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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남자가 그렇게 고픈가 보지?

  • “아니…”
  • 심기는 아파서인지 아니면 다급해서인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일을 망칠 순 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여씨 집안에 남아야 했다.
  • “전 그저… 아!”
  • 더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묵헌은 그녀를 밀쳤다.
  • “결혼을 해봤으니 잠자리도 했을 텐데 순진한 척을 하다니 역겹군.”
  • 궁지에 몰려 바닥에 넘어져 있는 심기를 힐끗 본 후 묵헌은 휠체어를 돌려 방을 나갔다.
  •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심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그는 예씨 집안에서 떠나라는 말을 다시 하지 않았다.
  • 그럼 남아있어도 된다는 뜻인가?
  • 심기는 이불로 몸을 감싸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앉았다. 10분 정도가 지나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그제야 심기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뜻대로 된 듯했다.
  • -
  • 심기는 하루 동안 빈방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묵헌이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쇼윈도 부부로 지내자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듯했다.
  • 심기는 옷을 갈아입은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 그들에게 주방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하는 찰나, 그녀의 발밑으로 빗자루 하나가 채였고 심기는 휘청거리다 자신도 모르게 앞쪽으로 쓰러졌다.
  • “아!”
  • 그녀가 바닥에 넘어지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는 게 느껴졌다.
  • 심기가 놀라 고개를 들자 따뜻한 눈빛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 “다친 곳은 없나요? 제수씨.”
  • “제수씨?”
  • “전 묵헌이 형 병헌이에요.”
  • 여병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심기가 답을 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방해를 한 것 같군.”
  • 이 목소리는… 심기는 목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 휠체어에 앉은 여묵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의 무릎에는 담요가 덮어져 있었다.
  • 휠체어에 앉아 있었지만 묵헌은 온 세상을 다 군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묵헌의 차가운 눈빛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 그때서야 자신이 아직도 여병헌의 품에 안겨있다는 걸 깨닫고는 재빨리 뒤로 두 발짝 물러나 뭐라도 찔리는 듯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았다.
  • “묵헌아, 오랜만에 집에서 보는구나.”
  • 여병헌은 그런 그의 동생에게도 여전히 웃는 얼굴을 보였다.
  • 하지만 여묵헌은 그런 그와는 달리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담담히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
  • “형.”
  • “그래, 그럼 형은 너랑 제수씨 사이에서 이만 빠질게.”
  • 여병헌은 말을 마친뒤 다시 심기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제수씨, 전 회사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 심기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병헌이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다 시선을 거두려고 하는 순간, 여묵헌이 옆에서 비꼬는 소리가 들렸다.
  • “이혼한 여자는 남자가 그렇게 고픈가 보지? 그새를 못참고 남자를 꼬실 만큼?”
  • 이 말을 들은 심기는 얼떨떨한 모습으로 물었다.
  • “뭐라고요?”
  • 까맣고 깊은 여묵헌의 눈빛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 심기는 그의 난폭함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전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저급하지 않거든요.”
  • “그래?”
  • 여묵헌의 입꼬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묵헌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 “이혼 하자마자 새로운 남자를 찾으려는 게 저급한 거 아닌가?”
  • 심기는 화가나 주먹을 꽉 쥐었다.
  •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나도 어쩔 수 없다고.
  • “당신이 한 약속을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여씨 집안과는 조금도 엮이지 않게 할 거라는 약속 말이야. 만약 우리 집안의 이름을 팔아 이익을 챙기다 걸리거나 우리 집안에 무슨 목적이라도 가지고 접근했다가는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 뭔지 느끼게 해주지.”
  • “소숙.”
  • 소숙이 여묵헌의 휠체어를 밀며 자리를 떠났다.
  • 그들이 떠난 뒤 한 메이드가 다가와 심기에게 말했다.
  • “사모님, 어르신께서 좀 보자고 하십니다.”
  • 어르신? 여씨 집안의 회장님이신가?
  • 심기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 심기의 어머니는 여씨 집안의 사람들이 아직 월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동생을 대신해 그녀를 시집보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 어르신이 나를 보자고 했다니. 설마 들통난 건가?
  • 심기는 불안한 마음으로 메이드의 뒤를 따라갔다.
  • “사모님 들어가 보세요.”
  • 메이드는 매우 겸손했다. 심기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머뭇거리며 서재로 발을 옮겼다.
  • 서재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클래식한 장식품과 책장이 품격있는 분위기를 자아냈고 책장에는 각종 그림이 있었다.
  • 방을 살짝 훑어본 뒤 심기는 재빨리 시선을 방의 주인에게로 돌렸다.
  • “회장님, 안.. 안녕하세요.”
  • 여씨 집안의 어르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맑고도 예리한 눈빛에 사로잡혔다.
  • 그는 심기를 살펴보았다.
  • 심기는 지금 자신의 신분이 떠올라 금세 긴장했다. 어쩔 줄 몰라하며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자신의 비밀을 눈치챌까 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 여묵헌과는 일단 잘 정리되었는데, 만약 회장님께서 내가 심월이 아니란 걸 알면 그땐 어쩌지?
  • “심월아.”
  • “네?”
  • 심기는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어르신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얼른 고개를 숙였다.
  • “묵헌이는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네가 묵헌이와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앞으로 묵헌이를 잘 대해 주어야 한다. 배우자로서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되겠지?”
  • “잘 알고 있습니다.”
  • “내일부터 묵헌이 곁에서 비서로 일하거라.”
  • 심기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그렇지만…”
  • “내 뜻대로 해라. 내일부터 묵헌이를 따라 함께 회사로 출근하거라. 단 한 걸음도 떨어지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