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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넌 왜 전화를 안 받았는데?

  • 방혜는 허윤하의 옆에 앉아 가문의 사업을 위하여 최일범과 자주 연락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자신의 사위 임찬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으며 그의 기분 또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물론 임찬도 침묵을 지켰다. 그의 주의력은 모두 허윤하에게 있었다. 차에 올라탄 후 허윤하는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마치 지금 이 상황이 매우 짜증난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임찬은 가슴이 아팠다. 자신과 집에 같이 돌아가는 게 그렇게 짜증났을까? 그 최일범이라는 자가 그렇게도 중요했나, 이런 생각만이 임찬의 머리 속에 맴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아파트단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임찬은 주차할 자리를 찾아 떠났고 허윤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먼저 집으로 올라갔다. 임찬이 트렁크를 챙기고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방 안에서 방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윤하야, 네 아빠 말이 맞아. 임찬이랑 같이 있는 게 너한테 무슨 장래가 있겠니? 전 광양시의 사람들이 그 놈이 널 만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걔랑 이혼한다 해도 네가 고결하다는 걸 알고 수많은 부잣집 자제들이 널 따라다닐 걸? 걔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는데 왜 굳이 고지식하게 한 사람한테만 매달리려고 하냔 그 말이야.”
  • 방혜의 말을 들은 임찬은 가슴이 콕콕 쑤셨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 듣는 말이 아니다 보니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임찬을 본 방혜는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흥 하며 임찬을 시위하듯 노려보았다.
  • “트렁크 하나 가져오는 것도 그렇게 느려터져서야, 못났어, 정말!”
  • 방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 “임찬, 너 언제쯤 철 들래? 언제쯤 윤하가 너 때문에 창피당하지 않게 할 거냔 말이야?”
  • “제가 어쨌는데요?”
  • 참을 수 없었던 임찬이 물었다. 그러자 방혜도 지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 “네가 나서지만 않았다면 윤하가 최 도련님이랑 좀 더 오래 이야기 나눌 수 있었잖아. 그러다가 사업도 하나 큰 거 오갔었을 수도 있고. 그러면 우리가 집이라도 하나 새로 바꿀 수 있었겠지. 그런데 네가 그 자리에 껴있어서 최 도련님이 기분 상해서 사업이 성사가 안 된 거잖아. 그걸 몰라서 물어?”
  • 이런 것까지 자신을 탓할 줄 몰랐던 임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최일범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저들은 정녕 모르는 걸까? 설마 진짜 방혜의 말대로 자신이 비겁하게 뒤로 물러나 아내가 다른 남자랑 잘 되어 그 사업이라는 것을 쟁취하게 했어야만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찬은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누르며 말했다.
  • “어머니……”
  • “어머니라고 부르지 마!”
  • 방혜는 아예 임찬의 말을 끊었다.
  • “우리 관계가 언제 그렇게 가까웠는데?”
  • 얼굴이 빨개진 임찬이 말했다.
  • “그 최일범이라는 사람이 윤하한테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그 사람이 진짜 윤하랑 사업 얘기나 하자고 그랬겠어요? 딱 봐도 윤하를 어떻게 해보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 “그래서?”
  • 방혜가 큰 소리로 외쳤다.
  • “밖에서 사업을 하다 보면 사교는 어쩔 수 없는 거야. 남들은 남편이 밖에서 손님 응대를 한다던데, 네가 얼마나 못났으면 윤하가 밖을 나돌아다니며 널 먹여 살려야 되겠냐고? 네가 그러고도 윤하한테 손가락질 할 낯짝이나 있어?”
  • 다급해진 임찬이 얼른 말했다.
  • “제가 언제…… 제가 언제 윤하한테 손가락질 했는데요?”
  • “그만!”
  • 낮게 소리친 허윤하가 임찬을 힘껏 노려본 뒤 말했다.
  • “저 피곤해요!”
  • 허윤하가 문을 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방혜는 임찬을 노려보며 말했다.
  • “못 들었어? 윤하가 피곤하다잖아. 빨리 윤하 옷이랑 다 빨래 해놓고, 아! 그리고 네가 어제 하루 종일 집에 안 들어와서 주방에 설거지거리가 잔뜩 쌓였으니까 그것도 빨리 정리해 놔!”
  • 이를 꽉 깨물던 임찬은 할 수 없이 집 안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했다. 지난 3년 동안 임찬은 이미 이런 것에 익숙해졌다. 그는 허가의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건 허윤하가 그를 대하는 태도였다. 가문 옥패의 계승을 받아 다른 사람의 생사를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임찬이 들고 일어서려면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일이었다. 또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는 지금이라도 허가를 광양시의 대가문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허가가 자신이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그것이었다.
  • 이 모든 건 그를 대하는 허윤하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 만약 허윤하가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제는 3년의 결혼 생활을 손 놓아야 할 때였다. 하지만 만약 허윤하가 그에게 감정이 있는 거라면 그는 남편이라면 응당 져야 할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내치지 않는다면 임찬은 평생을 다 바쳐 충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청소를 다 마친 임찬이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그 중 넓은 침대가 허윤하의 것이었고 너비가 채 1미터도 안 되는 것이 임찬의 것이었다. 허윤하는 화장대 옆에 앉아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 비통을 표정을 하며 멍 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찬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 고개를 한 쪽으로 돌리더니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임찬은 당황했다.
  • 허윤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지난 3년간 임찬은 허윤하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고집이 있는 여자였다. 비록 광양시에서 제일의 미녀로 꼽힌다 할 지라도 허윤하는 한 번도 자신의 미모로 무얼 하려고 들지 않았었고 무엇이든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했었다. 가문의 회사 말단 직원에서부터 한발 한발 지금의 위치에 이르러 가문 산하의 회사를 주관하기까지 모두 그녀 자신의 실력으로 분투하여 이룬 업적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왔던 그녀는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번 출장을 다녀온 후로 그녀는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번 외근으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걸일까?
  • 저도 모르게 최일범을, 그리고 어제 저녁의 통화를 기억해낸 임찬은 가슴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설마 최일범이 허윤하에게 용서 못 할 짓을 저지른 건 아닐까? 주먹을 꽉 쥔 임찬은 심장이 아파져 왔다.
  • “윤하야, 대체…… 대체 무슨 일인데?”
  • 임찬이 낮은 소리로 물었으나 허윤하는 차가운 표정으로 임찬을 바라봤다.
  • “아무것도 아냐!”
  • 임찬은 차분해지려 애를 썼다.
  • “말해줘, 내가 도와줄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 “날 도와준다고?”
  • 허윤하의 차가운 시선이 임찬을 향했다.
  • “뭘로 도와줄 건데? 넌 네 구실도 못하잖아. 그런데도 날 도와주겠다고? 뭘로?”
  • 순간 임찬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허윤하에게 자신이 가문의 계승을 받아 신의가 됐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임 씨 가문 멸망의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터라 임찬은 충분한 실력이 갖춰지기 전 자신의 상황을 알릴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허윤하가 자신에 대한 태도를 알아내야만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릴지 말지 결정할 수 있었다. 허윤하는 그런 임찬이 한스러운지 이내 쏘아붙였다.
  • “임찬, 넌 네 일이나 신경 써! 3년이야, 네가 병원에서 일을 한지 자그마치 3년이라고! 남들은 점점 더 잘 된다는데 너만 점점 더 못 해지잖아! 그리고 너 어제 하루 종일 출근을 안 했다며? 그러고 어디 갔었는데? 네 일자리가 얼마나 어렵게 구해진 건지 알기나 알아?”
  • 말하지 않아도 조가범이 일러바쳤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임찬이 매번 병원에서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조가범은 거기에 살을 덧붙여 허윤하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첫째로는 허윤하와 얘기할 기회를 더 얻을 수 있기 위함이었고 둘째로는 임찬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것도 있었다.
  • “어제는 일이 좀 있었어……”
  • 임찬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무슨 일?”
  • 허윤하가 되물었다.
  • “그게……”
  • 임찬은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동생 임희의 일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었으나 어제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 않던 그녀의 태도가 이미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임찬은 자신이 동생의 얘기를 꺼냈을 때 일말의 동정도 받을 수 없을 망정 오히려 그녀의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이를 꽉 깨물던 임찬은 끝내 할 말을 삼켰다.
  • “그러는 넌 요며칠 왜 전화를 안 받았는데?”
  • 잠깐 멈칫한 허윤하가 임찬을 한참 쳐다보더니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 “내가 받고 싶으면 받는 거고 받기 싫으면 안 받는 거지, 네가 정말 날 구속할 수 있을 줄 알았어?”
  • “너……”
  •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임찬이 고함을 질렀다.
  • “허윤하, 넌 대체 날 뭐라고 여기는 거야?”
  • 허윤하도 지지 않고 되물었다.
  • “그러는 넌 날 뭘로 생각하는데?”
  • 고개를 숙인 임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그는 주저 없이 허윤하를 자신의 아내라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임찬은 속이 메스꺼웠다. 임찬이 대답을 않자 더욱 화가 난 허윤하는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 “꺼져!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