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청낭은 눈을 지그시 감고 빨간 입술을 내밀었다. 두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꺼억.
순간, 당황할 정도로 큰 소리와 함께 술과 안주가 위액과 섞인 시큼한 냄새가 모영기의 코를 후벼파고 들어왔다.
그는 흠칫 놀라더니 품에 안긴 여인을 확 밀쳐냈다. 그는 결벽증이 있어 조금이라도 더럽혀진 물건이나 냄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청낭은 민망하게 웃으며 변명하려고 했다. 그 순간, 또 꺼억 하고 트림이 나왔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숨을 들이쉬었으나 그러고도 연속 몇 번이나 트림이 나왔다.
“술을 많이 마셨나 보구나. 얼른 쉬거라.”
모영기는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청낭은 원망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찬바람을 맞았더니… 저하, 꺼억, 어디… 꺼억… 가시는 것입니까?”
모영기는 또 화가 치밀었다. 거처가 얄미운 그 여인에게 빼앗긴 지금, 그가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서재로 갈 것이다!”
화풀이를 한 한청연은 단잠에 빠졌다.
이튿날 아침, 한청낭은 사람을 시켜 그녀의 예물을 보내왔다. 정원에는 크고 작은 상자로 가득 채워졌다.
시간을 확인한 한청연은 모영기가 어젯밤 자등원에 묵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한청낭의 수단으로 둘이 새벽까지 뜨거운 시간을 보냈을 터, 한청낭이 늦게까지 잠을 자도 모자라겠는데 아침 일찍 예물을 보낼 리 없었다.
한청연은 예물 가짓수를 확인한 뒤, 자리가 널찍한 편전에 옮겨가게 했다. 그리고 땅문서와 돈은 스스로 간직했다. 계모가 그녀의 예물로 보낸 가게 매매서는 손해 보는 곳이 분명했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 나을 게 뻔하니 나중에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생각해볼 예정이었다.
또 하인 세 명도 딸려 보냈는데 한 명은 좌의정 댁에서 나고 자란 아이였다. 열두 살이 채 되지 않는 영식이(灵倌儿)는 아주 영리하고 똘똘하여 심부름 전용으로 부리고 있었다. 사내아이지만 나이가 어려 안채에서도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왕 어멈이었는데 한청낭이 다시 그녀에게 보낸 듯했다. 그러나 한청연은 계약서 중에서 그녀의 노비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김씨나 한청낭이 가지고 있는 듯했다.
세 번째 사람은 한청연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몸집이 우람한 왕 어멈 나이또래 아낙이었다. 피부가 시커멓고 눈이 쪽 찢어진 것을 봐서 만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깍듯하게 한청연에게 예를 올린 뒤, 모영기가 보내서 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의 성씨는 조(刁)씨였다.
‘모영기는 참 좀생이라니까. 이 안채에 훔쳐갈 게 뭐가 있다고 아낙까지 보내서 날 감시하게 해?’
한청연은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이했다.
“저하께서는 다정하시기도 하셔라. 부릴 사람이 부족한 것을 어찌 알고 자네를 보냈지? 조 어멈은 음식할 줄 아는지 모르겠네?”
조 어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상적인 음식은 모두 할 줄 압니다.”
한청연은 실눈을 뜨고 활짝 웃었다.
“잘됐군. 내가 음식을 잘하지 못해서 죽 한 번 해본 적이 없단다. 앞으로 우리의 음식은 조 어멈에게 부탁하겠네.”
조 어멈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답했다.
“네, 알겠사옵니다.”
한청연은 아침밥을 사오게 영식이를 내보낸 뒤, 왕 어멈을 힐끗 보고 말했다.
“조 어멈은 처음 온 손님이니 너무 힘들게 할 수도 없고 도순이는 부상당한 나를 대신해 할머님께 드릴 약을 지어야 하니 왕 어멈이 일을 많이 해야겠어. 이 안채의 모든 잡일을 다 해주려무나. 오늘 오전에는 먼저 부엌 아궁이부터 지어라. 이따 영식이를 시켜서 식재료를 사올 테니 음식 할 준비를 해야지.”
왕 어멈은 좌의정 댁에서도 노비였으나 그때는 그나마 존중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힘들고 더러운 일은 더 아랫사람들에게 시켰기에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씨, 저는 할 줄 모릅니다.”
“왕 어멈은 붙임성이 좋아서 기안대군부의 하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던데?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될 것이지 이것도 내가 가르쳐야 하나?”
왕 어멈은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왠지 눈앞에 있는 한청연이 그녀가 알던 한청연과 다른 것 같아 의아한 눈빛으로 힐끗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아궁이를 어디에 지으면 될까요?”
모영기의 거처는 남향에 위치해 있었다. 한청연은 어제 대충 둘러보았어서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정 중앙의 방 세 곳은 각각 안방과 사랑채였다. 양 옆에는 서재와 목욕방이 있고 가장 귀퉁이는 창고방과 하인의 거처가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무심코 한 곳을 짚었다.
“서재에 아궁이를 짓거라. 안에 땔감이 많으니 불을 피우기 쉬울 게 아니냐?”
조 어멈은 깜짝 놀랐다.
“왕자빈마마, 절대 아니됩니다. 서재 안에는 대군마마가 아끼시는 병서가 잔뜩 들어 있어요. 금보다도 더 귀한 것인데 땔감으로 쓰다니요.”
한청연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매일같이 병서를 본다면서 왜 그렇게 멍청한 거야? 한청낭 같은 저급한 술수에 놀아나는 꼴이라니. 그럴 거면 차라리 병서를 보지 않는 게 낫겠지.’
그러나 그녀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모영기 같은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음식을 하다가 서재를 홀랑 불태워 먹으면 어떡해?’
창고방 안의 물건을 옮긴다면 방 하나를 낼 수 있었다.
한청연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럼 곁채 하나를 골라 아궁이를 지어. 어차피 이틀만 쓸 거니까.”
한청낭이 그녀의 음식에 독을 탈까 두려운 게 아니라면 그녀도 귀찮게 이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조 어멈더러 음식을 도맡아 하라고 한 것은 한청낭이 모영기 앞에서만큼은 착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조 어멈을 매수하거나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타임슬립하면 잘만 살더만 나는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것을 배 속에 품고 살게 생겼네. 생존 자체가 문제인데 사람을 경계까지 해야 하다니 휴.’
이때, 영식이가 음식을 사 들고 돌아왔다. 만두와 떡을 보니 꽤 먹음직하게 생겼다. 그는 또 동전 몇 푼으로 대나무를 꼬아 만든 찬합을 사 왔다. 그리고 사온 찬합을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눈썰미가 좋은 그녀는 영식이의 팔뚝에 빨간 물집이 몇 곳 생긴 것을 발견했다. 어떤 곳은 긁어서 피가 난 상태였다.
“너 몸이 왜 그러냐?”
영식이는 황급히 옷소매를 내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기에게 물린 자국입니다.”
이른 봄인데 모기가 있을 리 없었다. 한청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밤에는 어디에서 자는 것이냐?”
영식이는 우물쭈물 머뭇거리다가 한청연이 재촉해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구간이요.”
‘마구간? 말들과 같이 잔다는 말이야?’
마구간은 환경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각종 벌레들이 가득해서 사람이 잘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 기안대군부 정말 너무하는군. 영식이는 내 혼인 예물로 따라온 아이인데 이렇게 사람취급도 안 해주는 거야?’
하지만 그녀가 거처하는 안채에 묵게 할 수는 없었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식이는 한청연의 얼굴에 드리운 노기를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잠이 깊게 들어 벌레에 물리는 줄도 모른 제 탓이지요.”
아이가 셈이 일찍 들수록 한청연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만두를 힘껏 씹으며 말했다.
“도순아, 상자에서 은전 두 냥을 꺼내 영식이에게 줘.”
“아씨, 뭘 사시게요?”
한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조 어멈이 너에게 말할 것이다. 이 은전은 저택의 하인들과 집사에게 주어 너에게 좋은 잠자리를 마련해 주게 하여라. 만약 그래도 그들이 널 다른 곳에 데려가지 않는다면 나에게 말하면 된다. 내가 나설 것이니.”
영식이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어찌 아씨께서 이렇게 큰 돈을 쓰게 할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잠잘 곳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받으라면 받아. 아끼지 말고 펑펑 퍼주란 말이다. 만약 내가 이 저택을 떠나게 된다면 미리 인맥을 쌓아둔 게 너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식이는 코가 시큰했다.
“오기 전에 어머님이 그러시는데 아씨가 제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은 아씨가 가는 곳을 끝까지 따라갈 것입니다.”
한청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는 반지에서 버물리 한 통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따 벌레에 물린 곳에 문지르면 시원해지고 가렵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너희들 주인이니 앞으로 최대한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이건 내 책임이기도 하단다. 그러니 앞으로 설움을 겪거든 꼭 나에게 말해다오.”
영식이는 흥분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는 버물리를 손에 꼭 쥔 채, 신나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