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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음식을 따로 하다

  • 자등원에서 한청낭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달래자 어둡던 모영기의 안색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 한청낭은 술을 한 잔, 또 한 잔 따라주었다. 모영기는 침울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한청낭이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에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 술이 점점 들어가자 모영기는 몸이 달아오르며 방 안의 분위기도 점차 야릇해졌다. 한청낭은 천천히 몸을 그에게 기대며 팔로 모영기의 목을 감쌌다. 그녀의 반쯤 풀어 젖힌 저고리 사이로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 “저하, 시간이 늦었는데 제가 안방으로 모실까요?”
  • 모영기는 술 한잔을 벌컥 들이키더니 한청낭의 가슴팍에 난 순결점을 바라보았다. 문득 울화가 마음속에서 치밀었다.
  • 한청낭은 눈을 지그시 감고 빨간 입술을 내밀었다. 두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 꺼억.
  • 순간, 당황할 정도로 큰 소리와 함께 술과 안주가 위액과 섞인 시큼한 냄새가 모영기의 코를 후벼파고 들어왔다.
  • 그는 흠칫 놀라더니 품에 안긴 여인을 확 밀쳐냈다. 그는 결벽증이 있어 조금이라도 더럽혀진 물건이나 냄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 한청낭은 민망하게 웃으며 변명하려고 했다. 그 순간, 또 꺼억 하고 트림이 나왔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숨을 들이쉬었으나 그러고도 연속 몇 번이나 트림이 나왔다.
  • “술을 많이 마셨나 보구나. 얼른 쉬거라.”
  • 모영기는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한청낭은 원망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아까 찬바람을 맞았더니… 저하, 꺼억, 어디… 꺼억… 가시는 것입니까?”
  • 모영기는 또 화가 치밀었다. 거처가 얄미운 그 여인에게 빼앗긴 지금, 그가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서재로 갈 것이다!”
  • 화풀이를 한 한청연은 단잠에 빠졌다.
  • 이튿날 아침, 한청낭은 사람을 시켜 그녀의 예물을 보내왔다. 정원에는 크고 작은 상자로 가득 채워졌다.
  • 시간을 확인한 한청연은 모영기가 어젯밤 자등원에 묵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한청낭의 수단으로 둘이 새벽까지 뜨거운 시간을 보냈을 터, 한청낭이 늦게까지 잠을 자도 모자라겠는데 아침 일찍 예물을 보낼 리 없었다.
  • 한청연은 예물 가짓수를 확인한 뒤, 자리가 널찍한 편전에 옮겨가게 했다. 그리고 땅문서와 돈은 스스로 간직했다. 계모가 그녀의 예물로 보낸 가게 매매서는 손해 보는 곳이 분명했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 나을 게 뻔하니 나중에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생각해볼 예정이었다.
  • 또 하인 세 명도 딸려 보냈는데 한 명은 좌의정 댁에서 나고 자란 아이였다. 열두 살이 채 되지 않는 영식이(灵倌儿)는 아주 영리하고 똘똘하여 심부름 전용으로 부리고 있었다. 사내아이지만 나이가 어려 안채에서도 발을 들일 수 있었다.
  • 또 다른 한 명은 왕 어멈이었는데 한청낭이 다시 그녀에게 보낸 듯했다. 그러나 한청연은 계약서 중에서 그녀의 노비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김씨나 한청낭이 가지고 있는 듯했다.
  • 세 번째 사람은 한청연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몸집이 우람한 왕 어멈 나이또래 아낙이었다. 피부가 시커멓고 눈이 쪽 찢어진 것을 봐서 만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깍듯하게 한청연에게 예를 올린 뒤, 모영기가 보내서 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의 성씨는 조(刁)씨였다.
  • ‘모영기는 참 좀생이라니까. 이 안채에 훔쳐갈 게 뭐가 있다고 아낙까지 보내서 날 감시하게 해?’
  • 한청연은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이했다.
  • “저하께서는 다정하시기도 하셔라. 부릴 사람이 부족한 것을 어찌 알고 자네를 보냈지? 조 어멈은 음식할 줄 아는지 모르겠네?”
  • 조 어멈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일상적인 음식은 모두 할 줄 압니다.”
  • 한청연은 실눈을 뜨고 활짝 웃었다.
  • “잘됐군. 내가 음식을 잘하지 못해서 죽 한 번 해본 적이 없단다. 앞으로 우리의 음식은 조 어멈에게 부탁하겠네.”
  • 조 어멈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답했다.
  • “네, 알겠사옵니다.”
  • 한청연은 아침밥을 사오게 영식이를 내보낸 뒤, 왕 어멈을 힐끗 보고 말했다.
  • “조 어멈은 처음 온 손님이니 너무 힘들게 할 수도 없고 도순이는 부상당한 나를 대신해 할머님께 드릴 약을 지어야 하니 왕 어멈이 일을 많이 해야겠어. 이 안채의 모든 잡일을 다 해주려무나. 오늘 오전에는 먼저 부엌 아궁이부터 지어라. 이따 영식이를 시켜서 식재료를 사올 테니 음식 할 준비를 해야지.”
  • 왕 어멈은 좌의정 댁에서도 노비였으나 그때는 그나마 존중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힘들고 더러운 일은 더 아랫사람들에게 시켰기에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 “아씨, 저는 할 줄 모릅니다.”
  • “왕 어멈은 붙임성이 좋아서 기안대군부의 하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던데?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될 것이지 이것도 내가 가르쳐야 하나?”
  • 왕 어멈은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왠지 눈앞에 있는 한청연이 그녀가 알던 한청연과 다른 것 같아 의아한 눈빛으로 힐끗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아궁이를 어디에 지으면 될까요?”
  • 모영기의 거처는 남향에 위치해 있었다. 한청연은 어제 대충 둘러보았어서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정 중앙의 방 세 곳은 각각 안방과 사랑채였다. 양 옆에는 서재와 목욕방이 있고 가장 귀퉁이는 창고방과 하인의 거처가 있었다.
  •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무심코 한 곳을 짚었다.
  • “서재에 아궁이를 짓거라. 안에 땔감이 많으니 불을 피우기 쉬울 게 아니냐?”
  • 조 어멈은 깜짝 놀랐다.
  • “왕자빈마마, 절대 아니됩니다. 서재 안에는 대군마마가 아끼시는 병서가 잔뜩 들어 있어요. 금보다도 더 귀한 것인데 땔감으로 쓰다니요.”
  • 한청연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 ‘매일같이 병서를 본다면서 왜 그렇게 멍청한 거야? 한청낭 같은 저급한 술수에 놀아나는 꼴이라니. 그럴 거면 차라리 병서를 보지 않는 게 낫겠지.’
  • 그러나 그녀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 모영기 같은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기 때문이었다.
  • ‘혹시라도 내가 음식을 하다가 서재를 홀랑 불태워 먹으면 어떡해?’
  • 창고방 안의 물건을 옮긴다면 방 하나를 낼 수 있었다.
  • 한청연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 “그럼 곁채 하나를 골라 아궁이를 지어. 어차피 이틀만 쓸 거니까.”
  • 한청낭이 그녀의 음식에 독을 탈까 두려운 게 아니라면 그녀도 귀찮게 이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조 어멈더러 음식을 도맡아 하라고 한 것은 한청낭이 모영기 앞에서만큼은 착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조 어멈을 매수하거나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남들은 타임슬립하면 잘만 살더만 나는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것을 배 속에 품고 살게 생겼네. 생존 자체가 문제인데 사람을 경계까지 해야 하다니 휴.’
  • 이때, 영식이가 음식을 사 들고 돌아왔다. 만두와 떡을 보니 꽤 먹음직하게 생겼다. 그는 또 동전 몇 푼으로 대나무를 꼬아 만든 찬합을 사 왔다. 그리고 사온 찬합을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눈썰미가 좋은 그녀는 영식이의 팔뚝에 빨간 물집이 몇 곳 생긴 것을 발견했다. 어떤 곳은 긁어서 피가 난 상태였다.
  • “너 몸이 왜 그러냐?”
  • 영식이는 황급히 옷소매를 내리며 말했다.
  •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기에게 물린 자국입니다.”
  • 이른 봄인데 모기가 있을 리 없었다. 한청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 “밤에는 어디에서 자는 것이냐?”
  • 영식이는 우물쭈물 머뭇거리다가 한청연이 재촉해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마구간이요.”
  • ‘마구간? 말들과 같이 잔다는 말이야?’
  • 마구간은 환경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각종 벌레들이 가득해서 사람이 잘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 ‘이 기안대군부 정말 너무하는군. 영식이는 내 혼인 예물로 따라온 아이인데 이렇게 사람취급도 안 해주는 거야?’
  • 하지만 그녀가 거처하는 안채에 묵게 할 수는 없었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영식이는 한청연의 얼굴에 드리운 노기를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저는 괜찮습니다. 잠이 깊게 들어 벌레에 물리는 줄도 모른 제 탓이지요.”
  • 아이가 셈이 일찍 들수록 한청연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만두를 힘껏 씹으며 말했다.
  • “도순아, 상자에서 은전 두 냥을 꺼내 영식이에게 줘.”
  • “아씨, 뭘 사시게요?”
  • 한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 “필요한 게 있으면 조 어멈이 너에게 말할 것이다. 이 은전은 저택의 하인들과 집사에게 주어 너에게 좋은 잠자리를 마련해 주게 하여라. 만약 그래도 그들이 널 다른 곳에 데려가지 않는다면 나에게 말하면 된다. 내가 나설 것이니.”
  • 영식이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 “어찌 아씨께서 이렇게 큰 돈을 쓰게 할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잠잘 곳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 “받으라면 받아. 아끼지 말고 펑펑 퍼주란 말이다. 만약 내가 이 저택을 떠나게 된다면 미리 인맥을 쌓아둔 게 너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영식이는 코가 시큰했다.
  • “오기 전에 어머님이 그러시는데 아씨가 제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은 아씨가 가는 곳을 끝까지 따라갈 것입니다.”
  • 한청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 그녀는 반지에서 버물리 한 통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 “이따 벌레에 물린 곳에 문지르면 시원해지고 가렵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너희들 주인이니 앞으로 최대한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이건 내 책임이기도 하단다. 그러니 앞으로 설움을 겪거든 꼭 나에게 말해다오.”
  • 영식이는 흥분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는 버물리를 손에 꼭 쥔 채, 신나서 대답했다.
  • “네!”
  • 옆에 있던 조 어멈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한청연을 힐끗 본 뒤, 다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