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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난 더 잃을 게 없는 사람이야

  • 저택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한청연은 도순과 함께 안채로 왔다. 안채의 문에는 검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새겨진 ‘조천궐(朝天阙)’이라는 글이 있었다. 이는 악비(岳飞)의 ‘만강홍(满江红)’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글씨체가 아주 힘차고 패기 넘치는 것을 보아 전쟁의 신인 모영기의 기백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 뜰의 대문에는 문을 지키는 시위가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정원에 들어서자 활짝 열린 방문이 보였다. 이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창문을 통해 전해졌다.
  • “아씨 오늘 너무 어여쁘십니다. 탁자 위의 작약보다 더 아름다우세요. 역시 대군마마십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아씨를 보시더니 바로 한눈에 반했으니 말이죠.”
  • “너는 말도 참 잘하는구나. 여아홍(女儿红)에 매실을 넣어 끓이라고 말을 전했느냐?”
  • “아씨, 아니지, 왕자빈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매실주는 물론이고 안주까지 모두 대군마마의 입맛대로 준비했습니다. 바로 올릴 테니 대군마마와 술 한잔하시고 합방하시면 됩니다.”
  • “얘는, 남사스러운 말만 하네. 내일 아침에 나눠줄 돈 다 준비했지?”
  • 한청연은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 ‘이렇게 급히 움직인다고? 오늘 밤 아예 안채에서 거사를 치를 예정이었군. 먼저 와서 거사 치를 준비를 한 건가? 내가 궁에 가자마자 안채에 들어와 안주인 행세를 하는군.’
  • 한청연은 냉소를 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한청낭은 흐뭇한 얼굴로 병풍에 기댄 채, 부채를 흔들었다. 그러다 방으로 들어오는 한청연을 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 “한청연? 네가 왜 여기 있어?”
  • “실망하겠군. 난 저하와 기별하지 않았어. 그래서 네 꿈도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거야.”
  • 한청낭은 매서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저하께서 널 당분간 내치지 않기로 하신 것 같은데 그게 뭐? 설마 저하가 더러운 여인과 잠자리에 드실까? 창고방이야말로 너랑 어울리는 곳이니 그곳으로 가. 내 말 한마디면 안채에서 지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 꿈 깨고.”
  • “그렇게 대단한데 애초에 왜 저하의 정실로 들어오지 못한 거야?”
  • “너!”
  • 한청낭은 한청연의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시퍼레진 얼굴로 말했다.
  • “네가 정실 소생의 자리를 빼앗아 가지 않았다면 너 따위가 왕자빈이 되었을 것 같아?”
  • 한청연은 더 이상 그녀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 “한청낭, 좌의정 댁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던 건 그렇다 쳐도 이곳은 기안대군 저택이야. 너는 그저 첩실인 측빈일 뿐이고. 첩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 뭔지 알지? 자꾸 이렇게 건방지게 나온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 한청낭은 그녀의 무서운 기세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그녀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 “한청연, 아주 주제 파악이 안 되는군. 어느 사내랑 붙어 먹었는지 모르는 더러운 것이 감히 왕자빈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냐?”
  • 한청연은 화를 내지 않았다.
  • “목소리를 더 높이거라. 아주 저택의 사람 모두가 네 말을 들었으면 좋겠구나. 저하께서 웃음거리가 된다면 나한테만 벌을 내릴 것 같아? 네가 자꾸 나를 이렇게 건드린다면 나는 그 사내가 저하라고 딱 잡아떼겠다. 저하가 날 보시고 욕정에 눈이 멀어 나를 품었다고 말이다. 설마 네가 비구니 절에서 꾸민 짓을 그대로 고할까? 그런다고 해도 두려울 건 없지. 난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데 그런 것을 두려워하겠어?”
  • 한청연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모두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한청낭은 지금의 한청연은 벼랑 끝에 몰린 맹수와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만약 또 한청연을 사지로 몬다면 한청연은 정말 그녀까지 끌어들여서 함께 죽는 결말을 택할 것이다.
  • 한청연은 어떻게 되나 상관없지만 그녀는 모영기에게 순수하고 마냥 착한 모습으로만 남고 싶었다. 그래서 모영기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기 전까지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 그러나 한청연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아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 “비밀을 지켜달라고 사정하는 거야? 아니면 거래를 하자는 거야? 그래도 언니인데 동생 된 도리로 이 일을 떠벌리지 않겠다 약속할게.”
  • 한청연은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들고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 “다 아니야. 한청낭, 나는 지금 너에게 경고하는 거야.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날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지내. 난 더 잃을 게 없는 사람이야.”
  • 여전히 원래의 한청연이고 털끝 하나 달라진 게 없지만 한청낭은 그녀에게서 낯선 느낌을 받았다. 특히 한청연이 온몸으로 내뿜는 한기가 오장육부까지 파고드는 것 같아 한청낭은 저도 모르게 이가 덜덜 떨리고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 순간, 그녀는 멍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아까까지 기고만장하던 기세도 한풀 꺾인 상태였다.
  • 한청연은 고개를 돌려 도순을 보며 말했다.
  • “측빈마마의 손길이 닿았던 이불과 침구를 모두 내가서 불태워 버리거라.”
  • 한청낭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지금 날 모욕하는 거야?”
  • 한청연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난 지금 널 모욕하는 거야. 그러니 저하께 찾아가서 울면서 떼를 쓰든지 마음대로 해. 그러나 그러려면 네가 왜 내 신혼방에 있었는지 설명해야 할 거야.”
  • 말문이 막힌 한청낭은 곧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 “기다려! 저하께서는 분명 내 편을 드실 거야!”
  • 그러고는 하녀를 데리고 투덜거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 도순은 순순히 침구와 베개를 들고 나가 버리고는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 “그럼 오늘 밤에 아씨는 뭘 덮고 주무시려고요?”
  • “예물로 가져온 것을 매일 하나씩 바꿔 덮는다고 해도 한 달 내내 다른 이불로 덮을 것인데 뭐가 걱정이냐?”
  • “하지만 그 예물들은 모두 둘째 아씨가 꿀꺽했는걸요. 예물이 모두 값비싼 재산인데다 금은보화는 상자 맨 아래쪽에 있으니 통째로 가져가는 게 더 편하잖아요.”
  • 한청연은 미처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지라 그만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정말 너무하는구나. 그것이 꿀꺽한 것을 모조리 토해내게 해야겠구나. 몰래 묵을 거처라도 준비해야 나중에 너와 내가 마음 편이 할 수 있는 곳이 있지 않겠느냐?”
  • 도순은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말을 꺼냈다.
  • “아씨, 어제 아씨가 기절하셨을 때, 둘째 아씨가 아씨의 옷깃을 잡아당겨서 본 건데 가슴쪽에 있던 순결점이 안 보이더라고요…”
  • 한청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 “청낭이가 한 말이 사실이야.”
  • 도순은 예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 “그럴 리가 있겠어요? 쇤네가 그 동안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아씨의 곁을 지켰는데 아씨가 외간 남자와 말 섞는 것도 보지 못 했는걸요.”
  • “지난번에 남산의 비구니 절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지 않더냐? 그때 한청낭과 그 년 어머니의 술수에 당했어. 그들이 향에 나쁜 짓을 했더구나. 향을 맡은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때 절 밖에서 들어온 사내에게 그만…”
  • 한청연은 도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계속해서 폭죽을 투여했다.
  • “그리고 어제 회임한 것을 발견했지.”
  • 도순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입술까지 하얗게 질린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이… 이럴 수가?”
  • 한청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 “이게 사실이야. 나는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도 모른단다. 그러니 내가 저하와 화해할 희망을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집으로 돌아간다면 계모의 눈치를 봐야 할 게 뻔한데 나를 어디 내버려 두겠어? 만약 네가 끝까지 날 따른다면 최대한 빨리 살 방도를 마련해 볼게. 네가 혼자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한청낭의 성격 상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 도순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쇤네는 평생 아씨만을 따를 것입니다. 그저 아씨가 너무 걱정되어서… 둘째 아씨는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지독하대요?”
  • “앞으로 우리는 함께 고난을 겪을 운명이니 나는 너에게 속이는 것 없이 다 말했어. 너도 이 일로 기 죽지 말아. 우리는 누구에게도 못된 짓이나 미안한 짓을 하지 말고 우리끼리 잘살면 된다. 예전의 일은… 내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되갚아줄 거야.”
  • ‘왜냐하면 한청낭은 이 몸 주인을 죽음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야. 내가 한청연의 몸에 들어온 이상, 절대 한청낭 모녀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 한청연과 도순은 서로의 마음속 말을 터놓았다. 얼마 뒤, 지친 한청연은 보료에 기댄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눈치 빠른 도순은 그녀가 편히 쉴 수 있게 방에서 나간 뒤, 음식하러 주방으로 향했다.
  • 한청연은 모영기가 자신을 아주 증오하고 있으며 한청낭이 당장 왕자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앞으로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반드시 체력을 보전하고 몸을 잘 추슬러야 했다.
  • 위험한 일이 닥치기 전까지 만반의 준비는 필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