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교수님 때문이잖아요! 우리 엄마 맨날 야근 시키고. 이것 봐요. 엄마가 얼마나 수척해졌는지!”
“내 말이! 엄마가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어떻게 쉬지 않고 일을 시킬 수 있어요?”
우리가 옆에서 작은 손으로 강서윤의 어깨를 잡으며 거들었다.
노정훈은 화가 나서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지 연구소에서는 다들 그렇게 일해.”
말을 마친 노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강서윤을 향해 물었다.
“이번 연구는 어떻게 되고 있어?”
강서윤이 웃으며 답했다.
“순조로워요. 이따가 교수님께 데이터 공유해 드릴게요.”
잠시 말을 멈추던 강서윤이 물었다.
“컴퓨터는 회복이 되었나요?”
노정훈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초조하게 말했다.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이야.”
상황이 너무 웃겼던 강서윤은 우리의 작고 흰 손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얼른 가서 교수님 컴퓨터 회복시켜. 말썽 부리면 안 돼. 중요한 데이터가 유실될 수도 있어. 착하지?”
그녀의 말에 우리가 얼른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번에는 백업 많이 해 뒀다고요. 보호 장치도 여려 겹 했으니까 절대 유실될리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는 얼른 노정훈에게 다가가 컴퓨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손이 빠르게 키보드에서 움직이며 코드를 입력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컴퓨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노정훈은 아이의 실력에 혀를 내두르며 제자의 두 아들의 높은 지능에 감탄했다.
지민은 아주 어린 나이에 치유 기술을 정통했는데 수천 가지의 약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의학계를 뒤흔들었고 투자 쪽에도 감이 아주 좋았다.
우리는 코드를 아주 잘 다뤘는데 어린 나이에 벌써 실력 있는 해커로 성장했다. 숫자에 민감한 아이는 역시나 투자 쪽으로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또한 두 아이는 무척이나 예쁜 외모와 함께 활발한 성격마저 탑재했다.
그렇기에 매번 사고를 쳤어도 차마 아이들은 혼내지 못하고 대신 강서윤을 혼낼 수밖에 없었다.
강서윤이 먼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이들이 또 폐를 끼쳤네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날 혼내지 마! 이젠 대신 혼나는 것도 지쳤다고!’
노정훈은 그녀의 표정에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걱정 마. 이번에는 널 혼내는 대신 한 가지 임무를 줄 테니까. 이번에 귀국해서 한의 쪽으로 연구소 하나를 차릴 셈이야. 하지만 지금 당장 손에 일이 많다 보니 여길 뜰 수가 없어. 네가 가서 맡아줬으면 해.”
강서윤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귀국한다고?’
6년 전 그곳을 떠난 뒤로 그녀는 다시 돌아간 적이 없었다.
그곳에는 집도, 그리운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또한 강서윤은 지금 있는 곳에 이미 정이 들어버렸다.
“교수님, 저...”
강서윤은 무의식중에 거절하려고 했지만 노정훈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서윤아.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날 따라 의학을 배웠으니 한의학이 얼마나 심오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외국에는 네가 연구할 만한 약재가 별로 없어. 하지만 국내는 다르지. 엄청 많은 약재들이 널 기다리고 있다고. 가장 중요한 건 국내에는 수많은 의학계 은둔 세가들이 있어. 다들 고수들이야. 그들의 손에는 고대 의술이 전승되어 있다고. 너는 이쪽에 관심 많았잖아. 그래서 너한테 제안한 거야. 네 능력으로 반드시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지금 많이 성장한 너로서는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사람들도 야무지게 처리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강서윤은 그의 말에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이 없었다.
6년간 그녀는 큰 변화를 겪었는데 그 어떤 일이 닥친다고 해도 도망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6년이 지났으니 그 남자는... 어쩌면 그렇게 사랑하던 여자와 이미 결혼을 했을 지도 몰랐다.
‘내가 겁낼게 뭐가 있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강서윤은 숨을 들이켜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교수님 말대로 할게요. 귀국하죠.”
노정훈은 흐뭇해진 마음에 말했다.
“생각 정리가 빨리 되어서 다행이야. 걱정 마. 임대호를 함께 보낼게. 널 도와줄 프로들로 구성된 팀도 함께 보낼 거야.”
“네. 고마워요, 교수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지민과 우리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가 드디어 귀국한다니!’
아이들은 일찍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빠가 국내에 있었으니 그들은 아빠를 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처자식을 버린 아빠를 혼내주고도 싶었다.
...
이틀 뒤.
H시티, 국제 공항.
강서윤은 두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6년 전 떠났던 조국의 땅을 밟았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가 다리를 꼬며 강서윤을 붙잡고 말했다.
“엄마, 나 쉬 마려워요. 화장실 갈래요.”
강서윤과 지민이 우리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가자.”
강서윤은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아이는 움찔하더니 우는소리로 말했다.
“건드리지 마요! 쌀 것 같단 말이에요!”
강서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얼른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도착하자 지민 역시 우리와 함께 들어갔고 강서윤은 밖에서 짐들을 지키며 교수에게 무사히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렸다.
“빌어먹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 하나 제대로 못 봐?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분노와 싸늘함을 담은 저음의 목소리는 듣기가 좋았다.
타자를 하고 있던 강서윤의 손이 멈칫했다.
6년이 지나서 다시 들은 목소리는 전혀 낯선 느낌이 없이 여전히 익숙하게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강서윤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 훤칠한 키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길쭉한 기럭지를 자랑하며 귀족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강서윤은 그의 완벽에 가까운 이목구비를 바라보았다. 마치 신이 공을 들여 열심히 빚기라도 하듯 흠잡을 데가 없는 외모는 보는 사람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이유진이다.
강서윤은 심장이 철렁했다.
귀국한 첫날 그를 마주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순간 케케묵은 감정이 울렁이다 이내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 차분해졌다.
드디어 이유진을 덤덤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된 강서윤이었다.
이때 화장실에서 아이들이 나오며 강서윤을 향해 사랑스럽게 말했다.
“엄마, 우리 왔어요!”
강서윤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차지했다: 얼른 자리를 떠야 돼. 아이들이 저 남자와 마주치게 둘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