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심각한 것은 아니니 마마께서 염려하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심장이 조이는 느낌이라고 하셨습니다.”
혜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둘을 재촉했다.
“그럼 뭣들 하는 것이냐? 영기야, 얼른 어미를 대신하여 외할머니를 뵈러 가려무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꼭 사람을 보내 이 어미에게 소식을 전해주고.”
모영기도 무엇이 중요한지를 잘 알기에 기별의 일로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돌려 한청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마마마.”
한청연은 모영기를 좋다 싫다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늘 모영기와 깔끔하게 끝내기를 바란 한편, 혹시나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 명예가 더럽혀지고 상황이 처참해질까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안국공부에서 그녀를 찾는다고 하자 그녀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모영기가 부랴부랴 떠날 준비를 하자 그녀도 묵묵히 몸을 돌렸다. 입구까지 걸어갔을 때, 한청연은 고개를 돌리고 혜비를 보며 말했다.
“아까 어마마마께 말씀드리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소첩이 찻잔을 떨어뜨린 것은 그 차에 설사약이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기 상궁이 있어서 소첩은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그리 한 것입니다.”
말을 마친 한청연은 혜비의 반응을 살피지도 않고 모영기를 따라 침궁(寝殿)을 떠났다.
뒤에서 궁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쇤네 억울합니다. 혜비마마, 정말 억울합니다.”
한청연은 피식 하고 냉소를 하였다. 혜비는 그녀의 말을 듣고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 꼭 어의를 불러 검사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분명 바닥에 떨어진 찻잔 파편에서 설사약이 발견될 것이고 차를 올린 궁녀를 끝까지 문책할 것이다.
‘겸하전에 사람이 몇인데 그 궁녀가 누구도 모르게 일을 꾸몄을 리 없어.’
이빨 빠진 호랑이도 호랑이라고, 그녀는 어찌 되었건 좌의정의 적통 여식이자 명의 상으로 기안대군의 정실이었다. 그런데 감히 궁녀가 이런 수작을 부리다니?
‘내가 만만히 당할 것 같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지. 나 한청연은 남들이 마음대로 밟아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압정이라고!’
침궁을 나선 모영기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한청연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고 비꼬았다.
“좌의정 댁 여식이라 그런지 사람 상대하는 재주가 놀랍군 그려. 농처럼 던진 한마디로 사람 목숨을 앗아가게 하다니 말이오.”
한청연은 흠칫 놀랐다.
‘이자는 나를 아주 싫어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내가 몰래 손쓴 걸 안 거지? 아까 이자가 받았던 찻잔도 뜨거워서 아는 건가?’
“남이 내 따귀를 쳐서 받은 대로 돌려준 것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건지요. 차에 독을 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사정을 봐준 것입니다. 저하께서 아까의 그 궁녀가 안쓰럽게 여겨지신다면 혜비마마께 사정해 보시지요.”
모영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제 보니 말을 참 잘하는군.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테지만 조금 뒤에 안국공부에 도착한다면 외할머니 앞에서 수작을 부리지 말고 병을 잘 치료해 주시오. 내가 그대에게 관심을 가질 일은 없을 터이니.”
한청연은 경사방 상궁 앞에서 모영기가 그녀를 감싸준 것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오만방자한 발언을 듣는 순간, 한청연은 너털웃음만 나왔다.
“저하는 참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시네요. 저 역시 저하에게 관심이 없어요.”
“자결한다 만다 하면서 나에게 시집오겠다 한 것은 그대였소.”
한청연은 그제야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대비가 둘의 혼인을 결정지은 뒤, 전쟁터에서 돌아온 모영기는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한청낭이 모영기를 꼬시기 전이었다. 이렇게 좋은 사윗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좌의정은 대비에게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한청연이 혼인을 취소한다는 말에 평생 모영기가 아닌 남자와는 혼인을 하지 않겠다 하면서 자결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그때 그의 연기가 얼마나 진짜 같고 과장스러웠는지 결국 고집을 못 이긴 모영기는 혼인을 허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