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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각박한 집주인

  • 옆에 있던 진성원은 천하의 남패천이 다른 사람한테 무릎 꿇은 모습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번 일로 남패천이 임찬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음은 명백한 일이었다.
  • “천만의 말씀입니다, 남 선생님.”
  • 임찬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 “무릇 의원들은 부모의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 듯 다 제가 응당 했어야 되는 일인 걸요. 그러니까 너무 괘념치 마세요. 다만, 제가 남 선생님께 부탁드릴 게 하나 있는데......”
  • “말씀만 하세요, 임 선생님!”
  • 남패천이 얼른 대답했다.
  • “무슨 일이 됐든, 그게 도산화해일지라도 저 남패천은 만 번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꼭 들어드리겠습니다.”
  • “다름이 아니라 이번 일을 밖에 퍼뜨리지 말았으면 해서요.”
  • 임찬이 가볍게 얘기했다.
  • “저는 조용한 걸 즐기거든요.”
  • 멈칫한 남패천은 곧 임찬의 뜻을 이해하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오늘 일은 그 누구도 밖으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 그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남패천의 말은 곧 성지와도 같아 누구도 그 뜻을 거스를 자가 없었다. 임찬은 새로 처방전을 하나 써내려 갔다.
  • “남 아가씨께서 비록 깨어나셨지만 필경 1년이라는 시간을 앓아 누우셨기 때문에 몸이 많이 허약해졌을 거예요. 더군다나 아가씨께서는 난치병도 앓고 계시니 회복하는데 더 어려움이 있을 거고요. 이 처방전은 아가씨의 원기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인데 보름 정도면은 완전히 기력을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남 선생님께서 다시 따님을 데리고 저를 찾아오시면 제가 그 난치병을 치료해드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임 선생님!”
  • 뜻밖의 수확에 남패천은 얼른 손을 내밀어 처방전을 건네 받으려 했다.
  • 그러나 임찬은 처방전을 그에게 건네는 대신 옆에 있던 하 어르신에게 줬다.
  • “남 선생님. 자고로 약 제조는 대충 뚝딱 만든다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약 제조 과정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생긴다면 약 효과가 크게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약을 제조하는 일은 하 어르신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어찌 됐든 하 어르신의 경험이 좀 더 풍부하니깐요.”
  • 임찬이 말을 마치자 하 어르신은 아예 넋을 놓았다. 사실 겉으로 봤을 땐 임찬이 그에게 일거리를 하나 던져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이것은 엄청난 기회였던 것이다. 만약 그가 이곳에 남아 직접 약을 제조하고 남 아가씨를 보살펴 쾌차하실 수 있게 도움을 준다면 남패천이 그 일로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안 게 될 게 분명했다. 일반 사람이라면 아예 꿈조차 꾸지 못할 기회였다. 임찬의 제안에 남패천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그럼 임 선생님의 말대로 하죠. 하 어르신, 이번 일은 그럼 어르신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 “천만의 말씀을요, 남 선생님. 제가 응당 해야 되는 일입니다.”
  • 하 어르신이 연신 손을 모으며 부탁에 응했다. 남패천과 인사를 나눈 뒤 임찬은 성원대약국으로 돌아왔다. 임희의 신체상황이 정상 범주로 들어서자 임찬은 그녀를 데리고 집에 돌아가려 준비했다. 어째 됐건 대약국에 계속 남아있는 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 어르신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여러 번을 말렸으나 번번이 임찬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하 어르신은 할 수 없이 그들이 살고 있는 집, 광양시 북집 시가로 두 사람을 모셔다 드렸다.
  • 그곳은 광양시에서 유명한 빈민가로 대부분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임찬이 비록 허 씨 가문에 장가를 갔으나 그를 따라 갈 수 없었던 임희 때문에 할 수 없이 이곳에서 동생에게 집을 세맡아 줬다. 임찬도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 하 어르신은 허름한 동네를 보며 의아해했다. 임찬의 의술로 돈을 벌려면은 그야말로 손을 뒤집듯이 쉬웠을 텐데 어찌하여 이리도 구석진 곳에 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안 지나 그들을 태운 차가 임찬이 세를 맡은 집 근처에 도착했다. 임찬은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자신의 이불과 옷가지들이 문밖에 버려진 걸 보게 되었다. 얼굴색이 확 변한 그는 얼른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갔고 때마침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던 집주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집주인은 이 동네에서 드세기로 유명한 아줌마였는데 어찌나 탐욕스러운지 그녀 때문에 임찬도 적지 않게 괴롭힘을 당하곤 했다.
  • “아! 마침 잘 왔네.”
  • 집주인은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임찬을 가리키며 말했다.
  • “저 집을 이제 더 이상 그쪽한테 세를 못 주겠으니까, 물건은 아까 내가 다 들어냈거든? 그러니까 저걸 얼른 다 주워 갖고 여기서 꺼져!”
  • “왜요?”
  • 화가 난 임찬이 따졌다.
  • “전 집세를 이미 다 냈는데요?”
  • “그래서?”
  • 집주인이 오히려 더 크게 호통쳤다.
  • “그쪽 동생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 물어? 걔가 우리 집에서 죽어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세를 주겠어?”
  • “그래도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되죠!”
  • 임찬이 큰 소리로 외쳤다.
  • “전 이미 방세를 다 냈다고요. 그리고 이사 통보를 내리려면 다른 곳을 알아볼 수 있게 미리 얘기를 했어야죠!”
  • “내 집을 내가 처분하겠다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 집주인도 지지 않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 “공짜 밥이나 얻어 먹는 데릴사위 주제에, 오줌이나 찍 싸서 들여다보지 그래? 지가 나랑 따질 자격이나 있는지 말이야!”
  • “그쪽은……”
  • “그쪽이 뭐? 빨리 안 꺼지면 남편 불러서 네 다리를 분질러 놓는다?”
  • 바로 그때, 하 어르신이 천천히 다가왔다.
  • “누구 다리를 분지른다고요?”
  • 집주인은 하 어르신을 힐끔 보더니 살짝 기 죽은 듯 말했다.
  • “당신이랑 뭔 상관인데요?”
  • “임 선생님은 제 지인입니다. 그러니 그의 일이라면 곧 제 일이기도 하죠.”
  • 하 어르신이 냉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누구 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요?”
  • 하 어르신이 내뿜는 기세에 당황한 집주인이 가까스로 침착한 척 큰 소리를 쳤다.
  • “왜요? 제 집을 제가 세 주기 싫다는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집을 내놔라 협박이라도 하게요? 당신들 강도예요?”
  • “걱정마세요. 임 선생님께서 앞으로 당신 집에 살지 않을 테니까요!”
  • 하 어르신이 담담하게 물었다.
  • “임 선생님, 제가 광양 강변에 망강 별장을 한 채 갖고 있거든요? 혹 괜찮으시다면 거기서 잠시 지내시는 게 어떠신가요??”
  • 하 어르신의 말에 집주인은 멈칫하더니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 “망강 별장? 늙은이가 못하는 거짓말이 없네요. 망강 별장 한 채에 얼마나 하는지 알기나 해요? 52억 없이는 거긴 꿈도 못 꾸는 곳이라고요, 52억이 얼마나 되는지 본 적이나 있어요?”
  • 하 어르신은 집주인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임찬을 공손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임찬은 하 어르신이 이번 기회를 빌어 그와 가깝게 지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임찬은 당연히 그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지금 돈이 필요했고 이런 제안도 당연히 필요했다. 임찬이 남패천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던 건 그에게 더 중요한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남패천의 가치는 절대 금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건 그의 세력이었다.
  • “그럼 하 어르신께 신세를 져야겠습니다.”
  • 하 어르신은 매우 기뻐하며 얼른 말했다.
  • “임 선생님께서 제 집에서 머무르시다니, 제 영광이네요. 소정아, 얼른 임 선생님 짐을 차에 실어라.”
  • 그러다 잠깐 뭐가 생각났는지 하 어르신은 멈칫하며 이어 말했다.
  • “그리고 사람을 불러서 이곳 일도 처리해라 그래. 임 선생님의 임대기간도 끝나지 않으셨는데 집주인에게 강제로 쫓겨나게 됐으니 이건 엄연한 계약 위반이거든. 그러니 회사 법무부에서 이 일을 맡아서 진행하라고 해. 물론 제일 강력한 처벌을 받아내라고 하는 것도 잊지 말고!”
  • 하 어르신의 기사인 소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하 어르신.”
  • 집주인은 당황하여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일을 법정까지 끌고 갔다가는 그녀가 끝장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어르신, 제가 농담한 거예요. 임찬 씨, 저 집 말인데요. 제가 그냥 다시 세를 드릴게요……”
  • 집주인이 아무리 애원해도 아무도 그녀를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 어르신은 직접 임찬을 도와 짐을 차에 싣고는 그를 태우고 떠났고 그곳에는 오직 집주인만이 주저앉은 채 혼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