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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합방하는 걸 방해해야지

  • 한청연은 몸이 허약한 탓에 바로 잠이 들었다. 하지만 가슴팍의 상처에서 전해지는 통증 때문인지 온갖 이상한 꿈을 꾸었다.
  • 그녀는 꿈속에서 모영기와 설레는 첫만남을 보았다.
  • 보름 전 좌의정 댁에서 그녀는 한청낭과 함께 뒤뜰의 화랑에서 마주쳤다. 한청낭은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를 보자마자 비꼬며 악담을 퍼부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라버니가 병으로 앓아누운 뒤로 기댈 데 없는 한청연은 한청낭의 도발에도 그냥 꾹 참고 넘기기 일쑤였다.
  • 그러나 한청낭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는 한청연의 앞길을 막고는 한청연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 “촌구석에서 자란 년이 수치스러운 것을 알 리가 없지. 정체도 모르는 사내와 뒹굴었으면서 내 앞에서 도도한 척하는 거 아니야? 오늘 어디 한 번 순결점이 그대로 있나 검사해 볼까?”
  • 한청연은 한청낭이 행여나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될까 두려워 당황한 얼굴로 몸을 가렸다.
  • 이때, 한청낭이 갑자기 뒤로 비틀거리며 가더니 비명과 함께 연못에 풍덩 빠졌다.
  • 그러자 한청낭의 하녀 지추(知秋)가 큰소리로 외쳤다.
  • “사람 살려요! 큰 아씨가 둘째 아씨를 물에 빠뜨렸어요!”
  • 물속에서 허우적거린 탓에 한청낭의 저고리가 벗겨져 하얗고 예쁜 어깨가 드러났다. 한씨 가문 여식들에게만 있는 특유의 순결점이 물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 이때, 독수리처럼 강한 기세로 잘생긴 남자가 날아오더니 물속으로 들어가 한청낭을 건져내 다리 위에 세워 두었다. 그는 어두운 시선으로 한청낭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보더니 자신의 피풍의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 한청낭은 가냘픈 몸을 남자의 팔에 기대고는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대군마마.”
  • 신처럼 강림한 듯한 남자가 바로 모영기였고 이것이 둘의 첫 만남이었다.
  • 이때, 뒤에서 좌의정이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한청연의 따귀를 내리쳤다.
  • “지독한 것 같으니! 자신의 여동생에게 이렇게 모질게 굴어? 얼른 무릎 꿇지 못 할까!”
  •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를 보면서 한청연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쌌다. 순간 설움을 울컥 치밀었다.
  • “아니에요, 쟤가 먼저 절 모욕해서 제가 그저 막은 것뿐이에요.”
  •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발뺌하다니. 방금 전에 나와 대군마마가 모두 보았는데 끝까지 아니라고?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 얼른 동생에게 사과하고 대군마마의 용서를 구하지 못 할까?”
  •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한청낭은 몸을 덜덜 떨면서 애원했다.
  • “제가 조심하지 않아 물에 빠진 것이니 아버님, 언니를 탓하지 마십시오.”
  • 모영기는 고개를 돌렸다. 순간 차갑고 어두운 눈빛이 한청연에게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혐오의 빛이 역력했다.
  • “기고만장하고 악독하기 그지없는 낭자군. 좌의정 나리, 이 낭자가 바로 좌의정의 큰 여식입니까? 할마마마께서 말씀하신 것과 많이 다르네요.”
  • 좌의정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제가 잘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지금 바로 저택의 어멈을 시켜 잘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 모영기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럴 필요 없겠는데요!”
  • 모영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 “좌의정 나리의 큰 여식이 너무나 오만방자하여 제가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지금 바로 입궐하여 아바마마와 할마마마께 혼약을 취소해 달라 간청 드리겠습니다.”
  • 좌의정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 “대군마마, 그건…”
  • 모영기는 고개를 숙이고 품에 안긴 가녀린 한청낭을 보더니 말했다.
  • “그리고 둘째 낭자를 왕자빈으로 맞이하겠다 말할 거고요.”
  • 한청연은 흠칫 놀랐다. 서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홀가분하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비구니 절에서 겁탈당한 뒤로 모영기는 그녀에게 바라볼 수조차 없이 아득한 존재로 되고 말았다.
  • 좌의정은 깜짝 놀랐다가 슬그머니 기쁜 얼굴로 말했다.
  • “제 여식이 대군마마의 눈에 들었다니, 너무 영광입니다.”
  • 모영기는 콧방귀를 뀌었다.
  • “그것보다 좌의정 나리는 큰 여식을 잘 가르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는 더 이상 미래의 왕자빈이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볼 수 없을 것 같으니.”
  • 한청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눈에서 맴돌던 눈물은 끝내 주르륵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로 한청낭이 모영기의 보호를 받으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떠나기 전, 한청낭은 그녀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한청연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쓴웃음을 지었지만 가슴이 너무 아팠다. 가슴팍의 상처 때문도 있었고 몸 주인의 아픈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서인 것도 있었다.
  • 아버지에게도 예쁨을 받지 못하고 자란 데다 계모의 음해, 사랑하는 이를 빼앗아 간 배 다른 여동생 때문에 원래의 한청연은 자결을 선택한 것 같았다.
  • ‘그러다 보니 한도 몸속에 남아 있겠지.’
  • 밖에 있던 도순은 인기척을 듣고 살그머니 들어왔다.
  • “아씨, 깨셨어요? 상처는 괜찮으세요?”
  • 창 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벌써 노을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얀색 문풍지를 뚫고 들어온 노을은 탁자 위의 꽃병에 금색을 더해 주었다.
  • “많이 좋아졌어.”
  •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 토끼처럼 눈이 빨갛게 부은 도순이 눈에 들어왔다.
  • “왜 우는 거야? 누가 너를 괴롭혔어?”
  • 도순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 눈을 비볐을 뿐입니다.”
  • “사실대로 말해!”
  • 그제야 도순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 “기안대군 저택의 사람들은 정말 너무합니다. 방금 전에 아씨에게 고기죽이라도 해드릴까 싶어 주방으로 갔다가 모욕을 당했지 뭐예요. 아궁이에서 국이 끓고 술도 덥혀지고 있는데 그것들이 불을 껐다고 밥을 지어먹으려면 밤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 순간 한청연도 배고픈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꽃가마에 탄 뒤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가 입궐했을 때도 역시 점심이 지난 때였다. 도순 역시 그녀를 따라다니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게 분명했다.
  • 그녀는 도순의 손을 잡고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긴 뒤, 눈물을 닦아주었다.
  •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 어디를 가든 남을 무시하고 괴롭히려는 사람이 있는 법이야. 그런 인간들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나한테 다 얘기하면 되지. 내가 다 물리쳐 줄게. 저하는?”
  • 도순은 한청연의 현재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쇤네 상처받지 않았어요. 아씨, 절대 대군마마를 찾아가지 마세요.”
  • 한청연은 신발을 신고 일어났다.
  • “생각이 다 있으니 걱정하지 마. 어디 계시는데?”
  • “주방에서 술과 안주를 준비하는 걸 보니 둘째 아씨의 방으로 가신 것 같아요.”
  • ‘그러고 보니 깜박했군. 모영기는 어제 합방하지 못했으니 오늘 급히 한청낭에게 가서 신혼 첫날밤을 즐기겠지.’
  • 한청연은 비녀로 허리까지 길게 드리운 머리를 대충 틀어올렸다.
  • “내 예물 명세서가 너한테 있더냐?”
  • 도순은 고개를 저었다.
  • “왕 어멈이 가지고 있어요. 아씨가 필요하시면 지금 가서 왕 어멈더러 달라고 할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안대군 저택에 들어온 뒤로 왕 어멈을 보지 못 했어요.”
  • “달라고 해도 주지 않을 거야. 앞으로 왕 어멈을 조심하는 게 좋겠어. 이제는 우리와 한마음이 아닌 것 같으니.”
  • 도순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 “왜요?”
  • 한청연은 깊은숨을 들이쉰 뒤, 말했다.
  • “그날 남산의 절에 갔을 때, 문제의 향을 건네준 사람이 왕 어멈이었어. 그리고 내가 그 일을 당할 때도 왕 어멈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지. 그래서 내가 그렇게 속절없이 당했던 거야.”
  • 그녀의 말을 들은 도순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 “아씨께서 왕 어멈에게 얼마나 잘하셨는데… 정말 양심이 없네요. 그 인간을 보면 쇤네가 몽둥이로 때려서 내쫓겠어요.”
  • 한청연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 “내쫓기는 왜 내쫓아? 지금 모시러 가는 길인데. 옆에 두면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 도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왔다.
  • “아직 상처도 낫지 않으셨잖아요.”
  • “합방하는 걸 방해해야지.”
  • 한청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 뒤에 있던 도순은 깜짝 놀랐다.
  • ‘아씨가 잠이 덜 깼나? 대군마마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척 봐도 사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빼앗을 사람인데 아씨는 피하기는커녕 왜 자꾸 찾아가서 부딪치는 거야? 둘째 아씨랑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방해한다면 큰일 날 텐데.’
  • 그녀는 겁이 나서 손발이 떨리고 말까지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