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기는 묵헌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등장에 회의실의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묵헌의 곁은 항상 소숙 뿐이었는데 갑자기 웬 여자가 나타났으니 누구나 할 것 없이 둘사이를 궁금해했다.
심기는 비서직을 맡은 적 있었지만 이렇게 웅장한 상황은 처음이었다. 여씨그룹의 회의실은 북성의 재벌그룹답게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심기는 왠지 모르는 기에 꺾여 어깨가 축 처지게 됐다. 하지만 온갖 시선을 견디며 묵헌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모든 시선은 심기에 주목됐다.
“대표님, 이분은?”
누군가 말을 꺼냈다.
여병헌은 여씨그룹에서 본부장을 맡고 있어 회의실에 있었다. 병헌도 역시 회의실로 들어오는 심기를 보고 의아해했다.
심기는 옷자락을 꽉 움켜쥐면서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눈빛과 마주쳤다. 이때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는데 바로 병헌이였다.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마주치면서 병헌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었고 심기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때문인지 긴장했던 심기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녀도 병헌에게 미소를 보내며 병헌이 정말로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때 심기와 병헌의 행동을 묵헌이 지켜보고 있었다.
묵헌의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하면서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간병인입니다.”
“네?”
간병인이라는 말에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더 어리둥절했다.
심기도 묵헌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대표님, 방금 간병인이라고 했습니까?”
묵헌의 눈망울은 알수없는 밤처럼 어두웠다.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뜨더니 대답했다.
“회장님께서 붙여주신 간병인입니다. 앞으로 저의 일상생활을 보살필 사람입니다.”
모욕스러운 말에 심기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채 묵헌을 바라봤다. 자신은 비서로 온 건데 왜 간병인이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커피 타와.”
생각에 잠겨있던 심기에게 묵헌이 갑자기 지시를 내렸다.
심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숙이 눈치를 주자 그제야 커피를 타러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왔을 때 회의는 이미 시작되어 심기는 커피를 묵헌의 앞에 두었다. 하지만 묵헌은 한 모금만 마시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타와! 너무 달아.”
그 뒤로 회의실에는 묵헌의 까탈스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싱거워.”
“뜨겁잖아.”
“너무 미지근해.”
커피 한잔 때문에 심기는 회의실을 여러 번 왕복했다. 회의실은 묵헌이 사람들 앞에서 심기에게 수치를주는 구경거리가 되었고 주변의 시선 때문에 심기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 화를 내려다가 가족 사정을 생각해 꾹 참고 다시 커피를 타러 나갔다.
심기는 다시 돌아와“탁!”하고 잔으로 강하게 책상을 내리쳤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놀랬다.
“고작 이런 일도 못하면서 간병인 하겠다고?”
묵헌의 말에 심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가까이에 앉아있던 병헌이 지켜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묵헌아, 그만해.”
형이 심기 편을 들다니. 묵헌은 심기가 보통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냉소를 지었다.
“형님, 이 간병인이 안쓰럽나요? 그럼 형님이 가져갈래요?”
심기는 입술을 꽉 깨물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곁에 남게 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수모를 주려고 곁에 둔 것이였다. 그저 돈과 명예를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재벌가에 시집오려는 여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토록 자신을 싫어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헌아, 너 왜 그래? 아무리 그래도…. 심기는 너의..”
아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묵헌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커피 한잔 타오라는데 뭔 대수라고. 본부장님 오지랖이 심하시네요?”
병헌이 더 말하려고 했지만 심기가 그의 말을 끊었다.
“대표님, 커피 다시 타오겠습니다.”
심기는 곧바로 잔을 들고 나갔다.
한잔, 두잔, 세잔…
회의가 이어지는 동안 심기는 쉴 틈 없이 왔다 갔다 하면 커피를 새로 가져왔다. 묵헌은 계속 트집을 잡았지만 심기는 아무런 불만도 내색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났으나 심기는 계속해서 커피를 타야만 했었다.
회의실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소숙이 보다못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도련님, 그만해도 되지 않을가요? 이만하면 혼을 내준 것 같은데요.”
“이런 여자는 혼을 내주지 않으면 우리 집안이 만만한 줄 알고 옆에서 계속 알짱거릴 거야.”
묵헌은 냉소를 지었다. 그는 심기의 인내심이 어디까지 인지 알고 싶었다.
심기는 커피를 얼마나 탔는지 셀 수 없을 만큼 탔다. 어지럽고 힘들어 도저히 못 하겠다는 생각에 회의실로 들어갔는데 묵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테스트에 합격했는지 말해주지도 않고 사라진 묵헌을 찾으러 심기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회의실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