서있었는데 최일범을 발견한 그는 얼른 앞으로 달려가 최일범을 맞이하여 말했다.
  • “최 도련님, 차를 준비해놨습니다.”
  • 최일범은 차 키를 건네 받고 걸어가 차 문을 열더니 신사적인 포즈를 취하며 웃었다.
  • “윤하 씨 타세요.”
  • 그들 주위에서 꽤 많은 여자들이 부러운 눈길로 허윤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싼 외제차에 신사적이고 돈 많은 도련님이라, 그를 거절할 수 있는 여자는 없어 보였다. 방혜도 옆에서 허윤하를 부추겼다.
  • “윤하야, 얼른 타. 최 도련님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 허윤하는 마치 탈까 말까 고민하는 듯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임찬은 또 마음이 아파져 오는 걸 느꼈다. 남편이 직접 데리러 왔는데 다른 남자의 차에 타야 되나 망설이는 꼴이라니, 허윤하야, 허윤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남의 눈치 따위는 볼 필요가 없어졌다, 이거니?
  • 허윤하의 주저하는 모습을 본 최일범은 재빨리 웃음 가득한 얼굴로 임찬에게 말했다.
  • “임찬 씨, 저랑 윤하 씨가 비즈니즈 때문에 할 얘기가 좀 있는데 괜찮으시죠?”
  • 임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짐을 들고 마이바흐의 옆으로 다가가 뒤 트렁크를 열고 짐을 쑤셔 넣었다. 놀란 듯한 허윤하는 잠깐 생각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어쩔 수 없다는 듯 내저었다.
  • “최 도련님, 죄송하지만 저 가족들이랑 같이 갈게요. 일 얘기는 다음에 하는 걸로 해요.”
  • 그 시각, 임찬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차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만약 허윤하가 그 차에 오른다면 그들의 인연이 다하였음을 설명하며, 이 모든 건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허윤하는 끝내 그 차에 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이 혼인을 다시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하지만 차가운 표정을 한 허윤하를 보며 임찬은 또 다시 가슴이 아파졌다. 나랑 같이 집에 가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웠나?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넌 아마도 최일범 그 사람이랑 집에 돌아갔겠지?
  • 최일범의 옆에 서있던 젊은이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 “젠장, 저 자식 뭐야? 남의 집에 빌붙어 사는 못난이가 감히 우리 최 도련님에게 창피를 줘? 최 도련님, 여기서 잠깐 계세요. 제가 가서 아주 그냥 혼을 낼 테니까!”
  • 젊은이가 뛰쳐나가려는데 최일범에게 바로 잡혔다. 눈 앞의 차를 본 최일범은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 “가, 가지 마!”
  • “왜 그러세요?”
  • 젊은이가 의혹스런 얼굴로 물었지만 최일범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임찬이 탄 차가 떠나가서야 홀가분한 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 “최 도련님, 왜 그러시는데요?”
  • 젊은이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 “고작 마이바흐일 뿐이잖아요. 제일 비싸 봐야 8억밖에 안 할 텐데, 12억 원 가치의차를 탄 우리가 저 사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잖아요.”
  • 그러자 최일범은 그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네가 뭘 알아! 차의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고 차에 붙여져 있던 로고가 관건이라고!”
  • “무슨 로고요? 차 번호? 별 거 없던데요?”
  • 젋은이가 말했다.
  • “최 도련님, 도련님 차 번호에 8이 3개나 있어요. 저 사람보다 훨씬 비싼 차 번호라고요!”
  • “내가 말한 건 통행증이라고!”
  • 최일범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 “너 못 봤어? 망강원의 통행증은 전 시를 합쳐도 50개가 채 안 돼. 저 통행증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174억 원이야. 그런데 감히 거기에 비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