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은 성원대약국으로 돌아왔다. 하 어르신은 자리에 없었지만 약국의 사람들이 임찬을 아주 공손하게 대했다. 병실에 누워있는 임희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하 어르신이 특별히 간호사 두 명을 데려와 임희의 병상을 지키게 한 듯했다.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밖에서 난잡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하 어르신의 기사인 소류가 달려 들어오더니 임찬을 발견하고는 매우 기뻐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임 선생님, 드디어, 드디어 오셨네요!”
“무슨 일인데요?”
임찬이 궁금한 듯 물었다.
“시간이 좀 빠듯해서, 혹시 저랑 같이 좀 가주실래요? 가는 길에 제가 설명 드릴게요.”
소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어르신께 큰 일이 생겼거든요!”
임찬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 어르신이 그에게 잘 대해줬던 터라 그의 일이라면 손 놓고 방관할 수가 없었다.
“갑시다!”
임찬이 소류를 따라 문을 나섰고 소류가 운전한 차는 빠른 속도로 교외로 빠졌다. 가는 길에 소류가 자초지종을 임찬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일은 진성원에게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진성원의 배후에는 거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남패천이라고 광양의 왕이라 불렸다. 광양시의 10대 가문 가주들도 남패천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며 복종을 해야 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 남패천에게는 외동딸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딸이 작년에 차 사고를 당하면서 식물인간이 되자 남패천은 수많은 명의들을 불러다가 치료를 하게 했으나 누구도 딸을 치료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하 어르신이 준 소귀원단을 먹고 효과를 본 진성원이 하 어르신에게서 하나를 더 얻어 남패천에게 바치면서 딸에게 먹이라고 하였고, 당연히 효과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좋았던 단약을 먹은 남패천의 딸은 크게 몸 상태가 좋아졌으나 그래도 깨어나지 못하여 진성원이 하 어르신을 불러 직접 남패천의 딸을 치료하게 했던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하 어르신은 거절하려 했으나 그 자리에 있었던 또 다른 신의 하나가 그를 들쑤시는 바람에 침을 들어 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치료는 남패천의 딸을 깨우기는커녕 오히려 병세를 더 위독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 신의라는 사람이 기회를 틈 타 남패천에게 하 어르신을 돌팔이 의사라고 일러바치며 일전에 하 어르신이 자신한테서 단약을 훔쳐갔었다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화가 난 남패천은 하 어르신을 죽이려 했고 하 어르신은 얼른 임찬의 일을 그에게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남패천은 그에게 2시간이라는 기회를 주며 만약 임찬을 찾아오지 못할 시 하 어르신을 죽이겠다 엄포를 놓았다.
소류는 약국에 도착한 지 30분이나 돼서야 임찬을 만날 수 있었고 현장에서 임찬에게 자세한 내막을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임 선생님, 그 신의라는 자의 이름이 사방명인데 그 사람은 10대 가문 중 사씨 가문의 사람으로서 광양시에서 의술로는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소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아마도 그 사람이 임 선생님의 약 처방을 탐 내어 우리가 그의 단약을 훔친 거라 잡아떼는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좀 있다 그 사람을 꼭 조심하셔야 돼요!”
임찬은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단약을 얻어낼 궁리를 하다니, 그 사방명이라는 자가 참말로 괘씸했다. 말을 마친 소류는 임찬을 데리고 남패천의 집으로 향하였다.
남패천은 커다란 장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면적이 몇 만 평에 달하였으며 장원 안에는 곳곳에 진귀한 식물들이 자라 있었고 저택 또한 궁전마냥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2층에 다다른 임찬은 하 어르신을 포함한 사람 한 무리를 발견했다. 하 어르신의 옆에는 얼굴이 창백한 중년 남자가 하나 서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진성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한쪽에는 덩치가 우람한, 기세가 엄청 강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약간 하얀 빛을 띤 머리카락에 한껏 치솟은 눈썹이 그를 위엄 있는 얼굴로 보이게 하였다. 소개하지 않아도 임찬은 그가 바로 광양의 왕 남패천임을 알 수 있었다.
“임 선생님……”
임찬을 본 하 어르신이 격동한 얼굴로 입을 뗐다.
“선생님께서, 선생님께서 오셨군요……”
남패천도 임찬을 관찰하고 있었다. 젋은 나이에 남루한 옷을 입은 그를 바라보며 남패천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 사람이 그대가 말한 신의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하 어르신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야말로 아무 길고양이나 똥개들이 나와서 신의라 사칭하는 세상이로군요!”
남패천의 옆에 있던 흰 수염의 노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게나, 하 씨. 우리도 어찌 보면 동종업계 종사자인데 의학의 배움 길에 있어 지름길이란 없는 법을 우리 둘 다 잘 알지 않는가? 의술이 뛰어난 자는 자고로 긴 시간의 축적이 필요한 법, 그런데 이렇게 애송이를 데려다가 신의라고 그러면 어쩌자는 겐가? 남 선생님께서 자네에게 너그럽게 대하셨다고 정녕 이렇게 남 선생님을 기만해도 된다는 말인가?”
하얀 수염의 노자가 바로 광양시에서 최고의 신의라 불리는 사방명이었다. 남패천의 낯빛도 매우 차가워 보였다. 그도 이렇게 젊은 사람이 신의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그러자 임찬이 갑작스레 입을 뗐다.
“만약 의술이 나이가 결정하는 것이라면 거북이 하나를 갖다 놔도 그쪽보다는 훨씬 더 낫겠네요?”
“뭐라고?”
사방명이 대노하였다.
“그쪽이 삶을 헛산 것 같다고요!”
임찬이 냉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이놈!”
사방명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사기꾼 주제에 여기에서 난동을 부려? 여봐라, 저 사람을 당장 끌어내!”
그러자 임찬이 되물었다.
“저를 끌어내면 남 아가씨의 목숨은 누가 살릴 건데요?”
“내……!”
순간 사방명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남패천의 딸 목숨을 살려낼 능력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내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뜻이네요?”
남패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뭐 어렵나요?”
남패천을 힐끔 본 임찬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는 그녀의 난치병을 치료하는 게 조금 까다롭거든요.”
“뭐, 뭐라고요?”
얼굴빛이 확 변한 남패천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임찬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제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는 당신도 잘 알겠죠. 남 아가씨께서는 태어날 때 1.5kg 미만으로 태어나 그녀의 어머니도 남 아가씨를 난산으로 낳고 돌아가셨죠.”
“도대체 뭐라고 헛소리하는 거요?”
사방명이 비아냥거렸다.
“이봐요! 아니,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막 말하네? 1.5kg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다고요? 무슨 6.5kg도 아니고……”
하 어르신도 잔뜩 당황한 얼굴로 그럴 리가 없다 생각했다.
“입 닥치세요!”
갑작스레 소리친 남패천 때문에 사방명이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다.
“남 선생님, 딱 봐도 저 자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아가씨를 보지도 않고 난치병이라니,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해요?”
사방명이 차가운 시선으로 임찬을 바라봤다.
“자식아, 그렇게 얼토당토 않는 말을 지껄이면 의술이 뛰어난 줄 아는가 보지? 하하, 사기꾼들도 이젠 막 나가네?”
남패천은 그런 사방명을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본 뒤 이를 악물며 말했다.
“임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 딸이 태어났을 땐 1.3kg밖에 안 되었으며 딸아이의 어머니 또한 난산으로 죽은 게 맞습니다.”
“뭐라고요?”
사방명과 하 어르신이 동시에 외쳤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사방명이 의혹스레 물었다. 그러자 이를 꽉 깨문 남패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내가 혈액병을 앓고 있었는데 혈액에 혈소판이 부족하여 상처가 나면 아물지를 못하고 출혈이 심했었어요. 그러다 그때 아이를 낳으면서 대출혈이 일어나 그만 저 세상으로 떠났거든요.”
경악을 금치 못한 사방명과 하 어르신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런 것도 임찬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남패천은 임찬을 구세주 바라보듯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당신이 정말로 내 딸을 살릴 수 있단 말이에요?”
“그녀를 살리는 건 어렵지 않다 했잖아요.”
임찬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치병이라 조금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문제 없어요!”
깊게 숨을 들이쉰 남패천이 갑작스레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선생님께서 만약 제 딸아이를 구하실 수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의 절반을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남패천은 일명 남반성이라 불리우기도 했는데 광양시 절반의 산업이 모두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중의 절반을 임찬에게 나눠주겠다고? 정말로 통이 큰 결정이었다.
“하하……”
임찬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런 건 저한테 필요 없어요. 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정성인 듯 하니 도와드리도록 하죠.”
남패천은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갔다. 그의 한평생 임찬처럼 돈을 흙 보듯이 하는 사람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계속 그렇게 잘난 척을 해봐요.”
사방명의 눈빛에 일순 빛이 번뜩였다.
“오늘 남 아가씨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우리 집 가전의 단약을 돌려주는 것은 물론 처방전도 토해내야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