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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광양의 왕

  • 임찬은 성원대약국으로 돌아왔다. 하 어르신은 자리에 없었지만 약국의 사람들이 임찬을 아주 공손하게 대했다. 병실에 누워있는 임희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하 어르신이 특별히 간호사 두 명을 데려와 임희의 병상을 지키게 한 듯했다.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밖에서 난잡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하 어르신의 기사인 소류가 달려 들어오더니 임찬을 발견하고는 매우 기뻐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 “임 선생님, 드디어, 드디어 오셨네요!”
  • “무슨 일인데요?”
  • 임찬이 궁금한 듯 물었다.
  • “시간이 좀 빠듯해서, 혹시 저랑 같이 좀 가주실래요? 가는 길에 제가 설명 드릴게요.”
  • 소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하 어르신께 큰 일이 생겼거든요!”
  • 임찬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 어르신이 그에게 잘 대해줬던 터라 그의 일이라면 손 놓고 방관할 수가 없었다.
  • “갑시다!”
  • 임찬이 소류를 따라 문을 나섰고 소류가 운전한 차는 빠른 속도로 교외로 빠졌다. 가는 길에 소류가 자초지종을 임찬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일은 진성원에게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진성원의 배후에는 거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남패천이라고 광양의 왕이라 불렸다. 광양시의 10대 가문 가주들도 남패천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며 복종을 해야 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 남패천에게는 외동딸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딸이 작년에 차 사고를 당하면서 식물인간이 되자 남패천은 수많은 명의들을 불러다가 치료를 하게 했으나 누구도 딸을 치료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하 어르신이 준 소귀원단을 먹고 효과를 본 진성원이 하 어르신에게서 하나를 더 얻어 남패천에게 바치면서 딸에게 먹이라고 하였고, 당연히 효과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좋았던 단약을 먹은 남패천의 딸은 크게 몸 상태가 좋아졌으나 그래도 깨어나지 못하여 진성원이 하 어르신을 불러 직접 남패천의 딸을 치료하게 했던 것이다.
  •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하 어르신은 거절하려 했으나 그 자리에 있었던 또 다른 신의 하나가 그를 들쑤시는 바람에 침을 들어 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치료는 남패천의 딸을 깨우기는커녕 오히려 병세를 더 위독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 신의라는 사람이 기회를 틈 타 남패천에게 하 어르신을 돌팔이 의사라고 일러바치며 일전에 하 어르신이 자신한테서 단약을 훔쳐갔었다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화가 난 남패천은 하 어르신을 죽이려 했고 하 어르신은 얼른 임찬의 일을 그에게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남패천은 그에게 2시간이라는 기회를 주며 만약 임찬을 찾아오지 못할 시 하 어르신을 죽이겠다 엄포를 놓았다.
  • 소류는 약국에 도착한 지 30분이나 돼서야 임찬을 만날 수 있었고 현장에서 임찬에게 자세한 내막을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 “임 선생님, 그 신의라는 자의 이름이 사방명인데 그 사람은 10대 가문 중 사씨 가문의 사람으로서 광양시에서 의술로는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 소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하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아마도 그 사람이 임 선생님의 약 처방을 탐 내어 우리가 그의 단약을 훔친 거라 잡아떼는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좀 있다 그 사람을 꼭 조심하셔야 돼요!”
  • 임찬은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단약을 얻어낼 궁리를 하다니, 그 사방명이라는 자가 참말로 괘씸했다. 말을 마친 소류는 임찬을 데리고 남패천의 집으로 향하였다.
  • 남패천은 커다란 장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면적이 몇 만 평에 달하였으며 장원 안에는 곳곳에 진귀한 식물들이 자라 있었고 저택 또한 궁전마냥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2층에 다다른 임찬은 하 어르신을 포함한 사람 한 무리를 발견했다. 하 어르신의 옆에는 얼굴이 창백한 중년 남자가 하나 서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진성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한쪽에는 덩치가 우람한, 기세가 엄청 강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약간 하얀 빛을 띤 머리카락에 한껏 치솟은 눈썹이 그를 위엄 있는 얼굴로 보이게 하였다. 소개하지 않아도 임찬은 그가 바로 광양의 왕 남패천임을 알 수 있었다.
  • “임 선생님……”
  • 임찬을 본 하 어르신이 격동한 얼굴로 입을 뗐다.
  • “선생님께서, 선생님께서 오셨군요……”
  • 남패천도 임찬을 관찰하고 있었다. 젋은 나이에 남루한 옷을 입은 그를 바라보며 남패천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 “저 사람이 그대가 말한 신의라고요?”
  • “네, 그렇습니다!”
  • 하 어르신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하하하, 그야말로 아무 길고양이나 똥개들이 나와서 신의라 사칭하는 세상이로군요!”
  • 남패천의 옆에 있던 흰 수염의 노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 “이보게나, 하 씨. 우리도 어찌 보면 동종업계 종사자인데 의학의 배움 길에 있어 지름길이란 없는 법을 우리 둘 다 잘 알지 않는가? 의술이 뛰어난 자는 자고로 긴 시간의 축적이 필요한 법, 그런데 이렇게 애송이를 데려다가 신의라고 그러면 어쩌자는 겐가? 남 선생님께서 자네에게 너그럽게 대하셨다고 정녕 이렇게 남 선생님을 기만해도 된다는 말인가?”
  • 하얀 수염의 노자가 바로 광양시에서 최고의 신의라 불리는 사방명이었다. 남패천의 낯빛도 매우 차가워 보였다. 그도 이렇게 젊은 사람이 신의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그러자 임찬이 갑작스레 입을 뗐다.
  • “만약 의술이 나이가 결정하는 것이라면 거북이 하나를 갖다 놔도 그쪽보다는 훨씬 더 낫겠네요?”
  • “뭐라고?”
  • 사방명이 대노하였다.
  • “그쪽이 삶을 헛산 것 같다고요!”
  • 임찬이 냉한 음성으로 말했다.
  • “네 이놈!”
  • 사방명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감히 사기꾼 주제에 여기에서 난동을 부려? 여봐라, 저 사람을 당장 끌어내!”
  • 그러자 임찬이 되물었다.
  • “저를 끌어내면 남 아가씨의 목숨은 누가 살릴 건데요?”
  • “내……!”
  • 순간 사방명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남패천의 딸 목숨을 살려낼 능력이 없었던 것이었다.
  • “그러니까 당신이 내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뜻이네요?”
  • 남패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그게 뭐 어렵나요?”
  • 남패천을 힐끔 본 임찬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문제는 그녀의 난치병을 치료하는 게 조금 까다롭거든요.”
  • “뭐, 뭐라고요?”
  • 얼굴빛이 확 변한 남패천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임찬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 “제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는 당신도 잘 알겠죠. 남 아가씨께서는 태어날 때 1.5kg 미만으로 태어나 그녀의 어머니도 남 아가씨를 난산으로 낳고 돌아가셨죠.”
  • “도대체 뭐라고 헛소리하는 거요?”
  • 사방명이 비아냥거렸다.
  • “이봐요! 아니,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막 말하네? 1.5kg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다고요? 무슨 6.5kg도 아니고……”
  • 하 어르신도 잔뜩 당황한 얼굴로 그럴 리가 없다 생각했다.
  • “입 닥치세요!”
  • 갑작스레 소리친 남패천 때문에 사방명이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다.
  • “남 선생님, 딱 봐도 저 자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아가씨를 보지도 않고 난치병이라니,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해요?”
  • 사방명이 차가운 시선으로 임찬을 바라봤다.
  • “자식아, 그렇게 얼토당토 않는 말을 지껄이면 의술이 뛰어난 줄 아는가 보지? 하하, 사기꾼들도 이젠 막 나가네?”
  • 남패천은 그런 사방명을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본 뒤 이를 악물며 말했다.
  • “임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 딸이 태어났을 땐 1.3kg밖에 안 되었으며 딸아이의 어머니 또한 난산으로 죽은 게 맞습니다.”
  • “뭐라고요?”
  • 사방명과 하 어르신이 동시에 외쳤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 사방명이 의혹스레 물었다. 그러자 이를 꽉 깨문 남패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제 아내가 혈액병을 앓고 있었는데 혈액에 혈소판이 부족하여 상처가 나면 아물지를 못하고 출혈이 심했었어요. 그러다 그때 아이를 낳으면서 대출혈이 일어나 그만 저 세상으로 떠났거든요.”
  • 경악을 금치 못한 사방명과 하 어르신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런 것도 임찬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남패천은 임찬을 구세주 바라보듯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당신이 정말로 내 딸을 살릴 수 있단 말이에요?”
  • “그녀를 살리는 건 어렵지 않다 했잖아요.”
  • 임찬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난치병이라 조금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문제 없어요!”
  • 깊게 숨을 들이쉰 남패천이 갑작스레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 “선생님께서 만약 제 딸아이를 구하실 수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의 절반을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 “뭐라고요?”
  •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남패천은 일명 남반성이라 불리우기도 했는데 광양시 절반의 산업이 모두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중의 절반을 임찬에게 나눠주겠다고? 정말로 통이 큰 결정이었다.
  • “하하……”
  • 임찬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 “그런 건 저한테 필요 없어요. 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정성인 듯 하니 도와드리도록 하죠.”
  • 남패천은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갔다. 그의 한평생 임찬처럼 돈을 흙 보듯이 하는 사람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 “그래요, 계속 그렇게 잘난 척을 해봐요.”
  • 사방명의 눈빛에 일순 빛이 번뜩였다.
  • “오늘 남 아가씨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우리 집 가전의 단약을 돌려주는 것은 물론 처방전도 토해내야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