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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이가 아니야

당신의 아이가 아니야

핑크커피

Last update: 2024-03-29

제1화 이혼

  • “이유진, 너랑 결혼한 지 3년이야. 너는 단 한 번도 나를 건들지 않았지... 너의 의사를 존중할게. 이혼해 준다고! 오늘 밤이 지나면 너의 그녀를 찾아가도 좋아. 지금은 그냥 우리 사이의 옛정을 생각한다고 생각해. 응?”
  • 강서윤은 말을 마치고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등불을 향해 날아가는 한 마리의 나방처럼... 그것은 절망이었다.
  • 그녀 역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열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를 사랑해왔던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 “강서윤, 너...!”
  • 이유진은 이를 악물었고 준수한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 그는 자신을 덮쳐오는 여자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그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욕망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 사랑에 눈이 먼 여자를 당해낼 수 있는 건 없었다.
  • “나는 이제 잃을 게 없어...”
  • 눈물이 강서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경험이 없던 그녀는 서툴게 남자의 몸을 탐했다. 그저 단 한 번이라도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이유진은 화가 단단히 났지만 몸은 이미 그의 컨트롤을 벗어났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본능이 이성을 완벽하게 압도했고 얼마 남지 않았던 이성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이튿날 아침. 날이 어슴푸레 밝은 시점에 강서윤이 잠에서 깼다.
  • 그녀는 뻐근한 몸을 이끌고 옷을 입고 서랍에서 미리 준비해둔 이혼 합의서를 꺼내 협탁에 놓았다. 그러고는 곤히 자고 있는 남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이유진. 너에게 자유를 줄게. 앞으로는 절대 엮이지 말자.”
  • 자신을 향한 다짐에 가까운 말을 뱉고 나서 그녀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 이씨 가문을 나설 때 그녀가 느꼈던 고통과 씁쓸함은 말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그녀는 이유진을 7년 동안이나 사랑했다.
  • 소녀 시절부터 성인이 된 대학까지 그녀에겐 오로지 이유진뿐이었다. 오죽하면 그녀의 꿈은 이유진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 하지만 이유진은 그런 그녀가 마냥 귀찮기만 했다.
  • 그날은 그들이 결혼하던 날이었는데 박씨 일가의 어르신이 중병에 걸려 액땜이 필요한 상황에 마침 그녀의 팔자가 액땜에 용이하다는 무당의 말로 인해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그녀의 아버지와 계모가 바로 그녀를 제물로 바쳤다.
  • 강서윤은 드디어 이유진과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뻤지만 그녀가 마주한 건 자신에게 모진 말을 내뱉는 이유진이었다.
  • “강서윤. 너도 알겠지만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박시아야. 네가 아니라고! 오직 그녀만이 나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어. 너 따위가 가당키나 해?”
  • 강서윤은 이유진이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할 의무 따위는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 하지만 그녀는 언젠가는 이 남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 결혼한 3년간 강서윤은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매일 손수 차린 밥상을 그에게 대령했고 얼마나 늦은 시간이든 잠을 자지 않고 그가 귀가하기를 기다렸으며 이유진이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숙취로 고생할까 극진히도 그를 보살폈다. 그의 작은 상처에도 마음을 졸였고 행여 아프기라도 하면 밤잠을 설치며 그를 간호했다.
  • 매년 겨울이 되면 그를 위해 일찍 보일러를 켜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준비했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 그의 옷을 따뜻하게 데워주었지만...
  • 사랑은 정성만으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 그녀의 생일인 그저께 이유진이 병원에서 박시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안 강서윤은 그제야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남자의 마음은 그녀가 어떻게 해서든 얻지 못하는 것이었다.
  • 그는 다른 여자의 것이었다.
  • 강서윤은 그렇게 철저히 마음을 접었다.
  • ...
  • 이유진이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가 일어나서 맨 처음 든 생각은 강서윤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 LS 그룹의 대표로서 상업계를 주름잡고 있는 그를 농락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을 그런 여자에게 빼앗기다니!
  • 분노에 찬 그가 방을 둘러보았지만 강서윤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협탁에 문서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것을 발견했다.
  • “이건 뭐야?”
  • 이유진은 미간을 구기고 문서를 손에 들었다.
  • “이혼 협의서” 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고 순간 동공이 수축된 그는 안색이 흐려졌다.
  • ‘그런 방식으로 잠자리를 하고 이혼 협의서라니... 정말 가지가지하는군.’
  • 이유진은 강서윤이 자신과 이혼을 할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 그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 옷을 입고는 살기를 띠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집사에게 물었다.
  • “강서윤 못 보셨어요?”
  • 집사 아저씨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답했다.
  • “도련님, 사모님은 해가 뜨기 전 트렁크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 이유진은 순간 넋이 나갔다.
  • ...
  • 6년 후.
  • Y국 VR 의학연구소.
  • 강서윤이 연구실에서 나오자 그녀의 비서 임대호가 말을 건넸다.
  • “강 선생님. 노 교수님께서 찾으십니다. 교수님 사무실로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 밤을 새운 탓에 졸리던 강서윤은 그의 말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 “혹시 무슨 일로 부른 건지는 말씀 안 하셔? 설마... 우리 집 말썽쟁이 둘이 연구 결과를 말아먹었나?”
  • “아마도요.”
  • 임대호의 대답에는 측은함이 묻어있었다.
  • 야무진 일 처리에 훌륭한 능력을 갖고 있는 그의 상사는 젊은 나이에 의학계의 최정상을 찍고 노정훈이 아끼는 제자가 되어 명성을 떨쳤지만 매번 그녀의 말썽꾸러기 아이 둘로 인해 혼나기 일쑤였다.
  • 임대호가 무심코 위로의 말을 건넸다.
  • “지민이와 우리가 3일 동안 연구실을 떠나지 않던 선생님을 엄청 걱정했어요. 아이들이 매일 노 교수님의 사무실로 찾아가 항의하는 바람에 교수님이 몇 년은 더 늙었을 거예요.”
  • 그의 말에 강서윤은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한편으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 6년 전 그녀는 이씨 가문을 떠나 출국했다.
  • 원래는 학업에 전념하기로 했지만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간 아이를 지울까도 고민을 했지만 병원에 도착하니 겁도 났고 아이가 불쌍하다는 마음에 낳기로 결정했다.
  • 남자아이 둘, 여자아이 하나인 세 쌍둥이였다.
  • 아이들이 태어날 때 여자아이는 불행히도 목숨을 잃었고 남자아이 둘만 출산해 이름은 지민과 우리로 지었다.
  • 머리가 비상한 두 아들을 생각하니 흐뭇한 마음도 들었지만 아이들 때문에 혼나야 한다는 생각에 강서윤은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