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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아내를 지킨다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휙 머리를 들자 심기는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던 묵헌이 보였다.
  • 한때 거리 두기에 바빴던 시크하고도 멋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곁에 있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 묵헌은 무심코 눈길을 돌렸는데 마침 눈물이 글썽글썽한 심기의 눈과 마주쳤다. 마치 잠잠한 호수에 돌덩이를 던진 듯 묵헌의 마음에서 미묘하고도 잔잔한 파동이 일어났다.
  • 심기는 예쁜편이다. 오히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한 올 한 올 깔끔하고 길게 올라간 속눈썹, 똘망똘망한 두 눈은 마치 맑은 호수처럼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눈에 담겨있는 듯했다. 눈초리에는 눈물이 맺혀져 눈시울이 붉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는 모습에 묵헌은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얼굴색도 하얗게 질려 몸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묵헌의 마음은 아팠다.
  • 그래서인지 뒷담화를 하고 있던 도우미들을 보는 묵헌의 눈빛이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 “도… 도련님…”
  • 도우미들은 머리를 푹 숙이고 겁에 질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방금 누가 내 아내를 험담했어?”
  • 심기는 놀란 듯 토끼눈을 떴다. 묵헌이 사람들 앞에서 아내라고 인정해준 것에 의아했다.
  • 심기를 비웃던 도우미들은 묵헌의 날카로운 기에 두려워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 묵헌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를 천천히 살펴보더니 말을 꺼냈다.
  •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 자를 수 밖에. 잘리면 어디가서도 안 써줄 거야.”
  • “저 사람들이에요. 저 사람들이 사모님을 비웃었어요.”
  • 유일하게 심기의 험담을 하지 않은 도우미가 옆에 있던 4명을 지목했다. 험담을 한 4명은 “탁”하고 나란히 무릎을 꿇으면서 잘못을 빌었다.
  • “도련님, 저희가 잘못했어요.”
  • “작은 사모님,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 “작은 사모님,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 “소숙.”
  • 묵헌은 코웃음을 치면서 불렀다.
  • “네, 도련님!”
  • 소숙은 경비를 불러 험담을 한 도우미들을 쫓아내려 했다.
  • 심기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용서를 빌고 있는 도우미들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는 도우미들한테 얕보이고도 용서를 해주는 호구가 아니었다. 용서해주면 도리어 기어 오르려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도우미들이 끌려나가자 로비는 순간 조용해졌다.
  • 묵헌은 겁에 질려 큰 숨도 못 쉬고 있던 도우미들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 “다음에도 내 아내한테 무례하게 대하면 조용히 안 끝날줄 알아! 알겠어?”
  • “네, 알겠습니다.”
  • 묵헌은 가정부에게 자리를 뜨라고 손짓한 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심기에게 다시 눈을 돌렸다. 마음이 복잡했다.
  • 잠시 멈칫한 뒤 말했다.
  • “그 여자를 찾을 때까지는 네가 이 집안의 작은 사모님이야.”
  • 심기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 “누구를 찾는데요?”
  • 순간 묵헌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 “물어서는 안될 것을 묻지 마. 네 주제를 알라고!”
  • 말을 끝낸 묵헌은 소숙에게 위층으로 데려달라고 말했고, 뒤에서 멍하니 서 있는 작은 여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릴 뿐이었다.
  • 심기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심기는 입술을 앙다물며 생각했다.
  • 그래, 누구를 찾든 무슨 상관이야? 그가 나서서 나를 감싸준 것은 가정부들이 그의 체면을 구겼기 때문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아내일 뿐이야.
  • 그녀를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심기에게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 다음 날.
  • 잠에서 깬 심기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쓴 뒤 병원으로 향했다.
  • 그녀는 어제 나온 임테기 결과로 밤새 잠을 설쳤고, 결과가 잘못된 것이기를 빌었다.
  • 병원에 들어선 심기는 가방에서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꺼내 썼고, 혹여나 여씨 집안의 사람을 마주칠까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 진료 차례를 기다리는데 시선을 끄는 변장 때문에 심기는 이목을 끌었다.
  •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지만, 역효과만 낳았다.
  • 마침내 심기의 차례가 되었을 때 의사는 눈만 드러난 그녀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 뭔가 물어보려던 찰나 ‘쿵’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크고 건장한 사내들이 갑자기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의사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 “당, 당신들 누구야! 경비원!! 여기 난동부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 심기 역시 맹렬한 기세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들을 보고 놀라서 몸을 일으켜 달아나려 했다.
  • 하지만 그녀가 일어서자마자 검은 옷의 사내들이 그녀를 붙잡아 어깨에 들쳐메고는 밖으로 데려갔다.
  •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놔 줘!”
  • 찢어진 마대자루처럼 매달려 있던 심기는 머리에 피가 쏠려 견디기 힘들어졌고, 자신을 어깨에 메고 가는 사내를 마구 때리며 외쳤다.
  •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 -
  • 서롱 지역의 별장.
  • “사람은?”
  • 텅 빈 별장을 본 묵헌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 병원 산부인과 쪽에서 행적이 수상한 여자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묵헌은 하던 일도 제쳐두고 곧바로 달려왔다.
  • “이제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 소숙이 정중히 답했다.
  • 이때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