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3화 왕자빈 자리는 원래부터 내 거였어

  • 꿈인 듯, 생시인 듯, 기절해 있던 한청연은 또다시 한 달 전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계모는 그녀와 한청낭을 데리고 향을 피우러 남산의 비구니 절로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그들은 남산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 한청연은 불상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병으로 앓아누운 오라버니를 위해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탁자 위의 향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 술을 마신 그녀는 정신이 어지러워지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이때, 절 밖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발소리와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 방으로 피하려고 했다.
  • 그런데 절 안의 촛불이 갑자기 꺼지며 사방이 온통 어둠에 싸였다. 순간 그녀는 낯선 이의 품에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더니 입이 막힌 채, 뒷산의 등가(紫藤架) 아래로 데려갔다.
  • 남자의 품에서 풍기는 설련화(雪莲) 향에 취한 한청연은 덩굴처럼 남자의 허리에 칭칭 매달렸다.
  • 번개가 번쩍이는 순간, 한청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얼굴의 반을 가린 독수리 가면을 한, 눈썹이 짙은 사내임을 알아보았다.
  • 이로써 순결을 뜻하는 순결점(守宫砂)이 점차 옅어지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었다.
  • “넌 누구냐?”
  •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한… 청…”
  • 그러나 아래쪽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했다.
  • 이튿날이 되자 밤새 내린 폭우로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들이 땅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낯선 선실(禅房)에 누워 있었다. 가슴팍에 자리한 여인의 순결을 뜻하는 점은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머리카락에는 자등나무 꽃잎과 비의 습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 한편, 계모와 한청낭은 그녀를 찾느라 밖에서 수선을 떨었다.
  • 이 악몽은 한청연을 한 달 넘게 괴롭혔다. 그녀는 계모와 한청낭의 끈질긴 추궁 끝에 길을 잃었던 거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순결을 잃은 일로 매일같이 우울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 머리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귓가에서 들리는 훌쩍이는 울음소리에 기절해 있던 한청연은 흠칫하고 정신을 차렸다. 가슴팍, 목,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도순이 보였다.
  •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낡아빠진 탁자와 의자, 문풍지가 뚫려 바람이 새는 창문, 거미줄이 쳐진 천장이 보이는 초라한 방이었다. 그녀는 한참 애를 써서야 자신이 지금 죽는 것보다 못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까의 악몽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 도순은 그녀가 또 혼절한 줄 알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 “아씨, 아씨? 절 버리고 가시면 안돼요!”
  •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한청연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타임슬립해서 이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 “여기는 어디야?”
  • “기안대군의 저택입니다, 아씨. 꼬박 하루 내내 혼절해 계셨어요.”
  • 도순은 코를 훌쩍이더니 초라한 방을 보면서 말했다.
  • “이곳은 창고방으로 쓰이는 곳입니다. 대군마마께서 아씨가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도움을 줘서는 안 된다고…”
  • 한청연은 가슴팍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서투른 솜씨로 붕대가 감겨진 것을 보니 도순이 싸맨 것인 듯했다.
  • ‘목숨 한 번 질기군.’
  •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 “내가 자신의 집을 더럽힐까 두렵지 않다던?”
  • “당연히 두렵지.”
  • 문가에서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할머님 상황이 불안정하니 네 치료가 꼭 필요하다고 심씨 도련님이 사정하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쯤 문 앞에서 죽었을 거야. 그래도 누구 하나 시선을 주지 않았겠지.”
  • 한청연은 실눈을 뜨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 “한청낭!”
  • 비취 장신구를 하고 금색의 자수가 놓인 치마를 입은 한청낭이 거들먹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린 채, 손수건을 코로 가져갔다.
  • “언니 목숨 참 질겨. 이런 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다니.”
  • 한청연은 도순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 “살 날이 많은데 급히 갈 필요는 없잖아?”
  • “내가 급하다는 게 아니고.”
  • 한청낭은 깔깔거리며 웃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청연의 흐트러진 옷깃을 힐끗 바라보았다.
  • “언니가 급히 저세상으로 갈까 봐 그러지!”
  • 그녀가 순결을 잃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모영기도 절대 소문내지 않을 것이다.
  • 한청연은 고개를 숙이고 순결점(赤莲守宫)이 사라진 가슴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네가 그런 거지? 지난 번에 남산에 갔을 때, 네가 내 향에 무슨 짓을 한 거지?”
  • 그런 게 아니라면 밤늦은 시간에 비구니 절에 남자가 나타날 리 없지 않은가?
  • 한청낭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더니 둘만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로 말했다.
  • “예상했다니 하는 말인데 너를 해친 사람은 내가 아니야. 언니가 오밤중에 남자랑 나가 뒹굴 줄 누가 알았겠어? 우리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 줄 알았잖아. 그런데 혼례날에 이렇게 큰 기쁨을 안겨주다니. 동생이 되어서 너무 기쁘네. 저하의 노한 얼굴을 보는 순간, 언니의 추악한 일이 들켰다는 것을 알았지. 안 그래?”
  • 한청연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 “내 왕자빈 자리를 꿰차려고 이런 짓을 꾸민 거야?”
  • 한청낭은 고개를 젖히고 깔깔 웃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 장식이 흔들리며 금빛을 뿜었다.
  • “저하는 전하의 총애를 받는 왕자님이신데다 문무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지. 저하의 빈은 원래 내 자리였어야 했어. 네 명이 짧은 어머니가 내 어머니의 정실 자리를 꿰차지 않았다면, 그래서 너 따위가 정실 부인 소생이라는 명분을 가로채지 않았다면 그건 다 내 거였어야 했다고. 난 반드시 나의 것을 조금씩 되찾아올 거야.”
  • “그래서 일부러 저하의 앞에서 연기를 한 거냐? 내가 널 떠밀어서 물에 빠진 양 모든 잘못을 나에게 뒤집어씌우고? 그리고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저하에게 피해자인 것처럼 동정을 사고?”
  • “그게 뭐가 어때서 그래? 그날 저하가 우리 집에 오셔서 아버님이랑 정원을 거닐 때, 난 그냥 언니의 저고리를 풀어헤치려고 했어. 순결점이 아직 있나 볼 겸, 다른 사람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거든. 그런데 경계를 늦추지 않은 언니가 나를 밀치는 바람에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 나 일부러 그런 거야. 저하가 언니를 악독한 여인이라고 생각하시고 미워하셔야 하니까. 혼례를 취소하고 날 정실로 맞이하기로 한 것을 보면 그러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 “내가 이 모든 걸 저하께 말씀드릴까 두렵지도 않아?”
  • 한청낭은 깔깔 웃더니 경멸스러운 얼굴로 한청연과 도순을 힐끗 바라보았다.
  • “들은 사람이 언니와 하녀밖에 없는데 누가 믿는다고 그래? 한청연, 자신의 신분 파악이 안되는 거야? 너는 가문의 수치이자 저하의 미움을 받는 천덕꾸러기라고.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그녀는 봉선화 물을 들인 손톱을 천천히 펼쳐서 한청연의 창백한 얼굴에 가져다 댔다.
  • “내가 돌아가서 아버님께 이 얘기를 한다면 아버님은 언니를 죽이라고 할 거야. 죽는 게 소박맞았다는 것보다 덜 창피할 거 아니야? 죽으면 좌의정 댁의 명예에 누가 되지도 않고 말이야.”
  • 도순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청낭에게 덮쳤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씨에게서 손 떼세요!”
  • 그러나 도순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 “저리 비켜. 어디서 감히 말대답질이야!”
  • 한청연은 눈으로 한기를 내뿜더니 한청낭의 손목을 잡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한청낭이 비명을 질렀다.
  • “으악!”
  • 한청연은 이를 악문 채, 또박또박 말했다.
  • “도순이를 건드리기만 해봐!”
  • 죽어가던 한청연이 이렇게 큰 힘을 쓸 줄 몰랐던 한청낭은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거만하던 방금 전과 달리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했다.
  • “언니, 잘못했어. 이거 놔. 제발…”
  • 이때, 누군가 방문을 걷어차더니 바람과 함께 모영기가 들어왔다. 그는 무쇠처럼 단단한 손으로 한청연의 팔목을 잡고 말했다.
  • “한청연, 죽고 싶은 거요!”
  • 극심한 통증에 한청연은 신음을 흘리며 한청낭의 손목을 잡은 손을 풀어주었다. 팔목이 부러질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식은땀을 흘렸다.
  • 한청낭은 가녀린 신음과 함께 모영기의 품으로 뛰어들며 어깨를 들썩였다.
  • “저하, 살려주세요!”
  • 모영기는 한청연의 손을 뿌리치고는 안타까운 얼굴로 품에 안긴 한청낭을 내려다보았다.
  • “저 미친 여인과 거리를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마음이 여려서 보러 왔다가 이게 무슨 꼴이냐? 저 여인에게 널 해칠 기회만 주지 않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