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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개구쟁이 노태군

  • 한청연은 아침식사를 마친 뒤, 노태군에게 약을 주러 가야 하니 영식이더러 집사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말을 전하게 했다.
  • 약은 미리 준비된 것이었다. 비닐 포장을 벗기고 종이로 싼 뒤, 주변을 둘러본 한청연은 아까 영식이가 사온 찬합이 보였다. 그래서 각종 약들을 찬합 안에 와르르 쏟아넣었다. 약 상자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자꾸만 옷소매 안에서 약을 꺼내다 보면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모든 준비를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하는데 문앞에서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도순을 보내 재촉하려는 순간, 모자를 쓴 마부가 채찍을 들고 걸어왔다.
  • “왕자빈마마, 이만 떠나시지요.”
  • “마차는 어디 있느냐?”
  • 마부는 앞을 휙 하고 가리켰다.
  • “이미 준비 되었습니다.”
  • 앞을 내다본 한청연은 표정이 굳었다.
  • ‘이게 마차야?’
  • 말 대신 가마를 끌고 있는 건 반질반질 윤기 나는 검은색 나귀였다. 가마도 볏짚이 대충 깔린 수레가 아닌가? 어제 그녀가 투덜거린 말을 고깝게 받아들인 모영기가 벌인 짓이었다.
  • ‘이런 걸로 나에게 복수하는 거야?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군. 속은 또 왜 그렇게 옹졸하대? 이걸 타고 나가면 모영기의 체면만 깎이지 뭐.’
  • 한청연은 도순과 함께 나귀 수레에 오른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나귀는 콧소리를 내더니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떠나기 시작했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씩씩거리는 나귀의 콧구멍을 보자 한청연은 왠지 모르게 이 나귀처럼 성격이 좋지 않은 모영기가 떠올랐다.
  • 그러자 기분이 확 좋아졌다.
  • 안국공부에 도착하니 문지기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타고 온 나귀 수레를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한청연을 저택 안, 노태군의 뜰까지 안내했다.
  • 노태군은 많이 나아 정원의 석류 나무 아래에서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청연이 왔다는 말에 바로 긴 의자에 누워 담요를 덮고 눈을 감았다. 아픈 척 꾀병을 부리는 것이었다.
  • 한청연은 멀리서부터 이 모습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들고 온 찬합을 발치에 놓고 말했다.
  • “할머님, 밤새 강녕하셨사옵니까?”
  • 노태군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더니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왜 이렇게 늦게 온 것이냐? 이 할미가 눈치 없이 젊은 부부 아침잠을 깨운 것이냐?”
  • ‘풉, 이 할머니 왜 이렇게 장난스러우신 거야? 이런 걸로 농담한다고?’
  • 옆에 있던 어멈도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 한청연은 화끈거리는 얼굴로 찬합의 뚜껑을 열며 말했다.
  • “할머님도 참, 제가 약을 지어 오느라 지체된 거죠.”
  • 노태군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 “찬합 가득 약을 가져오다니. 너 지금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거냐? 아니면 약 먹고 배 터져 죽으라는 거냐?”
  • 노태군은 한청연이 뭐라고 해도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 한청연은 약을 모두 꺼내며 말했다.
  • “많지 않아요. 네닷새 동안 드실 양이에요. 제때에 약을 드신다면 곧 나으실 거예요.”
  • 노태군은 그녀를 뚫어져라 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 “내가 얼른 나아야 널 귀찮게 하지 않을 텐데. 그렇지?”
  • 한청연은 어이가 없었다. 하녀가 가져온 의자에 앉은 그녀는 노태군의 옆으로 다가가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저야 당연히 할머님이 얼른 나으시기 바라죠. 할머님이 절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와 기별한다 하더라도 자주 뵈러 올게요.”
  • 노태군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한 번만 더 기별이라는 말을 꺼내면 당장 기절할 것이니 그리 알거라.”
  • “저는 저하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 “첩실 소생에게 져서 물러나는 거냐? 참 못났구나.”
  • 한청연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 노태군은 의자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 “얘야, 나와 대비마마가 왜 영기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굳이 너희 둘을 이어준 줄 아느냐? 영기의 외조부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느라 조정에서의 세력은 아주 약하단다. 한청낭의 배후에는 정적(政绩)이 뛰어난 사부상서(吏部尚书)가 있어 영기에게 더욱 든든한 조력자가 되겠지.”
  • 이 또한 한청연이 궁금해하던 바였다. 그녀도 자신이 왜 모영기의 배필로 뽑혔는지 알 수 없었다.
  • “그런데 왜 저를…”
  • “인품 때문이지! 현명하고 참한 아내를 맞이하는 게 답이야. 영기는 머리가 단순하고 성격이 올곧아 똑똑하고 현명한 아내가 필요하단다.”
  • 한청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성으로 따진다면 연기를 잘하는 김씨 덕분에 좌의정의 적녀인 그녀는 진작부터 오만방자하고 무례하며 서출 여동생을 괴롭힌다는 거로 악명이 자자했다.
  • “네 아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김씨 가문의 사위로 들어갔지. 그렇게 십 년 동안 연락도 안 되지 않았느냐? 그동안 고향에서 네 어미는 시부모를 봉양하고 너와 네 오라버니를 예의 바르고 해박하게 키웠단다. 이건 일반 여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러나 네 어미가 서방 찾으러 온 것을 알고 김씨 가문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희 모자 셋을 내쫓으려 했단다. 사지에 몰린 상황에서 우연히 장안으로 오던 남소(南诏) 사신을 만났지. 그들은 이 일을 알게 되고 네 아비가 일부러 처자식을 버렸다고 조정에서 적발하며 이로써 장안을 모욕하려고 했단다. 하지만 네 어미는 사람들의 앞에서 지아비의 편을 들었고 덕분에 장안의 체면을 되살렸지. 사신은 자신의 수가 먹히지 않자 금은보화로 너를 유혹했어. 그때 너는 기껏해야 열한두 살인데 얼마나 영리하고 똑똑하던지. 그 어린애가 말로 남소 사람들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니까. 그때부터 대비마마는 너를 마음에 들어하셨단다. 네 어미처럼 훌륭한 여인이 가르친 아이 역시 평범할 리 없다면서 말이지. 하지만 김씨 가문은 네 아비에게 처자식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위로 들였고 또 사람들을 괴롭혔지 않느냐? 그래서 대비마마는 김씨를 첩실로 강등하고 너와 영기의 혼사를 추진한 거란다. 여인네들끼리의 음해나 모함 같은 꼼수는 우리 나이대의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익숙하고 하찮은 거지. 네 어미가 죽고 난 뒤, 너와 오라버니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는데 네가 어떻게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겠느냐? 거기다 한청낭을 괴롭힌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영기는 군영에서 자란 아이라 순진하고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단다. 그 아이에게 시간을 좀 더 주렴. 그러면 영기도 너의 진가를 알아볼 거야.”
  • 노태군은 케케묵은 일을 다시 꺼냈다. 한청연은 흐릿해진 기억에서 이 일들을 떠올렸다. 몸 주인의 어머니는 선비 집안 출신이고 외조부는 명망 있는 국학 선비였다. 그래서 출신이 가난하나 학식이 뛰어난 한청연의 아버지를 좋게 보고 딸을 시집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처가 사람들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 원래의 한청연과 오라버니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어렸을 때부터 외조모와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학문이나 견식이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한청연은 원래 유약하고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좌의정 댁에 들어가서 사는 동안, 갖은 설움을 겪으면서 마음이 약해진 것이었다.
  • 노태군의 말을 들은 그녀는 마음이 시큰거렸다. 드디어 자신의 힘든 처지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난 것 같아 가슴이 뻥 뚫리는 한편 눈시울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녀는 두 할머니의 기대에 어긋나는 결정을 해야 할 거 같았다.
  • ‘아무리 그래도 이분들이 만약 내가 순결을 잃은 것을 아신다면 기분이 어떠실까? 내 따귀를 내리치지 않으실까?’
  •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깨문 뒤, 상처받은 아이처럼 훌쩍이며 말했다.
  • “하지만 저는 대비마마와 할머님께 실망을 끼쳐드릴 것 같네요.”
  • 노태군은 한숨을 내쉬더니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 “이 할미가 목이 쉬어라 말했건만 너는 끄덕없구나. 기별이라는 말은 먼저 넣어두고 내일 네 친정에 한 번 다녀온 뒤에 결정하려무나. 말이 좋아 기별이지 결국 내쫓기는 거 아니냐? 널 아껴주는 이 한 명 없는 좌의정 댁에서 널 받아줄 것 같으냐? 다시 돌아간다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느냐?”
  • 그리고 귀찮은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 노태군이 말하지 않았다면 한청연도 잊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대에는 시집간 새색시가 사흘째 되는 날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일이 바로 그 날이었다.
  • 만약 순결을 잃은 소식이 좌의정 댁까지 퍼진 상태라면 내일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떤 폭풍일지 한청연도 알 수 없었다. 김씨는 분명 갖은 수를 대서라도 그녀를 내쫓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다.
  • 만약 순결을 잃어 시댁에서 쫓겨난 거라면 좌의정 댁에서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돼지우리에 가둘 것이다.
  • 한청연은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일어나 노태군의 약을 옆에 있는 어멈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복용해야 하는 양에 대해 자세히 당부했다. 어멈은 그녀를 대문까지 배웅하며 말했다.
  •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노마나님은 성격이 직설적인 분이라 하시는 말씀 모두 귀담아들을 얘기입니다. 왕자빈마마께서 일시적인 충동으로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 한청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안국공부를 떠났다.